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7
내 부탁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호수의 여인.
“···밑으로 데려가달라고?”
“네.”
“왜? 아니 애초에 인간이 밑의 존재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아까 본인이 직접 밑에서 할 일이 많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
생각보다 멍청한 면이 있네.
아니면 너무 당황해서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는 건가?
그녀는 한참을 혼자 끙끙대며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건 안 돼. 애초에 평범한 인간은 불가능해.”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거죠?”
“···맞아.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어떻게 알고 있냐 묻는다면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그야 전부 원작에서 봤던 거니까 말이다.
잠깐만. 가만 생각해 보니까 그냥 여신님한테 축복을 받으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지팡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자 여신님이 곧바로 대답했다.
[안 된다. 아직 축복을 내려줄 만큼 힘을 회복하진 못했으니 말이다.]
“음.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사실 나도 크게 기대하진 않고 그냥 슬쩍 건네본 제안에 불과했다.
내 진짜 목적을 이루려면 굳이 직접 밑에 내려갈 필요까지는 없으니 말이다.
본격적인 부탁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품에서 나팔을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히익!”
“어라. 이게 뭔지 아시나요?”
“모를 리가 없잖아! 그게 왜 여기 있는 거야!?”
뭔가 얘기를 나눌수록 처음의 이미지가 깨지는 느낌인데.
뭐 지금 쪽이 오히려 인간다워서 더 좋을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내 부탁은 매우 쉽고 간단했다.
“혹시 이것 좀 맡아주실 수 있나요?”
“절대 안 돼!!”
[비비안. 아직 얘기도 안 끝났는데 너무 윽박지르는 거 아니냐.]
“그 그건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잖아요! 여신님도 솔직히 인정하시죠···?”
[흠.]
설마 매사에 태평한 여신님마저 굳이 부정하지 않고 말을 아낄 줄이야.
하긴 이 나팔이 나중에 불러올 사건의 스케일을 생각하면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요한의 묵시록이라는 유명한 예언을 불러일으키는 열쇠다.
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아마겟돈이란 단어는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거의 세계 멸망 급의 스케일.
제아무리 호수의 정령이라 할지라도 이런 불길한 물건과는 엮이고 싶지 않을 수밖에 없겠지.
잠시 뜸을 들이던 여신님이 곧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어차피 나팔 하나만 보관하는 거야 문제 될 것 없지 않으냐? 다른 열쇠랑 엮일 리도 없을 테고.]
“저도 아까 전까진 천사의 나팔과 엮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라. 네가 나팔을 맡아주는 동안에는 아마겟돈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감히 누가 네 허락도 없이 치유의 낙원에 발을 들이겠느냐?]
치유의 낙원. 이름만 들어도 범상치 않은 느낌을 풍기는 장소.
그곳이 바로 호수 아래에서 비비안과 정령들이 머무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여신님의 말대로 치유의 낙원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애초에 땅의 주인인 호수의 여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입구를 발견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며 그걸로 끝이 아니라 신의 축복이 있어야지만 자격이 주어진다.
그야말로 무언가를 숨기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설령 드라칸이라고 해도 이건 절대 못 찾는다. 오히려 드라칸이기에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그 미치광이 녀석들에게 축복을 걸어줄 신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비비안은 전혀 안심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만약 터지면 전부 제 책임이 되는 거라고요···!”
사실 그녀의 반응이 너무나 정상적이며 당연했다.
절대 터지지 않는 소형 핵폭탄이 있다고 해도 그걸 아무렇지 않게 집에 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중요한 건 그 핵폭탄이 터지면 주변의 모든 존재가 사라진다는 거다.
“애초에 그 나팔은 대체 어디서 들고 온 거예요!?”
[아 깜빡하고 말을 안 했구나. 이걸 이용해 아마겟돈을 일으키려는 녀석들이 있다.]
“네?!”
이제 비비안은 놀라다 못해 거의 쓰러질 기세였다.
뭔가 가만히 있던 사람을 데려다가 괴롭히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지네.
그런데 이게 사실인 걸 어쩌겠어.
우리도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 전부 세상을 지키기 위해 하는 행동인 것을.
“드라칸이라는 조직이에요.”
“드라칸···?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아마 그렇겠지. 녀석들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진 줄곧 음지에서 숨어 조용히 지내왔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드라칸이 나팔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숨기려 한다는 거지?”
“정확해요.”
“일단 알았어. 사실 보관해주는 것 자체야 크게 상관은 없지만.”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확실히 초월적인 존재라는 건지 그냥 보는 것뿐인데도 시선에 담긴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네. 그럼요.”
“그럼 확실한 조건을 제시해. 네가 되찾으러 올 거라는 보증을 내놔.”
