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9
“제안을 받아들이면 집행자가 될 수 있다는 건가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죗값을 전부 치르고 난 뒤다. 그래도 인명 피해는 전혀 없었으니 여태껏 훔친 것들만 전부 배상한다면 내가 책임지고 변호해주지.”
아무래도 단순한 빈말 따위가 아니라 상당히 진심인 모양이다.
“그 후에는 내 밑에서 마법을 배우면 된다. 너를 집행자로 만들어주마.”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아까 전까지만 저를 죽이겠다고 하셨으면서.”
“가능성을 봤으니까. 너에겐 상당한 잠재력이 있다. 그걸 지금이라도 올바르게 쓰라는 뜻이다.”
그렇게 말하며 내게 손을 건네는 집행자 사내.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사실 처음부터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좋아요.”
“그래. 잘 선택했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눴다. 내가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자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는 상대방.
“이번 소동은 내가 상부에 잘 얘기해보마.”
“하하 감사합니다.”
“여태껏 훔친 금품은 전부 보관하고 있나?”
“물론이죠. 원래 그 정도 장물들은 쉽게 사주지도 않으니까요.”
이미 우리 사이에 적대적인 흐름은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애초에 시장에 나왔다면 진작 우리가 발견했겠지만.”
“그런데 전부 배상하면 형량은 얼마나 줄어들까요?”
“흠. 정확한 건 재판까지 가봐야 알겠지만 설령 구형이 나오더라도 1년을 넘기진 않을 거다.”
오. 생각보다 훨씬 가볍잖아?
솔직히 내가 봐도 저지른 규모로 따졌을 때 최소 몇 년은 나와야 맞는 거 같은데. 그만큼 눈앞에 있는 사내의 권력이 막강하다는 뜻이겠지.
“좋아. 그러면 이제 본명을 밝혀라.”
“아 제 본명 말이군요.”
“그래. 더는 레이븐이란 이름을 쓸 수 없을 테니까.”
너무나 당연한 흐름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이름을 알려주었다.
***
‘···이게 맞나?’
가젯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채로 옆쪽을 힐끗거렸다.
현실감이 없다. 지금도 여전히 이게 꿈은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그녀가 유독 호들갑이 심한 것도 아니며 아마 누구라도 똑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궁전에 들어가도 되냐고 궁전 안에 들어가서 공주한테 물어본다.
이 한 문장도 굉장히 이상한데 거기에 더해 심지어 공주와 동행하여 궁전을 털려 하는 도둑을 붙잡는다?
이게 뭔 헛소리냐는 반응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과연. 괴도를 잡으려 하는 탐정과 경찰이라는 건가. 대단하구나.”
“공주님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음. 일단 별궁으로 직접 가볼 생각이다.”
반면 딱딱하게 굳은 가젯과 달리 셜록은 아무렇지 않게 빅토리아 공주와 얘기를 나눴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자연스레 묻고 답하는 걸 보면 기가 찰 지경이었다.
‘아니 긴장이 하나도 안 되나?’
그리고 이런 생각 자체가 결례일지 모르겠지만 공주 역시 만만치 않게 특이했다.
애초에 공식 석상에 거의 모습을 비추지 않아 신비주의적인 이미지가 강한 공주의 실체는 예상과 상당히 달랐다. 마치 공주보다는 기사에 가까운 느낌이라 해야 할까.
일단 복장부터가 드레스가 아니라 판금 갑옷이고 말투도 상당히 딱딱한 군대식의 느낌을 짙게 풍겼다.
가젯은 결국 참다 못하고 조심스레 공주에게 질문을 건넸다.
“저···. 공주님은 왜 저희를 궁전에 들여보내 주신 건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다. 탐정과 경찰이라 소개한 일면식 하나 없는 낯선 사람을 왜 이리도 쉽게 받아들여 준단 말인가?
“얘기를 들어 보아하니 그대들이 가장 오랫동안 괴도를 추적하며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들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최고의 전문가를 최대한 활용하는 편이 합리적인 태도이지 않겠나?”
“···저희를 그렇게 쉽게 믿어주시는 겁니까?”
빅토리아 3세는 피식 웃으면서 알 수 없는 대답을 중얼거렸다.
“뭐 그런 것도 있고. 원래 쇼를 즐기는 관객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않겠느냐.”
“네?”
“아무것도 아니다.”
세 사람은 별궁을 향해 멈추지 않고 이동했다.
그러면서 셜록이 공주에게 물었다.
