EP.52
그녀의 제안은 간단했다.
그저 요구하는 대가의 종류가 바뀌었을 뿐이었으니까.
돈에서 사람으로 말이다.
“요즘 사람을 구하기도 쉽지 않더라고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죄다 공장에서 일하겠다고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 뿐이니. 결국 소수의 자본가만 떵떵거리며 배를 불리는 거죠.”
그 소수의 자본가가 정확히 본인이면서 라파노는 뻔뻔하게 웃으며 맞장구치기 바빴다.
“하하. 그렇죠! 사람들이 한번 돈맛을 보니까 얼마나 머리가 뻣뻣한지! 기술의 발전이란 것도 마냥 좋게 볼 게 아니더군요!”
“역시 사장님은 뭘 좀 아시네요. 그래서 말인데 인력을 좀 중개해주면 좋을 거 같은데.”
베로니카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 라파노.
“그런데 정확히 하는 업무가 뭔가요? 그걸 알아야 누굴 구하든 말든···.”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냥 적당히 부려 먹을 만한 사람으로 부탁드릴게요. 뭣하면 사장님 성에 차지 않는 하인들을 데려오셔도 좋고요.”
그 말을 듣고서 라파노는 턱을 짚은 채 고민에 잠겼다.
“성에 차지 않는 하인이라···.”
“어머. 그런 사람이 있는 모양이네요.”
“하하. 언제든 넘쳐나죠.”
베로니카는 화사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얼마나 추악하며 잔인한 사람인지 아는 나로선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면 거래 성립이네요. 잘 부탁드려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배경이 전환되었다.
이제 어느덧 이야기도 최종장을 향해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레이첼이 다시 등장하였다.
장소는 평범한 가정집의 거실. 아마도 친언니로 보이는 메이드복 차림의 여자와 얘기를 나누는 레이첼.
“그게 뭔 소리야?”
“일자리를 옮기게 돼서 기숙사에 머물러야 할 거 같아.”
“갑자기 일은 왜? 그 저택에서 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동생의 질문에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헤헤···. 아까 말해줬잖아. 내가 실수를 저지른 게 고용주님은 마음에 안 드셨나 봐.”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 언니 실수냐고! 그 못생긴 돼지가 괴도한테 목걸이를 털린 게 왜 언니 잘못인데!?”
“내가 뒷마당에 풍선을 도둑으로 착각했거든···. 진짜 감쪽같았는데 아마 마법이었던 게 아닐까?”
머리가 멍했다. 설마 이게 이런 나비효과를 불러오리라곤···.
내 기억 속에선 제대로 등장조차 하지 않는 엑스트라. 그저 뒷마당에서 내가 준비한 풍선을 발견하고 그것을 라파노에게 보고한 게 전부인 메이드.
그녀가 레이첼의 친언니였단 사실을 어떻게 눈치챈단 말인가.
“아오! 답답해! 딱 보니까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그냥 곧이곧대로 해고당한 거지!? 그냥 덤터기 씌워진 것뿐이잖아! 잘못은 그 괴도가 한 건데 언니가 왜 해고를 당하냐고···!”
“괜찮아. 새로 이직한 직장은 되게 좋다던 걸? 게다가 돈도 많이 준대.”
동생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인지 헤실헤실 웃으며 손을 내젓는 레이첼의 언니.
“어디서 일하는데? 무슨 일이야? 기숙사는 여기서 멀어?”
“여기서 가까워. 일은 똑같이 메이드 일이래. 고용주님도 되게 친절하고 예쁜 아가씨분이시래.”
“흥···. 그래도 대머리 아저씨보단 낫겠네.”
이렇게 전혀 상관없을 것 같던 레이첼과 드라칸 사이에 접점이 생기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왜 그녀는 자진해서 드라칸의 실험체가 되었나?
수정구슬이 보여준 다음 과거에서 마지막 의문도 모두 해소되었다.
살벌한 표정으로 거칠게 저택의 문을 두드리는 레이첼.
누가 보더라도 잔뜩 분노한 것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잠깐 이때라면···.
과거의 시기를 계산해보니 그때가 분명했다.
교회에서 테리시아의 인터뷰를 진행할 때 뜬금없이 저녁에 약속이 있다며 빠졌던 레이첼. 덕분에 샤론이랑 단둘이 어색하게 교회로 갔던 날짜와 정확히 일치했다.
쾅쾅!! 계속해서 저택의 문을 두드리자 곧 안에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등장했다.
“무슨 용무로 이리 소란을 피우십니까.”
“여기 레아라는 사람 있죠!? 이 집에서 메이드로 일하는 여자요!”
“흠. 왜 그러십니까?”
“동생이 언니를 보겠다는데 왜냐니! 여기서 이상한 일 하는 거 다 알고 있어! 빨리 언니 데려와!”
다짜고짜 소리를 내지르는 레이첼을 보고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남자.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직접 설명해드릴 테니.”
정문이 열리자 레이첼도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는지 각오가 서린 표정을 지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의 화려한 응접실.
두 여자가 마주 앉은 채로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는 베로니카와 그런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레이첼.
