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4
약간의 트러블이 있긴 했으나 어찌어찌 레이첼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진짜 너한테 하나도 관심 없거든.
내 취향은 훨씬 더 청초하면서 조신한 요조숙녀라고.
그래도 일단 저녁 약속은 잡았으니 첫 단계는 성공이었다.
이제 남은 건 어떻게 레이첼에게 수탉의 울음소리를 들려주냐는 건데.
대충 어떻게 할지 생각해두긴 했는데 과연 계획대로 잘 흘러갈지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시간은 훌쩍 지나 금방 수업 일과가 모두 끝났다.
사실 수업 시간에 거의 졸아서 금방 시간이 지나간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기차에서 단잠을 청했다고 해도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더라.
아무튼 우리는 아침에 약속한 대로 단둘이서 저녁을 먹으러 가게 되었다.
“······.”
길을 걷는 우리 둘 사이에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평소엔 틈만 나면 시비를 걸면서 말을 걸어오던 레이첼이 지금은 한마디 말도 없이 과묵한 소녀가 되어버렸다.
설마 아직도 내 말을 의식하고 있는 거야?
아니라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부정했는데도 여전히 오해 중인 거란 말이야?
이쯤 되면 대단하다고 엄지를 치켜올릴 지경이다.
결국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어 침묵을 깨트렸다.
“뭐 먹으러 가는지 궁금하지 않아?”
“···네가 알아서 잘 준비해놨다며.”
“그래도 너무 너답지 않게 순순히 따르는 거 같아서.”
“야. 그게 무슨 뜻이냐? 원래 나는 성질이 더럽다는 소리냐?”
잘 알고 있네. 평소의 자기 모습을 좀 객관적으로 돌이켜보란 말이야.
곧이어 우리는 아카데미에서 그리 멀지 않는 음식점에 도착했다.
레이첼은 간판에 적힌 가게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파리지앵?”
“와본 적 있어?”
“있겠냐. 딱 봐도 존나 비싸 보이는데.”
어찌 보면 현실 고증이라고 해야 하나.
세계 최강 대국인 브리타니아에 딱 하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바로 음식이다. 브리타니아의 요리는 세계적으로도 맛없기로 소문이 나 있다.
반면 옆 나라인 프랑크 왕국은 세계적인 요리 강국으로 찬사가 자자하고. 따라서 런던에 존재하는 고급 음식점은 대부분 프랑크 요리를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선택한 이 식당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들어가자. 내가 사줄 테니까.”
“···너. 시발 나 돈으로 꼬시려는 거 진짜 아니지?”
“대체 몇 번을 더 말해야 믿어줄 건데?”
레이첼이 눈을 찌푸리면서 당당하게 외쳤다.
“이래놓고 의심 안 하는 게 더 미친 거지! 게다가 왜 다른 애들한텐 비밀로 하고 단둘이 오는데!?”
“말했잖아. 다른 애들한테도 나중에 따로 사줄 거야.”
당장 여기서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지금으로선 이렇게 말하며 넘기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내 급조한 변명은 오히려 악수로 작용한 듯했다.
여태껏 계속 나를 의심하던 레이첼이 처음으로 완벽히 이해했다는 듯한 불길한 미소와 함께 나를 쓰레기로 몰아가 버렸으니까.
“아 이제 알겠다. 너 이 새끼 우리 셋을 동시에 꼬시려고?”
“아니거든!”
[큭! 결국 들켜버렸구나···.]
‘여신님은 제발 조용히 좀 계세요!’
더 이상한 얘기가 나오기 전에 억지로 그녀의 등을 떠밀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야! 진짜 들어가려고···!?”
“그럼 당연히 진짜 들어가지.”
식당의 내부는 역시 매우 고급스러웠다. 우리를 확인한 남성 종업원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식당이 처음인지 매우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레이첼. 너무 긴장하지 말라는 의미로 옆에서 가볍게 에스코트해주며 그녀를 리드해주었다.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그것을 부루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레이첼은 메뉴 옆에 적인 가격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너무 속마음을 못 숨기는 거 아니야?
“뭐 먹을래?”
“야···. 여기 말고 다른데 가자···.”
내게 조용히 속삭이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레이첼.
“됐으니까 빨리 골라.”
“···윽. 찐따 주제에···.”
“아니면 그냥 내가 알아서 시킨다?”
가볍게 손뼉을 쳐서 종업원을 불렀다. 이런 방식이 솔직히 좀 어색하긴 해도 지금 당시로는 기본적인 에티켓이니 어쩔 수 없지.
테이블로 다가온 종업원에게 주문을 시켰다. 식당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기본 메뉴였다. 물론 그렇다고 가격이 제일 싼 건 아니었지만.
종업원이 사라지자 레이첼은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인 채 진심으로 따져왔다.
“장난쳐!? 이게 그냥 맛있는 걸 사주는 수준이야?!”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 그냥 가격 생각하지 말고 맛있게 먹어.”
