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1
레이첼이 합격 통보를 받은 순간.
부엌에서 얘기를 끝나길 기다리던 레아는 안절부절못하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서성였다.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함을 잔뜩 드러내는 그녀.
‘괜히 나 때문에 탈락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뒤늦게 떠올라버린 것이다. 사실 지금 와서 걱정해봤자 너무 늦은 타이밍이었으나 레아는 혹시 자신이 동생의 발목을 잡은 건 아닐지 불안한 걱정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그때 부엌의 벽 건너 거실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뿐인 소중한 동생의 훌쩍이는 울음소리에 레아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물들고 말았다.
‘안 돼···!!’
이성적으로 무언가를 판단할 여유조차 없이 뇌리엔 오로지 안 된다는 단말마만이 가득 차버린 상황. 결국 그녀는 본능에 몸을 내맡겨 그대로 거실로 뛰쳐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안 돼욧!!”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무작정 달려 나간 결과는 매우 처참했다.
우당탕 요란스러운 효과음과 함께 앞으로 넘어지는 레아. 분명 아까 직전에도 봤던 장면이 마치 데자뷔처럼 또다시 펼쳐지자 레이첼은 물론 뤼팽마저도 놀란 눈으로 그녀의 슬랩스틱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결과는 아까처럼 참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재빠른 반응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난 상대가 넘어지던 그녀를 붙잡아준 덕분이었다.
“이런.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낯선 이성과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지자 패닉에 빠져버린 레아. 심지어 단순히 가까운 것을 넘어 외간 남자의 품에 안겨든 상황이라니. 그녀가 버티기엔 너무나 자극적인 상황이었다.
눈이 빙글빙글 돌던 것도 잠시 자신의 목적을 용케 상기해낸 여인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로 사내의 가슴팍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앙탈을 부렸다.
“당 당장 저희 동생을 합격시켜 주세욨!! 아악!”
설상가상 마지막에 혀까지 깨물며 새된 비명까지 내질러주었다.
감정이 북받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레이첼의 눈가는 어느샌가 사하라 사막처럼 바싹 메말라진 지 오래였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엄동설한처럼 오싹하면서 싸늘한 눈빛 응시. 제 언니를 쳐다보는 거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천만다행히도 뤼팽은 이런 기막힌 상황에도 딱히 불쾌해하는 기색을 드러내진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는 작은 미소를 띤 채로 품에 안겨있는 여인의 오해를 친절히 바로잡아주기까지 하였다.
“안타깝게도 그 부탁은 들어주기 힘들겠군요.”
“···힝. 레이첼. 이제 어떡해···?”
“동생분은 이미 합격하셨거든요.”
레이첼은 제 언니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가린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네? 하 합격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레이첼 스칼렛 양은 저희 뤼팽 재단의 장학생으로 지원을 받게 될 겁니다.”
아직 어안이 벙벙한 상태인 그녀에게 마치 쐐기를 박듯이 끝으로 구체적인 액수까지 알려주자.
“히 히에엑···!”
레아는 그대로 졸도하고 말았다.
“어라.”
뤼팽은 자신의 품 안에서 고요히 잠든 여인을 난감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레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정신을 차렸다.
물론 일어난 뒤에도 한동안 지원금액을 믿지 못했으나 몇 번이나 반복해 사실이라고 얘기해주자 그제야 이게 꿈이나 몰래카메라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참고로 동생인 레이첼 역시 정도의 차이일 뿐 반응 자체는 상당히 비슷했다.
장학금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에 너무 몰두하느라 두 자매 모두 정확한 액수가 얼마인지엔 차마 신경을 쓰지 못했던 탓이다.
“정말로 이 금액이 맞는 건가요···? 다른 장학생도 다 이렇게 받는다고요?”
“오해하진 마시길. 레이첼 양은 저희 재단의 첫 장학생이니만큼 특혜를 받는 거니까요. 아직 뤼팽 재단은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신생 단체거든요.”
그렇다고 하니 일단 고개는 끄덕였으나 자신에게 이런 엄청난 행운이 돌아왔단 사실은 여전히 현실감이 꽤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더더욱 이런 기회를 선물해준 소년에 대한 마음도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장학금은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혹시 문의할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 제 사무실로 찾아오시면 됩니다. 그럼 저는 슬슬 가보도록 하죠.”
얘기가 마무리되며 뤼팽은 굳이 뜸 들이지 않고 신속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의 품에선 한참 전에 벗어났었는데도 여전히 발개진 얼굴이 돌아오질 않는 레아.
그녀는 몸을 마구 비비 꼬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계속 힐끔거리기만을 반복했다.
