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5
레이첼과는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암시가 풀렸으니 이젠 서서히 의구심이 커지게 될 것이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베로니카의 제안이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지.
강박에 가까웠던 돈을 벌겠다는 집착도 줄어들면서 지금 하는 일이 무언가 잘못됐단 위화감을 느낄 때쯤 내가 아르센 뤼팽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녀를 도와줄 계획이다.
당연히 드라칸은 그 꼴을 순순히 지켜보진 않을 것이다. 물론 구슬로 과거를 봤을 때 드라칸이 레이첼에게 진심을 쏟아붓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다방면으로 뻗어나가는 계획 중 하나가 허무하게 실패하는 꼴을 두고 볼 이유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다. 드라칸은 용의 창조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여러 가지의 음모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다. 그중에는 정말로 세계를 위험에 빠트릴 만한 계획도 존재하기에 녀석들이 원작에서 빌런 취급을 받는 것이다.
레이첼의 실험은 그러한 드라칸의 여러 계획 중 하나에 불과하다. 만약 훨씬 더 중요한 계획과 나란히 놓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이 온다면 녀석들은 망설임 없이 레이첼을 포기하겠지.
내가 노리는 것도 바로 그거였다.
설령 드라칸이라 할지라도 레이첼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도록 훨씬 더 중요한 계획과 엮어버리는 것.
드라칸이 가장 공들인 핵심 계획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묵시록의 붉은 용’.
그야말로 미친 스케일을 자랑하는 작전으로서 사실상 세계를 멸망시키겠단 말과 다름없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원작에선 주인공의 활약으로 막아내게 되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좀 손을 써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무래도 한동안 바쁘게 움직여야 할 듯했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 괴도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마음 같아선 바로 레이첼을 만나 도와주고 싶지만 암시에서 완전히 풀려나 내 후원을 받기로 결심을 세우기 위해선 시간이 꽤 필요할 것이다.
그전까지는 먼저 드라칸의 계획을 저지할 초석을 다질 필요가 있었다.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핵심이 될 아티팩트를 빼돌리는 것.
즉 드라칸으로부터 물건을 훔치는 셈이다.
그야말로 괴도에게 가장 걸맞은 방식이 아닌가?
[걱정되지는 않느냐?]
“뭐 만약 녀석들에게 걸린다면 바로 죽을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안 걸리면 그만이잖아.
게다가 나도 나름대로 믿는 한 수가 있단 말이지.
“진주의 흡수도 끝났고 말이에요.”
확실히 느껴진다.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마력의 흐름을.
진주의 힘을 완전히 흡수한 덕에 나는 순식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 상태로도 정정당당히 지크프리트와 싸운다면 1초 만에 얼음보숭이가 되겠지만.
내 개성은 어디까지나 마술 즉 정정당당하지 않은 싸움에 특화된 마법이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걸린다고 해도 뭐 어때.
까짓거 끔찍한 최후를 맞는 거밖에 더 하겠어?
“그럼 슬슬 가볼까요?”
[그래. 오랜만의 괴도 복귀구나.]
***
오늘 털 곳은 다름 아닌 대학교였다.
대학교는 생각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기관이다. 산업 시대 영국은 물론 훨씬 이전의 로마 제국 때도 존재했으니까.
당장 현실 지구에서도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교의 설립 연도는 1096년.
무려 1000년도 전에 설립됐다는 뜻이다.
물론 현대인이 생각하는 대학과는 꽤 다르겠지만 중요한 건 대학이야말로 국가에서 가장 수준 높은 학술 교육 기관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관점의 차이일 뿐 이 대학 내에는 웬만한 박물관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가치를 지닌 보물이 매우 많이 잠들어있다. 그 가치가 학술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일반인은 잘 공감하지 못할 뿐이지만.
오늘의 목표는 대학 내에 있는 고고학회였다.
이름만 들어도 괴도가 탐을 낼 것만 같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훔치기로 한 거다.
꼬우면 이름을 고고학회라고 짓지 말았어야지.
이번에 노리는 것은 바로 천사의 나팔이라 불리는 보물. 더 정확히는 성유물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 녀석은 현재로선 엄청난 가치를 지녔다고 보기 힘들었다.
용도나 출처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고대 유물 정도의 인식이 전부.
그나마 드라칸이 유일하게 이 나팔의 용도가 무엇인지를 짐작이라도 하고 있다.
[하계의 아이들이 쉽게 알아차리긴 힘들겠지. 나팔 하나만 있어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여신님의 말대로다.
이 천사의 나팔은 세트가 존재한다. 두 개를 같이 준비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쓸모도 없는 골동품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드라칸이 굳이 나팔을 대학교에 방치하고 있는 이유 역시 다른 짝을 찾지 못했기에 계획의 진행을 보류해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굳이 더 꾸물거릴 필요도 없었다. 곧바로 나는 마술을 사용해 대학교의 건물 안으로 조심스레 진입했다.
‘저기 있네요.’
투명한 유리관 속에 잠들어있는 나팔.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늙은 교수 한 명이 전부였다.
