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0
이 싸늘한 분위기를 어찌하면 좋을까.
뤼팽은 하얀 와이셔츠에 선명하게 새겨진 얼룩 자국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현 사태의 원흉인 레아는 똥그래진 눈동자를 몇 번 깜빡거리니 뒤늦게 반응을 터트렸다.
“아 아 죄 죄송합니닷···!”
허둥지둥 어쩔 줄 모르며 발을 동동 구르다 허겁지겁 손수건을 챙겨와 뤼팽의 가슴팍을 문지르는 레아.
허락도 받지 않고 외간 남자의 가슴을 멋대로 터치하다니.
상황을 지켜보던 레이첼은 절망하던 것도 잊고 깜짝 놀라 외치고 말았다.
“언니! 뭐하는 거야!?”
“응? ···아 아니야! 나는 그냥···. 뜨거우실 테니까 닦아 드리려고···.”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깨달은 레아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손을 휘저으며 격렬히 부정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인 상황. 그 속에서도 마치 태풍의 눈이 잠잠하듯 피해의 당사자인 뤼팽은 입도 벙긋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망했다! 무조건 망했어···!’
레이첼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 뒤덮어버렸다.
어제 직접 사무실로 찾아갔을 때 분명 그는 집에 직접 들리는 건 마지막 심사나 다름없다고 말했었다.
즉 다른 심사는 전부 합격해놓고 마지막 관문에서 처절하게 떨어지고 만 것이다. 아직 결과를 듣지도 않았으나 벌써 그녀는 자신이 떨어졌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저는 괜찮습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시죠.”
앞에서 들려온 평온한 목소리에 레이첼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뤼팽의 표정은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덤덤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괜찮은 건가?’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었다. 입장을 바꿔서 자신이 만약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면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몸을 돌려 집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아니면 더 나아가서 설마 이렇게 반겨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면서 상대가 무릎을 꿇고 싹싹 빌 때까지 잔뜩 골려준다던가.
어쩌면 저 무엇을 뜻하는 건지 읽기 힘든 무표정 속에는 엄청난 분노가 내재되어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레이첼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반면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그녀의 언니는 금새 밝은 표정으로 다시 돌아와 헤실헤실 웃으며 속 편하게 얘기했다.
“괜찮으시다니까 정말 다행이네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다과 다시 가져올 테니까!!”
세상에. 그 짓을 또 하겠다고?
그러다 또 똑같이 쏟으려고? 이번엔 가슴이 아니라 어디 뭐 엉덩이에라도 쏟을 생각인가?
레이첼의 표정에 실금이 가며 제 언니를 타박하려고 한 순간.
그보다 앞서서 뤼팽이 입을 열어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아니요. 차는 괜찮으니 바로 얘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소녀는 깨달았다.
심사는 이미 탈락 확정이라는 것을.
의외로 막 엄청나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현실을 완전히 수긍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무념무상의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말하자면 완벽히 체념하게 된 것이다.
“우선 심사 결과를 말씀드리기에 앞서 간단한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만.”
“어 질문이요?”
“네. 대답에 따라 심사의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대답해주시길.”
어떻게 듣냐에 따라 무시무시한 경고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나 지금의 레이첼은 오히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라고 인식했다.
‘여기서 대답만 잘하면 결과를 뒤집을 수 있을지 몰라!’
고민은 짧았다.
“네! 뭐든 물어봐 주세요!”
“좋습니다. 그러면 질문을 드리죠.”
날아온 질문은 전혀 뜻밖의 내용이었다.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질문의 내용을 천천히 곱씹은 뒤에야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곧바로 답이 튀어나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말문이 턱 막혀서 꽉 다물린 입술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야 나한테 좋은 거지?
아니 애초에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가만 생각해보니 이 질문과 비슷한 주제를 이전에 잡담으로 떠든 기억이 떠올랐다.
다름 아닌 아카데미에서 조별 과제를 준비하며 팀원들과 나눈 대화였었다.
괴도 레이븐은 남의 재산을 훔쳐서 고아원과 교회에 기부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 사람. 괴도 레이븐은 과연 잘못되었는가?
그때 자신은 분명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었다.
그놈은 범죄를 저지른 쓰레기 도둑놈일 뿐이라고. 율리아의 의견과는 반대이며 샤론의 의견과는 일치했던 걸로 기억한다.