“아 아 안녕히 가세요···.”
“네. 푹 쉬시길.”
문밖까지 배웅을 나온 레이첼.
완전히 어두워진 밤거리를 배경 삼아 점점 멀어지는 신사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 그녀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반듯이 숙이며 큰소리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닿은 걸까.
뤼팽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레이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하다면 받은 만큼 돌려주십시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레이첼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텅 빈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마지막 얘기를 한참이나 곱씹어 되뇌었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
집으로 향하는 길.
[과유불급. 멤버가 너무 많은 건 좋지 않다.]
“뜬금없이 뭔 소리예요.”
사실 무슨 말인지 대략 짐작은 갔지만 제발 그게 아니라고 믿고 싶어서 꺼낸 말에 불과했다.
[물론 서브도 그렇게 나쁘진 않지만 말이다. 결국 메인은 정해져 있어야 하는 법이니라.]
“알겠으니까 그냥 혼자 속으로만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무릇 자매 덮···.]
“씁!”
다행히 여신님은 그 이상 입을 열지는 않으셨다.
아무리 그래도 방금 그건 진짜 선을 넘는 거지. 그냥 농담으로 듣고 넘기려 해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애초에 지금 와선 몇 번이나 말하는지 셀 수도 없는 수준이지만 나는 무조건 낭만 순애파다. 남녀의 애틋하면서도 달콤한 사랑은 일대일로 오가야 진정한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
다수가 한 명과 이어지는 불균형한 관계는 입장만 바꿔 생각해도 속이 부글거리고 눈이 뒤집힐 거면서.
[쯧쯧. 참으로 안타깝구나. 그런 걸 왜 굳이 바꿔서 생각하느냐?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승자의 특권이다.]
다른 건 몰라도 연애관만큼은 절대 여신님과 합의될 일은 없어 보인다.
아무튼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생각보다 일이 훨씬 커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무사히 레이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골머리를 썩이던 숙제 하나를 깔끔하게 해치운 기분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이냐?]
“다시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가야죠.”
생각보다 오래 쉬어버렸다. 물론 레이첼의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물건은 꾸준히 훔쳤고 능력도 성장시키긴 했지만 전부 공식적인 대외 활동이 아니었으니까.
파리에 가서 마녀의 수정구슬을 훔친 것도 대학교에서 드라칸이 찜해놓은 천사의 나팔을 훔친 것 역시 세상에는 전혀 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영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이름값이 너무 커져서 며칠 쉰다고 관심도가 뚝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막말로 오늘부로 은퇴해도 괴도 레이븐의 이름은 전설로 남아 비슷한 절도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무조건 내 이름부터 입방아에 오르겠지.
하지만 벌써 끝낼 생각은 없다. 이제야 유명해졌고 능력도 성장했는데 벌써 그만둔다는 건 미친 짓이다. 오히려 지금부터 더더욱 박차를 가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도 모자랄 판이다.
“또 오랜만에 예고장을 보낼 차례네요.”
[후후. 벌써 가슴이 설레는구나.]
“동감이에요.”
무엇보다 내 영혼의 라이벌인 탐정 나리와 또 맞붙을 생각을 하니 벌써 두근두근한다.
“이번 목표는 뭔가요?”
[마침 딱 괜찮은 곳이 하나 있단다.]
여신님의 얘기를 듣자마자 입가에 절로 호선이 그려졌다.
듣기만 해도 벌써 재밌는 그림이 머릿속에 잔뜩 그려질 정도로 아주 완벽한 목표물이었다.
“일단 사전답사부터 해볼까요?”
원래라면 막 장기 프로젝트를 끝마쳤으니 하루 정도 푹 쉬고 느긋하게 시작해도 되겠지만 그러기엔 몸이 꽤 달아올라 바로 움직이고 싶었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워커홀릭인가?
우선 먼저 변장을 지우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마치 히어로가 슈트를 입는 것처럼 복장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 괴도로서의 마음가짐도 갖춰지는 것이다.
그런 다음 런던의 밤거리를 따라 목표물이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좋아···.”
마침내 눈 앞에 펼쳐진 건물의 위용을 온몸으로 느끼며 도취감에 젖어 들었다.
이곳은 당연히 외형도 매우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적·상징적인 가치는 어떤 방법으로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없었다.
누구라도 이름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
이제 괴도는 브리튼의 왕실을 털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PIA653005248999님 후원 감사합니당…
보통 하루이틀 정도면 낫던데 이번에는 몸살이 길게 가네용..
에츙..! 다들 환절기 건강 조심하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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