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7
“많지는 않지만 몇 가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어요.”
“괴도 레이븐에 관해서 말입니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상상 이상의 엄청난 수확이었다.
현재 그에 관해 밝혀진 것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인상착의나 체형 역시 믿을만한 정보라 보기엔 힘들었다. 그가 상당한 변장술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 이미 밝혀진 이후니까.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사소하다 할지라도 정보가 하나만 있다면 아예 다른 국면으로 넘어갈 기회가 된다. 그 실낱같은 빈틈을 노리고 또 노리다 보면 기적처럼 놈의 덜미를 붙잡을 가능성이라도 생기니까.
0%와 0.0001%가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레이븐에 관한 건 아닐 가능성이 커요.”
“···네?”
“아마 그날 카지노에선 공범이 있었을 거예요.”
공범. 물론 당연히 경찰 측에서도 염두에 뒀던 경우의 수이긴 했다. 그러나 무대에 올라갈 만한 사람 중에선 딱히 용의자를 추려낼 수 없었다. 모두 알리바이가 있거나 절대 괴도에 협력하지 않을 법한 사람들밖에 없었기에.
“그러면 찾아내셨다는 건 공범에 관한 정보인가요?”
“네. 정확히는 공범으로 의심되는 용의자겠죠.”
“그 정보를 불러주실 수 있습니까?”
일단 알아둔다고 나쁠 건 없다. 가젯은 곧바로 수첩을 꺼내 셜록의 말을 받아적을 준비를 마쳤다.
“성별은 남성이고 구두를 신고 있었을 거예요. 무대 뒤편과 바깥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신분을 갖췄었으며 변장을 했던 걸로 보이네요.”
확실히 지금 시점에선 다소 애매하다 싶은 정보들이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어떻게 이런 내용을 알아낼 수 있는지가 더더욱 의아했다.
“대체 붕대 조각만 보고 어떻게 그런 점들을 추측한 겁니까? 이번에도 설마 그 잘난 마법인가요?”
“추리할 때 마법은 어디까지나 보조용이에요. 어떻게 추측한 거냐는 질문에 전부 대답하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짧게 요약해드리자면.”
셜록은 무덤덤한 어조로 자신의 추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붕대 조각에서 짧은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그 당시 무대 뒤편에 들른 이들 중 짧은 머리의 여성이 없었으니 일단 성별은 남성일 것이다. 또한 머리에 붕대를 휘감은 사람도 보지 못했으니 변장을 통해 본모습을 숨겼으리라 추측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런 식으로 한동안 계속된 근거를 바탕으로 한 논리적인 추론의 향연이 이어질수록 점점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대단하네요.”
얘기를 전부 들은 가젯은 셜록의 추리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건 괴도를 도와주는 공범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겠지만요.”
“하긴 그렇네요. 한번 도와줬다는 건 언제든 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니.”
“사실 의심되는 인물이 한 명 있긴 해요.”
셜록은 잠시 주저하며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귀를 쫑긋 세운 가젯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그게 누굽니까?”
“아르센 뤼팽. 사실 근거는 딱히 없고 단지 감에 따른 거지만요.”
“흠···. 때로는 직감이 무엇보다 완벽한 근거기도 하니까요. 일단 이름을 기억해둬서 나쁠 건 없겠죠.”
애초에 워낙 특이한 이름이라 굳이 외우려 할 필요도 없이 한번만에 깊이 각인되었지만.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졌네요.”
“아 벌써 시간이···. 그러면 일단 궁전 앞으로 가보죠.”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가서 생각해봐야겠네요.”
특별한 대책 없이 우선 몸으로 부딪치기로 한 두 사람.
밤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기에 그녀들은 서둘러 궁전을 향해 이동했다.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비공개로 진행하니까요. 요란하게 하다간 사람들에게 금방 들키고 말거든요.”
집행자가 수사를 담당한 것도 그러한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본래 도시의 뒷면에서 일어나는 신비 사건 조사에 특화된 비밀 공권 집단이니 말이다.
당연하게도 궁전의 정문은 근위병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들도 오늘 밤 괴도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 평소보다 훨씬 더 빡빡하게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저길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을까?
“그냥 옷 벗을 각오하고 경찰이라 밝힐까요?”
“음···. 아니면 저희가 수사에 도움을 드릴 테니 안에 들여보내 달라고 정식으로 부탁하는 건 어떨까요?”
“그걸 누구한테 부탁합니까.”
“뭐 바뀐 담당 형사님한테 얘기하면 되지 않나요?”
가젯은 곧바로 고개를 단호하게 내저었다.