“일단 물을게요. 무슨 얘기를 들으셨길래 그런 반응을 보이신 건가요?”
“시치미 떼지 마. 벌써 일주일이 넘게 흘렀는데 언니가 연락 한번 안 했어. 게다가 언니가 옛날에 일하던 대머리의 저택에 찾아가서 이상한 소문도 전부 들었고.”
즉 언니와의 연락이 끊긴 레이첼이 걱정하다 못해 라파노의 저택을 방문했고 거기서 언니가 일하게 된 새 직장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들었다는 모양이다.
그런 얘기를 면전에서 듣고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베로니카.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가 커질 뿐이었다.
“그 교복. 혹시 아카데미 학생이신가요?”
“그러면 뭐 어쩌려고요. 마법 혐오자이신가?”
“후후. 그런 건 아니고요. 여기서 후배를 만나니까 반가워서요.”
그 말에 레이첼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그쪽도 마법사예요?”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졸업장은 따냈죠.”
핑거 스냅과 함께 손가락 위에 생겨난 조그마한 불씨. 가장 기초적인 마법 중 하나인 점화였다.
“후배님.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전부 오해에요. 원래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고용주의 자극적인 속설이나 소문으로 뒷담하는 걸 즐기잖아요?”
“···됐으니까 언니를 직접 만나게 해주세요. 그러면 제 잘못인 거 전부 인정하고 사과할 테니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미 불렀으니 아마 슬슬 여기로 올 테니까요.”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는 레이첼의 언니.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 걸 넘어 이전보다 표정도 훨씬 밝아져 있었다.
“아! 레이첼!”
“이 바보 언니가! 대체 왜 연락을 안 하는 거야!?”
많이 걱정했던 탓인지 거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귀여운 투정을 쏟아내는 레이첼.
“헤헤···. 미안해. 너무 일에 몰두하면서 바쁘게 지내느라···.”
“레아 씨.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적당히 일하고 여가를 즐기시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귀여운 동생을 걱정시키면 고용주인 제가 대신 욕을 먹는다니까요?”
“죄송합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갑을관계.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임에도 불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에 레이첼 역시 완전히 불안을 씻어버리고 안심한 듯 보였다.
잠깐 서로 얘기를 나누며 그간의 회포를 풀고서 다시 일하러 응접실을 먼저 떠나는 언니. 그에 맞춰 레이첼도 저택을 나가보려던 찰나 베로니카가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
“후배님. 괜찮으시면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네? 네. 그러죠.”
저 사이에 끼어들어 레이첼에게 알려주고 싶다. 저 꾸며낸 가짜 가면에 속지 말고 당장 도망치라고. 하지만 이것은 이미 벌어졌던 과거의 일. 내가 개입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잠깐의 침묵 이후 베로니카는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다소 민감할 수도 있는 내용임에도 그녀의 뛰어난 언변은 오히려 진심 어린 관심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레아 씨랑 꽤 친해졌다고 생각해요. 워낙 착하고 성실한데다 일도 잘하니 친해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죠.”
“뭐 저희 언니가 바보처럼 착하긴 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얘기도 많이 나누고 사정이 어렵다는 것도 대충은 들었어요.”
레이첼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 내용은 원작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되며 지나간다. 꽤 팍팍한 집안 형편에 더해 아카데미의 비싼 학비까지 감당하느라 언니는 물론 레이첼 역시 틈날 때마다 단기 알바 등을 다닌다는 식으로 말이다.
“어쩌겠어요. 망할 아버지가 빚만 잔뜩 물려주고 돌아가셨는데. 덕분에 언니만 개같이 고생하고···.”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학비도 꽤 부담될 텐데 말이에요.”
“······.”
그렇구나. 이런 식으로 접근했던 거였나.
“마침 괜찮은 일거리를 하나 알고 있는데 후배님이라면 충분히 조건도 맞으니까 제가 그쪽에 추천해드릴 수 있을 거 같거든요. 어떠세요?”
“일거리요?”
“네. 시간도 저녁 대이고 일주일에 한두 번만 투자하면 돼서요. 참 좋은 일거리인데 마법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있어서요. 우리 후배님한테 딱 맞는 조건이길래 말씀드리는 거예요.”
레이첼은 신중한 표정으로 대답은 망설였다. 하지만 테이블 밑에서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은 이미 마음이 치우쳐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얼마나 주는데요?”
베로니카가 부른 액수는 확실히 솔깃할 수밖에 없는 단위였다.
결국 한참을 망설이던 레이첼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당장 받아들이진 않았으나 이다음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야 뻔했다.
아마 며칠 안에 다시 저택에 방문해 베로니카의 제안을 받아들였었겠지.
굳이 이다음부터는 볼 필요도 없어 보였다.
결국 언제나 문제 원인의 대부분은 거슬러 올라가면 돈이었으니까.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건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었으니.
돈이 문제라고?
“까짓거 내가 주면 되잖아.”
괴도의 자본력을 얕보지 말라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내일부터 공모전이네용..!
과연 저 뮹뮹은 공모전에 참가할까용..?
정답은 바로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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