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6
수수께끼 조직 드라칸.
그들에 대한 정보는 세상에 거의 풀리지 않았다.
조직원이 얼마나 되는지 핵심 본거지가 어디인지 언제 설립됐으며 조직의 리더가 누구인지조차도.
다만 딱 한 가지 알려진 것이 있다면.
그들은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신화 혹은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드래곤.
그 환상의 존재를 실제로 만나겠다는 얼핏 들으면 터무니없으면서도 동화 같은 꿈.
그러나 드라칸을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된다.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미치광이 집단이니까.
“천사의 나팔이 사라졌다.”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
한 남성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서 들리는 여인의 새초롬한 음성.
“확실한 거야?”
“그래. 수호 골렘이 깨어났다더군.”
“그런데 못 막았다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준비해두었던 수호 골렘. 만약 나팔이 일정 거리 밖으로 벗어나면 즉시 활동을 시작해 ‘반드시’ 나팔을 회수한다.
골렘의 성능은 굳이 입 아프게 떠들 필요조차 없을 정도. 어지간한 마법사는 골렘을 쓰러트리긴커녕 생채기 하나 내는 것조차 버거울 것이다.
“골렘은 활동을 정지했다.”
“흠···.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란 건가요.”
대화에 새롭게 등장한 정중한 어투의 목소리.
“애초에 나팔을 훔쳤다는 것만으로 평범한 녀석은 아니란 뜻이겠지.”
“방금 디트리히가 현장을 살펴보고 복귀했다.”
“그 녀석 속이 꽤 뒤집히겠는걸. 그렇게 아끼던 골렘이 망가졌으니 도둑놈한테 단단히 열이 뻗쳤겠어.”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진중한 내용과는 달리 다소 가볍던 반응들.
그 속에서 회의를 주도하던 무뚝뚝한 사내의 목소리가 공간에 낮게 내리깔렸다.
“나팔이 사라진 장소엔 카드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카드? 그 요새 유명한 괴도 놈의 짓인가?”
“‘묵시록의 예언이 성취될 날이 머지않았다.’라고 적혀 있었다더군.”
“······.”
순간 회의장 전체에 무거운 침묵이 뒤덮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급변하며 마치 살얼음같이 차갑게 식어버린 온도.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던 푸른 머리의 사내 지크프리트가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그 얘기 진짜냐?”
“이런 걸로 농담을 하진 않는다.”
“하긴. 네 성격상 그럴 리가 없겠지.”
나팔이 사라졌단 얘기를 들었을 때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 표정과 반응.
그만큼 방금의 암호 한 줄이 드라칸에 갖는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리라.
“그럼 나팔을 회수한 사람은 누군데? 우리 중에는 없잖아?”
“있었으면 지금까지 숨기고 있을 리가 있겠냐고.”
“그 말은 즉···. 리더가 직접 움직였다는 건가요.”
당장은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회수한 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만약 교란의 목적으로 다른 누군가 조작한 거라면···?”
“그 누가 우리의 메시지를 알아낼 수 있겠어요.”
본인들이 속한 조직을 향한 자부심이 엄청난 건지 감히 다른 누군가 꾸며냈으리라곤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존댓말의 주인.
심지어 다른 조직원들 역시도 그런 반응에 동조하는 기색을 보였다.
“우리는 최후의 예언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현 시간부로 진행 중이던 모든 계획을 중지. 최종장의 돌입을 준비한다.”
그의 말에 베로니카는 작게 침음성을 흘리며 입술을 매만졌다.
“아쉽네. 모처럼 마음에 드는 제물이었는데.”
***
이걸로 됐나?
집에 돌아와 나팔을 잠시 가만히 노려보았다.
아마 내 예상대로라면 드라칸은 즉각 진행 중이던 모든 계획을 중단할 것이다.
즉 레이첼도 자연스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겠지.
지금 당장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내일이나 모레쯤 레이첼의 반응이 바뀌는 걸 눈여겨보는 수밖에.
문제는 이 나팔을 어떻게 보관하냐는 건데.
당연한 소리지만 만에 하나라도 드라칸에게 들키는 날엔 인생이 매우 팍팍해지고 만다. 설령 목숨은 부지하더라도 평생 드라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테니까.
직접 물어보진 않았으나 이 물건은 마녀도 취급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원래 마녀라는 족속이 다른 건 몰라도 자기 목숨 하나만큼은 기깔나게 챙기는 존재들이니.
이걸 집안에 놔두자니 불안해서 스트레스 과다로 먼저 죽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바깥에 보관할 장소가 있냐고 하면 그것도 글쎄올시다고.
“흠···.”
떠올려라.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원작 지식을 활용하겠어?
그 집요한 드라칸 놈들도 찾지 못할 만큼 완벽한 비밀 공간 어디 없나.
잠시 고민하던 도중 머릿속에 불쑥 떠오르는 공간 하나.
그런데 내가 생각해놓고서도 너무 뜬금없는 장소라 좀 긴가민가했다.