적어도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실제로 격의 차이를 이용해 계속 은근히 압박하던 여신님도 지금은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드라칸을 쓰러트리면 다시 찾으러 올게요.”
“정말이야?”
“네. 여신님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요.”
[···음? 잠시만.]
여신님이 뭐라 할 틈새도 없이 비비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을 체결했다.
“좋아. 그 정도 보증이라면 믿어줄 만하네. 그러면 네가 드라칸이란 조직을 쓰러트릴 때까지 천사의 나팔은 내가 맡아주는 걸로.”
“감사합니다.”
[내 말 무시하지 마라! 크로? 누구 마음대로 내 명예를 거는 거냐!?]
“여신님. 항상 고마워요.”
[으윽···.]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비비안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그 여신님이 인간 꼬마에게 저런 모습을···.”
어이. 아무리 그래도 꼬마가 뭐냐.
이 몸의 나이가 아직 성인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꼬마라 부를 것까지는 없잖아.
“흠흠!”
헛기침하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환기한 비비안이 다시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혹시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겠지. 가령 네가 드라칸보다 약해서 패배한다던가.”
“···너무 뼈 때리는 말이네요.”
“그러니까 제한 시간을 걸어놔야겠어.”
윽. 이건 좀 골치 아파지는데.
사실 드라칸은 어차피 원작이 진행되며 주인공 일행에게 자연스레 무너지기 때문에 그때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문제는 그게 원작의 상당히 후반부에 접어들 때쯤이라는 것. 제한 시간이 걸려버리면 내가 직접 드라칸을 쓰러트려야 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
“음. 한 1000년쯤이면 되나?”
“···네?”
“너무 짧나? 그러면 2000년?”
[깔끔하게 1000년이면 충분할 것 같구나.]
“알겠어요. 그러면 진짜 딱 1000년만 맡아주는 거니까! 그 전에 드라칸인지 뭔지 쓰러트리고 오도록 해. 알겠니?”
그제야 나는 초월적 존재들의 시간 개념이 한낱 인간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호숫가에서 엑스칼리버를 줬다는 것도 무려 수천 년 전의 이야기.
고작해야 100년밖에 못 살고 죽는 인간보다 몇십 배 몇백 배 오래 사는 그녀에게 1000년이란 세월은 그냥 조금 긴 시간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선 방긋 웃으며 나팔을 건넸다.
만약 원작이 뒤틀어져서 드라칸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는 없겠네.
어차피 나팔이 호수 바깥으로 다시 나올 때쯤의 나는 백골이 되어 있을 테니까.
그때 누가 알아서 해주겠지.
우리 자랑스러운 후손들을 믿자.
그렇게 여신님의 훌륭한 중재 아래 극적으로 타협된 거래.
악의 조직인 드라칸이 사라지거나 1000년이 흐르기 전까지 나팔은 호수 아래서 정령이 보관할 것이다.
아주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어느덧 계획도 중간 지점을 넘어 끝부분에 이르렀다.
참 오래도 걸렸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이제 정말로 끝이 보이는 것이다.
그 덕에 모처럼 집에 돌아가서는 아무 걱정거리 없이 푹 꿀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예상했던 대로 계획은 잘 진행됐다.
“하아···.”
“왜 자꾸 한숨을 푹푹 쉬어?”
“남이사. 내가 한숨을 쉬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시선도 건네지 않은 채 틱틱 말을 쏟아내는 레이첼.
그런데 어째선지 평소와 달리 훨씬 부드러워진 어조였다.
그러고 보면 어제 헤어질 때도 저런 모습이었지.
더 정확히는 헨리의 울음으로 암시에서 벗어날 때부터였나.
평소 같았으면 이쯤에서 대화가 끊겼겠지만 오늘은 내가 일부러 적극적으로 말을 붙여 얘기를 이어나갔다.
“뭔데. 무슨 고민 있으면 말해봐. 내가 들어줄게.”
“네가···? 흥. 웃기시네.”
보아라. 역시 반응이 원래보다 훨씬 유하다.
심지어 맨날 쓰던 찐따라는 호칭조차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건 아마도···.
드라칸이 계획을 중단한 탓이 분명하다.
갑자기 알바에서 잘린 격이니 충격이 클 수밖에. 게다가 암시에서 벗어난 영향도 있을 테고.
그때 옆쪽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
이쪽으로 다가오던 율리아가 다른 애한테 붙잡혀 잡담을 떠들고 있는 모습.
쟤는 여전히 인기가 많구나. 심지어 요새는 우리랑만 어울려 노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보면 두루두루 다 친하단 말이지.
내가 잠시 아무 생각 없이 율리아를 바라보고 있자.
갑자기 옆에서 레이첼이 말을 걸었다.
“야.”
“응?”
“거기 말고 이쪽 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녀석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고민 들어준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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