다만 그녀는 율리아나 샤론처럼 논리적인 근거가 뒷받침된 주장이 아니었다.
그냥 특별히 고민해보지도 않고 반사적으로 툭 튀어나온 대답에 불과했다.
어쩌면 라파노의 저택에서 언니가 해고된 것을 레이븐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비슷한 질문을 받은 자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레이첼은 그가 얘기했던 대로 충분히 고민한 다음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그런 상황이라면 소중한 사람을 돕기 위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 말은 즉 잘못이 아니라는 거군요.”
“그게 잘못이라고 해도 할 거예요.”
고작 몇 주 만에 그녀의 생각은 달라졌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레아가 실직하며 힘들어하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뿐 아니라 꽤 그럴듯한 율리아의 주장이나 직접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 것 역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크로 모리스.
자신의 옆자리 짝인 소년을 떠올리며 레이첼은 작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쩌면 생각을 변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은 그 아이일지도 모른다.
처음에 뜬금없이 저녁을 사주겠다고 했을 땐 당황했다. 혹시 이 녀석이 나를 좋아하는 건가 괜히 오해도 하고 혼자 설레발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녀석의 행동은 지금 생각해보면 순수한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윽고 자신의 사정이 어렵다는 걸 파악한 소년은 준비해둔 명함을 건네주며 레이첼을 도와주었다.
본인은 그냥 우연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쯤은 쉽게 이해하고 있다.
아마도 단둘이 저녁을 먹자며 데려갔을 때부터 대략 짐작했던 거겠지.
아직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심사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커 보였다.
그럼에도 소년이 건네준 호의는 너무나 따스했다.
며칠이나마 그 온기에 기대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었을 만큼.
그렇기에 레이첼도 그런 호의를 다른 누군가에게 베풀어보고 싶었다.
정확히는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한테 말이다.
어쩌면.
자신을 도와준 그 소년에게 보답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첼이 미소를 지은 찰나.
“레이첼 양. 합격입니다.”
믿을 수 없는 얘기가 들려왔다.
***
합격인 게 당연하지.
애초에 그러려고 처음부터 전부 준비한 연극에 불과하니까.
굳이 의미심장한 척 질문을 던진 것도 사실 그냥 긴장감을 더해주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너무 쉽게 합격 발표해버리면 심심하잖아? 괜히 그랬다가 의심이라도 하면 큰일이고.
질문의 내용도 레이첼이 너무 괴도 레이븐을 싫어하길래 괜히 심술 나서 던져본 질문이었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무슨 이유건 범죄는 잘못됐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일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레이첼은 만약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범죄를 저지를 것이란 파격적인 대답을 선보였다.
‘너무 나간 거 아니야···?’
아니면 설마 괴도가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힌 건가?
드디어 내 경쟁자가 생기는 건가?
뭐 어쨌든 대답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결과를 알려주었다.
“레이첼 양. 합격입니다.”
내 말을 듣고 이쪽을 멍하니 쳐다보는 레이첼.
부담스러운 눈길에 애써 시선을 피하고 싶은 걸 꾹 참고 반응을 기다렸다.
생각보다 반응이 시시한데?
너무 당연한 결과라 딱히 놀랍지도 않은가?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실제로 나도 처음부터 성적보단 경제 상황을 더 보겠다고 말한데다 집에 찾아오는 것 자체가 심사가 마무리된 상태에서 마지막 테스트 겸 인사차 들리는 거라고 얘기해놨으니까.
뚝.
“흐윽···.”
‘···어라?’
그런데 왜 갑자기 레이첼이 눈물을 흘리는 걸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나?
레이첼이 울고 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레이첼이?
어제부터 평소와 다른 모습에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우는 모습까지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얼른 위로해주지 않고 뭐하는 거냐?]
‘아니 제가 뭘 했다고 위로를 해줘야 해요?’
[쯧쯧. 아직 한참 멀었구나. 참으로 한심하도다.]
여신님의 핀잔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 일단 손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기쁜 일인데 그렇게 울어서야 되겠습니까?”
“흐윽···. 우는 거 아니거든요···.”
누가 봐도 울고 있거든?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흠. 그런 걸로 해두죠.”
내가 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레이첼. 다행히 살짝 울컥한 정도일 뿐 진짜 오열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 갑자기 또 부엌에서 나타난 그녀의 언니.
그런데 그녀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잠깐만. 타임. 타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직 몸이 골골대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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