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2
버킹엄 궁전.
너무나 유명해서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브리타니아의 중심.
여기를 털겠다는 건 그야말로 국가를 향한 가장 수위 높은 도발이나 다름없다. 만약 실제로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 파급력은 차마 상상할 수조차 없을 테고.
당연히 그만큼 어려울 것이다.
여태 해왔던 것처럼 예고장을 미리 보낸다면 대응은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리라. 과장 보태 브리타니아의 모든 국력을 쏟아부을 가능성도 있다.
나도 그런 사실을 알기에 너무 무모하게 만용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버킹엄 궁전을 털겠다고는 해도 본궁이 아니라 옆에 자그맣게 딸린 별궁이 목표였다. 같은 궁전으로 묶이긴 해도 거리가 은근히 떨어져 있기에 본궁에 비하면 경비가 그나마 널널한 편에 속한다.
“딱 200년만 지나면 아무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데.”
참 아쉬울 따름이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왕실의 권위가 약해지며 결국 관광 목적으로 개방될 운명인데 말이다. 물론 여기는 마법이 실존하는 세계관이니 지구와 완전히 똑같은 미래로 흘러가진 않겠지만.
[그럼 까짓거 200년만 기다렸다가 움직이면 되겠구나.]
“···저는 여신님처럼 진득하게 기다릴 수가 없다고요.”
200년을 까짓거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거야?
극복할 수 없는 태생적 종족의 차이를 여실히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어떤 루트로 목표를 훔쳐야 할지 미리 사전답사부터 해볼 생각이다. 치밀하게 잘 설계된 트릭은 아무리 철저한 경비라도 뚫을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야심한 시각임에도 궁전의 정원을 빈틈없이 돌아다니며 경계하는 근위병들.
만화 속 세계관이다 보니 저런 근위병들 하나하나가 전부 어지간한 마법사는 우습게 여길 만큼 강한 힘을 가졌을 것이다. 즉 까딱 잘못하면 곧바로 시체가 될 가능성이 상당하단 뜻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애초에 최대한 조심해서 안 들키면 그만이니까.
이 짓도 경험이 쌓이면서 점점 노하우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가장 까다로운 0순위로 꼽히는 마력 센서 역시 빈틈을 발견하게 되면서 더더욱 자신감은 상승하게 되었다.
일단 센서는 탁 트인 야외에선 그 효능이 거의 반감하는 수준에 이른다. 마력의 흐름을 파악하면 이해하기 쉬운데 쉽게 설명하자면 마법이란 현상 자체가 체내에 존재하는 마력을 공기 중의 마력이 연결되며 발생하는 비틀림에 가깝다.
따라서 그 접촉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원리인 센서는 감지해야 할 공간이 늘어날수록 제 성능을 발휘하기 힘들어진다.
또한 마력 센서 역시 마도공학의 산물 중 하나. 즉 새롭게 개발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니 절대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왕궁이라 해도 이런 탁 트인 야외 정원에서 빼곡하게 설치하는 것은 힘들다는 뜻이다.
‘좋아. 제대로 잠입에 성공했네요.’
그림자 속에 조용히 숨어들어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별궁을 향해 이동했다.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내 마술은 더더욱 강력해진다. 따라서 어느 환경이냐에 따라 변수가 많긴 하지만 푸르스름한 달빛만이 세상을 비추는 밤의 무대에서 내 마술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버킹엄 궁전은 생각 이상으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별궁 역시 하나가 아니라 용도에 따라 여러 채가 존재하는데 지금 내가 목표로 하는 별궁은 왕족 거주용이 아닌 의례용에 가까웠다.
의례. 즉 특별한 행사가 아닌 평상시엔 사용하지 않는 건물.
당연히 지금 같은 야밤에는 굳이 문을 활짝 열어놓지 않고 굳게 걸어 잠가 놓는다. 나 같은 불청객이 침입하면 안 되니까 말이지.
굳이 잠긴 문을 억지로 열거나 부수지는 않았다. 괜히 그랬다가 나중에 들키기라도 하면 상당히 곤란해지니까. 차라리 그보단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을 통해 슬쩍 잠입하는 편이 훨씬 편한 방법이었다. 가령 창문이나 지붕 같은 곳들 말이다.
주변을 잠시 살펴본 결과 위쪽에 적당한 창문 하나를 발견했다. 물론 창문 역시 단단하게 잠겨 있으나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모자를 벗어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곧 내 손을 타고 올라오는 까마귀 한 마리.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눈을 감고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꽤 기특했다.
원래 똑똑한 동물 하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이름이 까마귀 아니던가. 실제로 까마귀는 6~7살 아이의 지능과 거의 비등한 수준의 총명함을 자랑한다.
