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9
정말 위험했다.
설마 얘기를 꺼낸 당일 저녁에 바로 찾아올 줄이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리 준비해놨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완전히 망할 뻔했잖아.
다소 급하게 준비한 뤼팽 재단 사무실.
좁은 단칸방에 있는 거라곤 테이블과 의자가 전부. 심지어 명패도 아직 올려두지 않아 테이블 위조차 매우 썰렁했다.
아무래도 레이첼 역시 생각보다 허접한 풍경에 꽤 실망한 듯했지만 그래도 얌전히 있는 걸 보니 꽤 절실하긴 한가 보다.
일단 자연스레 소개를 끝낸 뒤 대화를 주도해나갔다.
“그래서 아가씨께선 무슨 일로 친히 이곳까지 방문하신 건가요?”
“아 그게. 장학 재단도 한다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스스로 말하기는 좀 낯부끄러운지 머뭇거리며 얘기를 쉽게 꺼내지 못하는 레이첼.
“장학금 신청을 하고 싶으시단 거군요.”
“···네. 그런 셈이죠.”
“흠. 좋습니다. 그러면 우선 여기 서류를 작성해주시겠습니까?”
미리 세팅해둔 신청서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꽤 본격적인 절차에 레이첼 역시 나름대로 사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 물론 여전히 경계심을 완전히 푼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서류에는 최소한의 기본 인적 사항 등을 요구했다.
이를테면 이름 나이 주소 학교 등등. 흔히 신청서를 떠올리면 따라 나오는 기본 요소들 말이다.
사실 이것도 전부 체면치레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어차피 재단은 나 혼자 운영하고 있으며 딱히 심사를 거치지도 않은 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후원을 해주기로 결심한 상태니까.
“다 썼어요.”
“좋습니다.”
굳이 서류를 눈앞에서 읽지는 않았다. 그러면 괜히 부담스럽잖아.
“이 서류의 내용을 토대로 저희 재단 운영 측에서 학생분의 자격을 심사할 겁니다.”
“···혹시 얼마나 걸리나요?”
“오래는 걸리지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심사가 마치는 대로 저희가 직접 댁에 방문해 결과를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내 제안에 레이첼은 살짝 움찔하면서 당황한 티를 역력히 드러냈다.
“그 그냥 제가 여기 오면 되지 않나요?”
“심사 기준 중에는 신청한 학생의 가족 또한 포함됩니다.”
“아···.”
즉시 표정이 어두워지는 그녀.
저렇게 심각하게 반응할 일인가?
아무튼 이걸 핑계 삼아서 그녀의 언니가 어떤 상태인지도 제대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수정구슬로만 봤을 땐 딱히 최면에 걸린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으니까.
레이첼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그러면 혹시···. 집에 찾아오셔서 바로 심사 결과를 알려주시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겠죠. 너무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가 없나 확인하는 수준에 그칠 테니까요.”
이미 결과는 정해진 지 오래지만 그 사실을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 서로 답답할 따름이다. 너무 마음고생 안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일단 오늘은 여기서 더 할 것도 딱히 없었다.
“저희 재단 장학을 신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네. 잘 부탁드립니다.”
뭔가 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눈치였으나 그녀는 결국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만을 남긴 채 터덜터덜 사무실을 떠났다.
***
“으으···. 역시 떨어졌나?”
레이첼은 소파에 앉아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리를 마구 떨어댔다.
장학금을 신청한 지 아직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몇십 년은 늙은 듯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
처음엔 나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부정적인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뒤덮게 되었다.
사실 냉정하게 따졌을 때 나쁘게 볼 여지는 매우 많았다.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나 매우 좋지 않은 성적.
선천적으로 꽤 뛰어난 마력 컨트롤 실력을 갖췄기에 실기는 상당히 괜찮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이 자리에 앉아 공부하는 것을 죽어라 싫어한 탓에 이론적인 쪽에선 최하위 수준에 가까웠다.
보통 실전은 졸업생에 가까워질수록 비중이 커진다. 반대로 말하자면 고등부의 저학년생인 그녀에겐 아직 실전보다 이론이 더 중요하단 뜻이었다.
물론 성적뿐만 아니라 다른 사소한 것들까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쯤 되면 이미 객관적인 분석이 아니라 스스로 망할 것 같다고 저주를 거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부정적인 생각이란 것이 한번 시작하면 끊기가 매우 어려운 것을.
레이첼은 한숨을 내쉬며 옆에 앉은 언니를 슬쩍 바라보았다.
“언니. 뭐해?”
“뜨개질.”