거긴 애초에 무언가를 보관하라고 있는 곳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곳보다 보안이 철저한 장소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몇 가지 무시하기 힘든 걸림돌이 있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생각할수록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한참 갈등하다 결국 나팔을 챙겨 집을 나섰다.
괜히 집에서 끙끙대지 말고 일단 가서 생각해보자고.
내가 도착한 곳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조그마한 호숫가였다.
무언가 엄청난 것이 잠들어있다기엔 너무나 평범하다 못해 소박하기까지 한 풍경.
사실 호수라는 표현보다 웅덩이란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
하지만 호수의 규모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호수’이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까.
잠시 가만히 서서 호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막상 오긴 했는데 이걸 어떻게 불러야 하지.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도끼를 빠트리면 되려나? 원작에선 본인이 먼저 주인공 앞에 모습을 드러냈었기에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감이 안 잡혔다.
[후후. 어쩔 수 없지. 내가 도와줘야겠구나.]
“오. 가능해요?”
[당연한 거 아니겠느냐.]
세상에. 항상 하렘만 외치던 악질 여신님이 처음으로 도움을 주다니.
[무슨 소리냐! 항상 도와줬잖느냐!]
“하하. 당연히 농담이죠.”
[흥. 이번 한 번만 특별히 넘어 가주마.]
한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 까마귀의 눈에서 검푸른 빛이 호숫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와. 이런 기술을 왜 여태 안 쓰셨어요?”
[이건 전투에 쓰는 용도가 아니니까.]
“그러면요?”
[호출용이지. 내 밑으로 서열 낮은 놈들은 다 집합하라는 느낌이다.]
“···그건 음.”
뭔가 하고 싶은 얘기는 많았으나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어쨌든 나를 도와주려고 하시는 거잖아?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반응은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호수의 중앙에서 부글거리는 거품들이 올라오더니 이내 한 여인이 물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누가 이 몸을 불렀느냐?”
아름다운 외모와 신비로운 분위기.
쉽게 짐작할 수 있듯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존재였다.
호수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정령.
아서 왕의 전설에서 엑스칼리버를 건네주는 역할로 많이 알려져 있다.
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굳이 구태여 설명하지도 않고서 지팡이만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음? 네놈은 누군데 이 몸을 불러놓고 입도 벙긋거리지 않는 것이냐. 참으로 무엄하도다.”
말투부터 느껴지는 오만함.
얘는 자기를 부른 존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건가?
[오랜만이구나. 못 본 사이에 많이도 컸지 않느냐.]
“···이 목소리는?”
[설마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이냐? 조금 실망이구나.]
“여 여 여신님이신가요···?”
너무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정령 아가씨.
뭐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 여신님이 대단한 존재였던 건가?
원작에서 등장 한번 없어서 그냥 널리고 널린 하급신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그래. 비비안. 내가 없는 동안에 잘 지냈느냐?]
“잠들어 계신 줄 알았는데 언제 깨어나셨대요···. 하하. 당연히 잘 지냈죠···. 아니 여신님이 안 계셔서 잘 못 지냈달까···.”
당황하고 있다. 엄청나게 당황하면서 저자세로 굽히고 있어.
조금만 있으면 아예 그랜절까지 할 기세다.
그나저나 이름이 비비안이었구나. 원작에서 딱히 이름까지 나오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두 사람은 생각보다 친한 사이인 건가? 아니면 일방적으로 친한 걸지도 모르겠다.
당장 봐라.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지 않은가.
혹시 호수의 정령이라 물이 많은 편인 걸까.
그녀는 내 눈치를 슬쩍 보다가 최대한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런데···. 옆의 인간과는 무슨 사이이신지···.”
[내 아이다.]
“네!? 그 그런···! 세상에!”
뭔데. 왜 그렇게 놀라는 건데?
설마 내 아이라는 소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지?
의문이 깊어져 가던 도중 비비안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내 시선을 받고 움찔 놀란 그녀는 어쩔 줄 모른 채 우물쭈물하다 작게 손을 흔들었다.
“아 안녕···?”
아까랑 갭이 너무 심하잖아.
방금까지 그 오만하던 말투는 어디 간 거냐고.
“하하. 이렇게 깨어나신 모습을 보니 너무 반갑고 제가 다 눈물이 나네요! 그러면 인사도 끝났으니 저는 얼른 다시 돌아가 볼게요! 밑에서 해야 할 업무가 워낙 많은지라···!”
[잠깐. 어딜 도망가려는 거냐.]
“···도 도망이라뇨! 저는 여신님이랑 온종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인걸요!”
[그거 잘 됐구나. 마침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이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호수의 여인.
괜히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다 안쓰러울 정도다.
“부탁···. 여신님의 부탁이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어떤 부탁인가요···?”
[그건 내 아이가 설명해줄 거다.]
갑자기 내게로 돌아온 화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용건을 설명했다.
“방금 할 일이 많아서 얼른 밑에 가야 한다고 하셨죠?”
“응···? 그렇긴 한데···.”
“그 밑이라는 곳. 저희도 좀 데려가 주실 수 있나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데려가주실수 있나용? (부탁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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