“···너 돈 많냐? 그래서 나 놀리려고 그러냐?”
“정말 그런 의도였다면 이것보다 훨씬 쉬운 방법이 널렸을 텐데 뭐하러.”
“······.”
물론 그녀가 이렇게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도 전부 이해한다.
어쩌면 진심으로 이 자리가 불편할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브리튼의 수도인 런던에서 뜬금없이 수탉을 찾기란 절대 쉽지 않다. 철과 매연이 가득한 산업의 중심에 수탉은 너무 이질적인 존재니까.
찾으려면 억지로 찾을 수야 있겠지만 그런 장소로 레이첼을 데려간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언뜻 봐선 평범한 프랑스 요리 전문점처럼 보이는 이 식당에는 사실 아주 특별한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반갑습니다. 손님. 주문하신 요리 나왔습니다.”
직접 홀까지 나와 자신이 만든 요리를 서빙해주며 친절하게 설명까지 곁들어주는 주방장.
무슨 얘기인지 아무 관심도 없는지 시큰둥한 표정의 레이첼.
반면 나는 최대한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간중간 호응도 섞어주며 진심을 다해 리액션을 펼쳤다.
그런 내 반응에 감동한 건지 주방장은 더더욱 열성적으로 요리를 설명해주었다.
아무래도 본인 요리에 자부심이 상당한 모양이다. 그렇게 충분히 호감도를 올렸다고 판단한 뒤 나는 싱긋 웃으며 주방장께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이 식당에 아주 귀여운 마스코트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하. 저희 헨리 말입니까?”
“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직접 볼 수 있을까요?”
“···음. 죄송하지만 식사하는 공간인 홀에 헨리를 데려올 수는 없습니다.”
거절의 말에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부탁을 드렸다.
“그럼 저희가 밖으로 나가면 괜찮을까요? 뒷마당에 있다고 들었는데.”
“흠···. 그렇게 만나보고 싶다면 어쩔 수 없군요. 따라오시지요.”
“감사합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내 귓가에 속삭이는 레이첼.
“헨리라는 새끼가 뭐하는 놈인데?”
“되게 귀여운 고양이야. 애교도 엄청 많고 진짜 귀엽게 생겼대.”
“···흥. 난 또 뭐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막상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뒷마당으로 향하는 레이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빨개진 귓바퀴는 숨길 수가 없었다.
고양이 좋아하는구나.
한 발짝 뒤에서 따라 걸으며 그녀에게 미리 사과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 그래도 너를 위해서 그런 거니까 나중에라도 이해해주길 바라.
괜히 고급 식당이 아니란 건지 밖의 뒷마당 또한 상당히 잘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멋들어진 새장 속에 있는 멋들어진 꽁지깃의 수탉.
“···어?”
닭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딱딱하게 얼어붙은 레이첼.
나는 즉시 그녀의 뒤에서 와락 끌어안아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움찔거리며 내 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지만 나는 어떻게서든 그녀를 붙잡은 팔에 힘을 꽉 주며 버텼다.
울어라! 울어!
낯선 외부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탉은 아마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모양이다.
베로니카의 마력을 감응한 게 아닐까. 예로부터 부정한 것을 쫓는다는 속설을 지닌 수탉의 울음.
녀석은 목깃을 부풀리며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더니 곧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꼬끼오-!
그와 동시였다.
“크윽!”
마치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한 듯 신음을 터뜨린 레이첼이 축 늘어졌다.
다리까지 휘청이며 내 품에 힘없이 안겨드는 레이첼.
“하하! 이놈 울음소리가 아주 장사지요? 무려 파리에서 직접 데려온 영물이랍니다!”
당연히 진짜 신성한 영물은 아니고 그냥 평범한 수탉일 것이다.
원래 프랑스의 상징 중 하나가 닭인 만큼 식당의 컨셉을 위해 준비해놓은 거겠지.
아무튼 이 녀석 덕분에 무사히 레이첼의 최면을 풀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주방장의 자랑에도 감사한 마음으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정말 그렇네요. 울음소리가 완전 장군감입니다.”
“하하! 그래서 가끔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오기도 하죠 아니 사실 매일 들어오지만요.”
그건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웃으면서 할 말이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지금은 그보다 레이첼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내 품속에 안겨 있는 그녀는 마치 빈혈이 온 것처럼 비틀거리는 중이었다.
“레이첼. 안으로 들어갈까?”
“······.”
머리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찌푸리던 레이첼이 곧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가 아파···.”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나 보네.”
“응···.”
얼굴이 살짝 붉어진 레이첼이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며 수줍게 얘기했다.
“그 고마워···.”
“···어?”
세상에. 설마 이 녀석이 이렇게 청초한 모습을 보이다니.
위험했다. 순간 두근거릴 뻔했어.
하지만 참아냈으니 내 승리다.
이제 작전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시간이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헨리는 이후 제작진이 맛있게 먹었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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