“자 저기 안쪽에 보이지?”
내 덩치로는 불가능하지만 이 녀석이라면 창문의 좁은 창살 틈도 충분히 들락거릴 수 있다. 굳이 세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눈치껏 알아들은 까마귀는 종종걸음으로 창문을 통해 별궁 내부로 들어갔다.
이제 남은 건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뿐.
잠깐의 시간이 흐르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스르륵 힘없이 열리는 정문.
누가 볼세라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어두컴컴한 별궁 내부. 그렇다고 굳이 불을 켜는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행여나 그랬다가 별궁의 불이 켜진 걸 바깥에서 누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 나니까. 어차피 어둠 속에서도 전부 볼 수 있기도 하고 말이지.
“잘했어. 까막아.”
다시 품으로 돌아온 까마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포상의 의미로 씨앗 하나를 주었다.
녀석은 그걸 맛있게 받아먹은 뒤 만족한 듯 몸을 한번 턴 다음 모자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쉽게 들어왔는데?
사실 마음만 먹으면 이대로 목표를 훔쳐버려도 아무 상관 없었다.
예고장을 안 쓰긴 했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흠···.”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예고장을 쓰느냐 아니면 그냥 안전하게 물건만 챙겨 떠나느냐.
“일단 물건부터 직접 보고 마저 생각하죠.”
[그거 괜찮구나.]
목표를 보고 트릭을 설계해본 다음 정 아니다 싶으면 그냥 챙겨서 떠나도 되니까.
사뿐사뿐 걸어가 목표가 있는 방까지 도달했다.
“찾았다.”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이번 목표는 확실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제단처럼 꾸며진 한가운데 위풍당당이 꽂혀있는 화려한 검이었다.
딱 봤을 때 바로 떠오르는 건 당연히 가장 유명한 전설 중 하나인 엑스칼리버.
전설의 근원지가 이곳 브리튼이며 얼마 전에 호수의 여인도 만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 검은 엑스칼리버가 아니다.
딱히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은 의식용 검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이 녀석이 별로 가치가 없단 뜻은 아니었다. 엑스칼리버가 지닌 이름값에 비하면 부족할 뿐 무려 여왕이 본인을 지킬 수호 기사를 뽑을 때 기사 서약에 쓰이는 검이니 보물이라 불리기엔 충분했다.
무엇보다 목적 자체가 보여주기용이다 보니 외형은 그 어떤 검보다도 아름답고 화려한 미를 갖추고 있었다. 만약 진짜 엑스칼리버가 있다 해도 생긴 것만큼은 이 녀석보다 한 수 아래이지 않을까.
바닥에 박혀있던 검을 뽑아 들고 휙휙 휘둘러봤다.
“되게 가볍네.”
여왕이 들어야 해서인지 무게는 생각보다 매우 가벼웠다. 검을 허공에 휘둘러도 딱히 손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 대신 외형이 멋지다 보니 대충 휘두르는 건데도 전부 꽤 그럴듯한 그림이 되었다.
검을 들고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일단 직접 확인한 결과 만약 예고장을 보낸다면 난도는 꽤 어려워질 것 같았다.
검이 꽂혀있는 방이 굉장히 안쪽에 있는 데다 여기로 오기 위해선 입구부터 쭉 좁은 복도를 건너와야만 하는 구조였다.
지붕이나 창문 같은 우회로도 마땅찮다 보니 상대가 마음먹고 막으려 하면 뚫고 훔치는 게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역시 그냥 지금 바로 들고 갈까? 나팔을 훔칠 때처럼 예고장이 아니라 선고장을 날리는 거지. 이 검은 괴도 레이븐이 훔쳤다는 식으로 말이다.
“흠. 이걸 어떻게 한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한동안 고민에 휩싸여 끙끙대던 와중.
“어째서 훔치지 않는 것이냐?”
나는 당연히 여신님의 목소리라 생각하고서 자연스레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기 직전 평소와 달리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비어있던 제단 위 옥좌에 당당히 앉아있는 한 여인.
시원하게 깐 이마와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금발.
마치 바다를 옮겨 담은 듯한 창창한 푸른 벽안.
순간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운 미녀였으나 목 아래에 갖춰 입은 플레이트 아머는 그녀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짐작케 해주었다.
애초에 내 감각을 속이고 뒤를 잡았다는 것부터 상당한 실력자란 뜻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가장 이상한 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자리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선 어떤 적의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거였다.
오히려 갑옷의 여인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시 내게 물었다.
“그 검. 훔치지 않는 것이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안 훔칠 거면 나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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