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3
어느샌가 보랏빛의 세상은 사라지고 한밤중의 에펠탑으로 돌아와 있었다.
“원하던 과거를 보았나요?”
“네.”
마녀는 수정구슬을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다행이네요. 구슬은 한번 사용하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거든요.”
원작에서 나왔던 내용이기에 기억하고 있다.
사용자마다 개별적으로 적용되는 쿨타임은 무려 5년. 즉 이번에 구슬을 사용해 과거를 확인한 나는 앞으로 5년 동안은 구슬의 도움을 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을 사는 마녀에겐 찰나의 시간일지 모르지만 평범한 인간에게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었다. 이런 페널티마저 없으면 너무 사기적인 능력이긴 하니까 이해는 간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어떻게 해야 할지 깨달았어요.”
“부디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랄게요.”
다만 예언의 마녀 본인은 이 수정구슬의 페널티에 구애받지 않는다. 즉 본인이 원하는 과거와 미래를 모두 관찰할 수 있는 존재. 정확히는 자신의 미래를 제외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마녀님. 제 미래는 어떤가요?”
내 질문에 마녀는 오묘한 미소를 내지었다.
“궁금하신가요? 당신의 앞날이 어떠한지.”
[저런 얘기에 현혹되지 마라. 아무 쓸데 없다.]
여신님의 갑작스러운 충고. 평온한 어조임에도 마치 내가 절대 듣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가 궁금하다고 대답하면 알려주실 건가요?”
[크로.]
“미래는 단순히 안다고 바뀌지 않아요.”
“정해진 운명이란 거네요.”
“하지만 반대로 모든 것이 섭리대로 흘러간다고 확신할 필요도 없죠.”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저 수정구슬에 내 미래가 나오기는 할까?
나라는 존재는 본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던 이레귤러다. 원작에 등장하는 크로 모리스는 아무 비중 없던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괴도 레이븐은?
내가 라파노의 목걸이를 훔친 행동은 나비효과가 되어 레이첼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세세한 과정은 전부 수정구슬을 통해 볼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이며 미래와는 다르다.
아직 펼쳐지지 않은 훗날의 가능성.
그것이 바로 미래. 과연 내 미래는 저 수정구슬에 전부 기록되어 있을까?
마녀는 처음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사뿐사뿐 다가왔다.
그녀의 걸음걸이에 맞춰서 찰랑거리는 금발 롤빵.
얼굴을 내밀고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댄 예언의 마녀가 내게 간지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의 최후는 그 무엇보다 끔찍할 거예요.”
“······.”
“오늘 즐거웠어요. 그럼 안녕히.”
그렇게 하룻밤의 파리 여행은 끝을 맺었다.
***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신비로운 보랏빛을 거쳐 점차 주홍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일출이 시작되며 떠오른 여명의 빛이었다.
“······.”
잠시 턱을 괴고 그 찰나의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바로 출발하면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면하려나.
컨디션을 유지하려면 지금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맞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너무 많은 잡념을 떠올리느라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레이첼의 일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문제가 아예 없다고 하긴 어렵다. 특히 수정구슬로 전부 확인하지 못한 세세한 내용도 있었으니까.
가령 레이첼이 죽을 뻔했던 내게 사과 한번 없이 사실을 숨긴 이유라던가.
현재 그녀의 언니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지 못한 것 등등.
그런 것도 대충 어째서인지 예상은 갔다.
베로니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짐작했었다.
그녀의 개성 마법은 다름 아닌 최면.
어떤 면으로선 드라칸 중에서도 가장 껄끄러운 능력이었다.
다만 최면이 완전히 먹혀들려면 정신력이 굉장히 불안하거나 시간이 오래 필요하다.
그러니 지금은 아직 아무리 심하더라도 강력한 암시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간단한 이유로 시작해 점차 질척한 늪에 빠지는 것처럼 최면을 강하게 만들겠지.
그 전에 최대한 빨리 레이첼의 암시를 풀어야 한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나 드라칸의 훼방이다. 본인들의 실험체가 그만둔다고 할 때 순순히 포기할 리는 없을 테니까.
이것도 머릿속으로 구상해둔 계획은 있다.
무조건 먹힌다고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어지간해선 드라칸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걸로 끝이다.
당장 이 달리는 기차 안에선 무언가를 더 고민한다고 달라질 게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눈을 감지 못하고 계속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사실 지금 내 머릿속을 괴롭히는 건 레이첼의 문제보다도 아까 마녀에게 들었던 내 미래에 관한 이야기였다.
‘당신의 최후는 그 무엇보다 끔찍할 거예요.’
끔찍한 최후라.
대체 그녀는 내게서 무슨 미래를 본 걸까?
겁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단순히 낭만에 따라 시작한 괴도 일이지만 이 때문에 생명마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처음부터 이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머리로만 이해하고 속으로는 그냥 가볍게 여겼던 걸지도 모른다.
“여신님은 알고 계셨나요?”