언니인 레아는 뜨개질에 매우 집중하며 포부를 당당히 밝혔다.
“이걸 잔뜩 팔면 메이드로 일할 때보다 더 많이 벌 수 있어!”
“···그걸 팔겠다고?”
슬쩍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무언가를 잠시 바라본 레이첼.
마치 우중충한 비가 내린 뒤에 먹구름을 몰아내고 밝은 햇살을 조명 삼아 화사하게 떠오른 무지개 같았다.
형형색색에다 마감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매우 너저분한 털 뭉치.
대체 이게 목도리인지 스웨터인지 형태조차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
“1파운드는 받을 수 있을까?”
“너무해!”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것조차 힘들어 보이는데.
과장 보태 차라리 돈을 주고 팔아야 할 수준이다.
그런 언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만약 장학금 심사에서 떨어진다면 정말로 저 무지개 털 뭉치를 팔면서 거리를 전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똑똑.
텀을 두고 천천히 집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
지금 자신들의 집을 찾아올 손님은 사실상 한 명밖에 없었다.
레이첼은 벌떡 일어나 헛기침 뒤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외쳤다.
“지 지 지금 나가요!!”
매우 부자연스러운 대답. 심지어 말을 더듬은 데다 목소리 음정마저 엇나가버렸다.
옆에 있던 레아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지금 오신 거야!? 벌써!? 내일이나 모레 올 거라며!”
“나도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다고···! 으으 몰라! 그냥 열어!”
“히익! 자 잠깐만! 나 옷 갈아입어야 하지 않을까···?”
옆에서 자꾸 정신 사납게 쫑알대자 레이첼은 평소처럼 빽 소리를 질렀다.
“아 좀! 무슨 맞선 보는 것도 아니고 옷을 왜 신경 써!”
“그래도···. 조금이라도 잘 보여야 하잖아.”
“됐어. 몰라! 그냥 될 대로 되라지.”
그간 꾹 참아왔던 다혈질 성격을 완전히 분출시키며 성큼성큼 문을 향해 다가가는 소녀.
하지만 막상 현관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걸음걸이엔 자신감이 사라지고 망설임과 떨림만이 가득해져 갔다.
‘진정해. 레이첼···!’
그래. 막상 문을 열어보니까 그냥 집배원일지도 모르잖아?
딱히 편지가 올만 한 곳은 없지만 아카데미에서 가정 통신문을 보낸 걸 수도 있지. 여태껏 이런 방식으로 받은 적은 한 번도 없긴 해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간신히 진정을 되찾은 레이첼은 문을 살짝 열어 빼꼼 바깥의 손님을 확인했다.
‘진짜 왔잖아!’
어제 봤던 모습 그대로 검은 정장을 빼입은 중년의 신사가 문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슬쩍 열린 문틈으로 정확히 눈이 마주쳐버렸다.
약간의 어색한 정적이 이어지다 간신히 레이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실례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안에 들어가서 얘기를 나눠도 괜찮을까요?”
“네. 들어오세요.”
그래.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하루라도 빠르게 심사에 붙어서 장학금을 받으면 좋은 거잖아? 당장 내일 저녁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조차 고민해야 했던 걸 떠올리면 오히려 다행인 상황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심사에서 합격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그리고 그 심사에서 떨어질 것 같다는 강한 불길함이 자꾸 뇌리를 스친다는 걸 제외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르센 뤼팽이라고 했던가.
재단의 이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그는 집안 이곳저곳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농담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 중에서 가장 긴장된다.
“일단 자리에 앉아서 얘기하시죠.”
“아 네. 여기 앉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거실 소파로 안내한 레이첼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불과 방금까지만 해도 여기 같이 앉아있던 그녀의 언니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었다.
곧 레아는 부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 안녕하세욧! 이거 드시면서 얘기 나누세욧···!”
다과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그녀.
그런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아니 저게 어딜 봐서 숙련된 메이드란 말인가?
뭔가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점점 커지던 와중 결국 사건은 발생하고 말았다.
“으갸앗!!”
스텝이 꼬여 자신의 발에 걸려 넘어진 레아가 그대로 쟁반째 엎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그러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던 뜨거운 차가 뤼팽의 가슴팍에 안착해버렸다.
철썩!
“······.”
끔찍할 만큼 무거운 침묵이 집안을 뒤덮었다.
레이첼은 순간 현기증과 함께 눈앞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자신에게 곧 닥칠 미래라고 해석한다면 너무 억지인 걸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히 가슴에 뜨거운 차를 쏟다니..!
이걸 어떻게 보상받아야 좋을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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