“집행자들은 평범한 경찰이 아닙니다.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쳐서 저 같은 일반 경찰은 분명 벌레 보듯 볼걸요?”
그녀가 집행자를 싫어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였다. 워낙 프라이드가 강하다 보니 일반 경찰들을 얕잡아 보고 무시하는 경우가 일쑤였으니.
“그러면 집주인한테 부탁하는 건요?”
“어··· 네?”
“집주인이 허락하면 제아무리 집행자라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거 아니에요?”
그야 그렇기야 하겠지. 누가 감히 여기 집주인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결국 집행자도 국가와 왕실을 위해 움직이는 많고 많은 집단 중 하나일 뿐인데.
가젯은 헛웃음을 흘리며 농담처럼 대답했다.
“그럼 셜록 씨가 가서 부탁 좀 하고 오세요.”
“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에?”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말뜻을 이해하려던 가젯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농담에 맞장구도 칠 줄 알고. 의외인데?’
항상 아무 감정 없이 추리만 하길래 딱딱한 목석인 줄 알았더니 설마 이렇게 한 방 얻어맞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궁전 입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셜록.
장난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냐는 생각과 동시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서서히 피어오르던 찰나.
그대로 걸음을 멈추지 않고 경비병에게 얘기를 걸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경악하고 말았다.
‘뭔데···. 이거 뭐냐고···!’
설마 자신을 속이기 위해 짜고 치는 장난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누가 한낱 경찰 나부랭이 하나를 속이겠다고 궁전 안으로 들여보내 주겠는가?
그러면 이건 뭐지? 진짜 실제 상황인 건가?
패닉에 빠진 가젯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 부호를 없애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셜록이 불경죄로 즉결 체포되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상상까지 치달은 순간.
안에 들어갔던 소녀가 마침내 다시 밖으로 걸어 나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쪽을 향해 걸어가다 셜록의 옆에 함께 따라 나오는 여인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다른 경비병인가?’
설마 자신도 같이 잡혀버리는 건가 생각하고 있을 때쯤.
그녀의 앞에 멈춰선 셜록이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허락받았어요.”
“허락을요? ···누구한테요?”
그 의문은 옆에 있던 갑옷 차림의 여인이 대신 해소해주었다.
“반갑구나. 내 이름은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펜드래곤. 편하게 빅토리아 3세라고 부르면 된다.”
“···에?”
너무나 낯익게 들리는 이름.
당연하다. 브리타니아의 국민이라면 반드시 알 수밖에 없는 이름이니까.
“고 고 공주님!?”
“흠. 그렇게 불러도 상관은 없겠군.”
***
“뭔가 이상하네요.”
[확실히 평소와는 다르구나.]
여신님도 곧바로 위화감을 곧바로 감지한 듯했다.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와 공기의 흐름.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같았다면 나를 잡기 위해 쫙 깔린 경찰들과 한번 구경하겠다며 몰려든 인파로 북적북적해야 하는데. 위에서 내려다본 궁전에는 사람이라곤 듬성듬성 배치된 근위병들 정도만 보일 뿐 지나치게 한산했다.
그나마 있는 근위병도 딱히 별궁을 철통 방어한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왕이 머무는 본궁에 괜히 불똥이 튀길까 걱정하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대체 뭐지···?’
굳이 추측해 보자면 예고장이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정도?
만약 그게 관련이 있다면 아마도 나를 체포하지 못했을 때 쏟아질 질타를 두려워해서일 텐데 그렇다면 오히려 더더욱 철저하게 방비를 세워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방심하면 안 되겠네요.’
[물론이다.]
무엇보다 이걸 뭐라 설명하긴 힘들지만 평소와는 공기의 흐름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쭈뼛쭈뼛 닭살이 돋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일단 미리 설계해놨던 루트를 이용해 조심스레 별궁 안으로 진입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별궁 안쪽에도 아무런 인력이 배치되지 않은 상태.
‘···설마 진짜로 공주님이 예고장을 숨긴 건가?’
그런 의심이 진지하게 머릿속을 헤집던 상황.
일단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목표가 있는 안쪽 방까지 조심스레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방 안에 진입한 순간 제단에 박혀있는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새하얀 코트와 펄럭이는 망토.
시원스레 올린 머리와 너저분한 턱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사내.
그 외엔 아무도 없었다. 이 공간에 서 있는 이라곤 오직 하나뿐이다.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검에만 집중하던 사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드디어 행차하셨군. 괴도 레이븐이었나.”
그 말과 함께 정확히 내가 숨어있는 위치로 고개를 돌리는 사내.
시선이 마주친 순간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저놈은 위험하다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공주와 탐정과 형사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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