[본래 신은 인간에게 미래를 알려주지 않는단다. 정해진 섭리가 어긋나게 되니까.]
“···그러면 무고한 학생을 괴도로 만드는 건 괜찮고요?”
[너는 내 유일한 신도이며 가장 소중한 아이란다. 그러니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진 않구나.]
자세한 미래를 알면 내가 다친다는 건가.
이미 끔찍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단 얘기를 들었는데 까짓거 다친다고 뭐가 바뀌기나 할까?
나도 안다. 여신님께 투정을 부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한동안 가만히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자 곧 온몸을 감싸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보이지는 않아도 그 온기가 누구의 것인지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설령 네가 그 마녀의 말처럼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끝까지 네 곁에 있어 줄 테니.]
“···하하. 그거 설마 위로라고 한 거예요?”
그 말은 마녀가 한 예언이 사실이라고 말해주는 꼴이잖아.
그래도 오히려 기분이 훨씬 풀려버렸다.
그냥 미련을 놓고 복잡한 생각을 치워버린 느낌이랄까.
마녀가 얘기한 대로 미래를 안다고 해서 어차피 달라질 건 없다. 하물며 그게 사실이라고 벌써 단정 짓고 벌벌 떨 필요는 더더욱 없다.
지금 당장에만 신경 쓰기에도 빡빡한 인생이니.
창밖으로 비춰 들어오는 밝은 햇살에 포근히 눈을 감았다.
나는 여신님의 포근한 품에 기대어 달콤한 단잠을 청했다.
***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지각해서 벌점이라도 먹었다간 성적에 미치는 영향이 꽤 크기에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성적을 잘 받는다고 특별히 좋은 건 없지만 말이지.
반에 허겁지겁 들어오는 나를 보며 레이첼이 피식 웃었다.
“뭐냐? 네가 웬일로 이렇게 늦는대? 어제 밤늦게 잠도 안 자고 뭔 짓을 했길래?”
“···넌 여자애가 그런 말을 막 하냐.”
“하. 내가 뭔 말을 했다고?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이 찐따야.”
아오. 얘가 만나자마자 사람 속을 긁네.
내가 모처럼 도와주려 했는데 그냥 확 때려치워?
아니다. 그래도 역시 내 책임이 있는데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지.
레이첼을 어떻게 도와줄지는 대충 생각해뒀다. 그냥 모습을 드러낸 채로 대놓고 할까도 생각했지만 괜히 그랬다간 녀석의 자존심이 상하거나 아예 관계가 어색해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아르센 뤼팽의 이름을 이용하는 수밖에.
마침 자선재단을 운영 중이니 명분도 딱 마련되어 있고 말이다.
다만 그 전에 먼저 확인해봐야 할 게 있다.
레이첼이 정말로 베로니카의 암시에 걸린 건지 아니면 멀쩡하게 제정신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언뜻 봤을 때는 평소의 레이첼과 완전히 똑같아 보이지만. 원작을 읽은 나는 유일한 구별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레이첼.”
“엉?”
“수업 마치고 내가 맛있는 거 사줄까?”
“오···. 네가 웬일이냐? 뭐 사주게?”
“치킨 어때?”
맛있는 걸 사주겠단 말에 반색하던 레이첼이 치킨이란 소리를 듣자마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 됐어.”
“왜. 닭 싫어해?”
“그러면 뭐 어쩔 건데.”
오. 확실히 반응이 있다.
베로니카의 최면은 매우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지만 단 하나의 약점이 존재한다.
바로 수탉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풀린다는 것.
따라서 최면에 걸린 대상은 본능적으로 닭을 혐오하고 기피하게 된다.
물론 치킨을 싫어한다는 것만으로 확신하기엔 이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수탉을 눈앞에 데려와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건데 당장 지금 상황에선 어렵겠지.
오늘 수업이 끝마친 뒤에 확실하게 시도해보는 수밖에.
“알았어. 그러면 다른 거 사줄 테니까.”
“···진짜지? 이래놓고 치킨 먹으러 가면 진짜 뒤진다.”
“내가 너도 아니고 싫다는데 왜 억지로 그러겠냐.”
레이첼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얘기했다.
“어쭈. 찐따 주제에 이제 대들기도 하고. 많이 컸다?”
“윽. ···아무튼 다른 애들한테는 얘기하지 마.”
“엉? 왜?”
“왜긴. 너만 사주려는 거니까.”
다른 애들 다 있는 데서 어떻게 수탉 울음소리를 들려주냐.
그런데 레이첼은 내 말을 뭔가 단단히 오해한 모양인지 갑자기 거리를 확 벌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어째서인지 살짝 달아오른 얼굴.
“너···.”
“아니야.”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부정해버렸다.
그런데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우왕! 공모전 시작 하루만에 3000개가 올라왔대용!
작까이기 이전에 독짜로서 아주 신이 나네용..!
저 뮹뮹도 공모전에 슬쩍 발을 담갔으니 관심이 있으시다면 읽으러 와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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