하긴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 가능한 대학교에서 보안이 철저하긴 어렵겠지. 심지어 저 나팔은 현재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흔한 유물 중 하나일 뿐이니까.
굳이 무슨 특별한 트릭을 사용할 수고조차 아까웠다. 잠시 교수가 화장실을 가느라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나팔을 관에서 꺼내 쏙 빼갔다.
그리고 텅텅 비어 허전한 자리에 대신 내 카드를 전시해두었다.
사실 여태까진 줄곧 범행 전에 예고장을 보냈었는데 오늘은 반대로 범행을 저지른 뒤 카드만 남겨놓기로 했다.
이유는 당연히 드라칸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슬쩍 훔치기 위해서였다. 정정당당하게 예고장을 보내면 드라칸도 그에 맞춰 대응할 게 뻔하니까.
항상 해오던 철칙을 깨버린 것이 아쉽긴 해도 굳이 불가능하단 걸 알면서 무모한 도전을 벌이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이것도 나름대로 낭만 넘치지 않는가?
뭐? 아까 전의 자신 넘치는 모습은 어디 갔냐고?
진주로 파워업 했다고 당당하게 드라칸과 싸우겠다고 하지 않았냐고?
무슨 헛소리.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마술 실력도 올랐으니 들키지 않게 훔치면 장땡이라고 했지.
왜 굳이 위험천만하게 내가 훔쳤다는 사실을 사방팔방 알리고 드라칸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가?
내가 굳이 예고장을 보내놓지 않은 이유.
나팔을 훔친 사람이 ‘괴도 레이븐’이 아니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즉 저기 남겨둔 카드 역시 평소 쓰던 것과 다른 평범한 흰색 명함 카드였다.
그곳에 적혀 있는 글귀는 일종의 암호문과 같았다.
-묵시록의 예언이 성취될 날이 머지않았다.
분명 나팔을 예의주시하던 드라칸은 내가 남긴 카드의 내용도 확인할 것이다.
“아마 난리가 나겠지.”
저 암호문은 쉽게 말해 ‘엔드게임.’
즉 작전이 최종장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그러면 즉시 드라칸의 모든 조직원은 진행 중이던 다른 계획을 중지하고 최종장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즉 그들에겐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우선순위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전부 내가 짜놓은 거짓말.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는 비밀을 이용한 결과였다.
물론 녀석들도 시간이 지나면 내 카드가 가짜라는 사실을 깨닫겠지.
하지만 그때 가서는 이미 다시 돌이키기엔 상당히 늦어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 나팔을 내가 훔쳤다는 사실을 절대 들키지 않아야 한다. 만약 걸리기라도 한다면 녀석들은 목숨을 불살라서라도 내게 보복을 가하려고 하겠지.
‘···설마 끔찍한 최후라는 게 이건가?’
충분히 합리적인 추측인데?
괜히 방심하지 말자. 언뜻 보기엔 그냥 방치해둔 것처럼 보여도 분명 드라칸 녀석들이 방책을 하나쯤은 세워뒀을 확률이 높다.
나팔을 품에 소중하게 넣어둔 다음 살금살금 최대한 조심스럽게 건물을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손쉽게 끝났나 싶던 순간 역시 예상했던 대로 드라칸의 방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나팔이 정해둔 거리 밖으로 사라져버리면 발동하게 설계해둔 모양이다.
“어···.”
눈앞에 있는 골렘을 보고 침음성을 흘렸다.
딱히 덩치가 크진 않지만 언뜻 봐도 더럽게 강해 보였다.
게다가 골렘이 움직인단 소리는 이 골렘의 주인 역시 나팔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맹렬히 이리로 다가오는 중이란 뜻이었다.
즉 최대한 빨리 현장을 벗어나야만 했다.
우우웅-.
신비로운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눈동자.
저걸 눈동자라고 부르는 게 맞나?
아무튼 빨리 도망치자. 당연히 누구에게 모습을 들켜선 안 되므로 다시 건물로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결국 녀석을 뚫고 정면으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는데.
일단 어떻게서든 해보는 수밖에.
‘설마 여기서 성장을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오히려 좋은 기회지 않느냐.]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긴 하지. 사람이 아니라 골렘이니 천만다행이었다.
여기서 계속 시간이 끌려버리면 다행이라고 할 수 없게 되겠지만.
지이잉-!
무언가를 모으는 듯한 불길한 소리.
녀석이 내뻗은 손에 밝은 빛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즉시 나도 마법을 사용해 상대의 공격에 대처할 준비를 했다.
머리에 쓴 모자를 들어 올리자 무려 2개로 복사되었다!
이것이 바로 복사 마법? 모자 2개를 양손에 들고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곧이어 골렘의 손바닥에서 쏘아진 레이저빔.
나는 모자 2개를 나란히 든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모자의 구멍으로 쏙 빨려 들어간 레이저가 반대편 모자의 구멍을 통해 나와 그대로 골렘에게로 향했다.
펑!
“···와우.”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것이 바로 모자 마술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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