“지금 별궁의 방책은 어떻게 되어 있나요?”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왕실 측에서는 특별히 준비한 건 없는 걸로 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근위대는 혹여 모를 변수를 대비해 오로지 본궁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상태라고 한다. 즉 별궁에는 아무런 전력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
가젯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집행자의 방식이 원래 그렇습니다. 남의 도움은 일절 필요 없고 오로지 자신들만 있으면 된다 생각하죠. 애초에 마법사란 족속은 모두 오만하니까요.”
“형사님. 많은 마법사가 그렇다는 건 이해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에요.”
셜록의 지적에 가젯은 뒤늦게 잘못을 알아차리고 사과했다.
“아 죄송해요. 셜록 씨에게 한 말은 절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동감하니까요.”
실제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가젯은 셜록을 여타 마법사와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금이야 다사다난한 일을 함께 겪으며 꽤 그럴듯한 콤비가 되었지만 말이다.
“과연. 그대는 마법사였구나.”
“부족하나마 마력의 축복을 받았죠.”
“비록 지금은 그 가치가 조금 빛바랬다 하더라도 언제나 마법은 신비와 환상을 상징하는 동경의 대상이었지. 내 어릴 적 꿈도 사실 궁정 마법사였단다.”
공주가 궁정 마법사를 꿈꾸다니. 뭔가 아이러니한 것 같으면서도 어린 시절에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마법사들이니 그럴 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별궁에는 집행자만 있겠구나. 어떻게 됐을 것 같나? 형사여.”
“네? 무엇이 말입니까?”
“과연 괴도가 집행자에게 잡혔을 거라 예상하느냐? 아니면 유유히 목표를 훔쳐 달아났을 것 같으냐?”
공주가 던진 뜻밖의 질문에 가젯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생각보다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아마 체포됐을 확률이 높겠죠.”
“오호라. 그대들은 여태껏 아깝게 괴도를 놓쳤다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오만한 마법사는 성공했을 거라 보는 것이냐?”
집행자를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그들의 능력은 인정한다.
정확히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괴도 레이븐 역시 자신들의 포위망을 숱하게 뚫고 조금의 실마리도 남겨주지 않는 둥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과연 녀석이 집행자를 이길 수 있을까?
“어쩌면 저희가 갔을 땐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지도요.”
“흠. 그건 좋지 않은 소식이구나.”
“···네?”
궁전을 털려는 도둑을 잡는 게 좋지 않은 소식이라고?
가젯이 의아함을 드러내자 공주는 아무렇지 않게 뒷말을 덧붙였다.
“누군가 궁전에서 죽는다는 것 자체가 썩 불쾌하지 않으냐.”
“아 그런 뜻이군요.”
애써 납득하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은 위화감을 지울 수 없었다.
단순한 착각인 걸까? 왠지 아까부터 자꾸만 공주님이 괴도를 옹호하는 느낌이 드는데.
“저도 괴도가 죽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역시 그대가 뭘 좀 아는구나.”
거기다 셜록까지 가세하니 이게 괴도를 잡으러 모인 건지 아니면 추종자 모임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물론 그게 무슨 뉘앙스인지는 본인도 대충 감이 오긴 하지만.
‘음···. 확실히 집행자한테 빼앗기는 건 좀 그렇긴 하지.’
적어도 녀석을 잡는 건 자신들이길 바라고 있다.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것까진 아니잖아.
하지만 단지 바란다고만 해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마 자신들이 별궁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상황은 진작 끝나있지 않을까?
별궁의 입구까지 도달한 세 사람.
“생각보다 조용하구나.”
“이미 승패는 가려졌을 테니까요.”
그리고 결과는 거의 무조건 집행자의 승리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겠지.
아무튼 셋은 활짝 열린 문으로 별궁에 들어갔다.
그리고 괴도가 목표했던 검이 꽂혀있는 가장 안쪽 방.
그곳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가젯은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일단 내부 자체는 상당히 격렬한 전투가 있던 건지 이곳저곳 부서지고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원흉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마치 연극 무대에서 잠시 배우 두 명이 쉬는 시간을 가지는 느낌.
검에는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고 제단에 나란히 걸터앉아 단란하게 담소를 나누는 두 남자.
흰색 코트와 검은색 정장의 조합이 매우 언밸런스했다.
마치 지금 이 풍경이 너무나 이질적인 것처럼 말이다.
결국 보다 못한 가젯이 황급히 집행자의 앞으로 달려가 외쳤다.
“대 대체 뭡니까!? 지금 뭘 하는 거냐고요!”
“음? 자네는···. 아 자네가 그 가젯 형사로군. 얘기는 많이 들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이놈을 체포하지 않고 있냔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괴도의 손목에 수갑은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쏘아지는 눈빛에 괴도는 뻔뻔하게도 손을 흔들며 얄밉게 웃었다.
“오랜만.”
“뭐 뭐라고?”
가젯은 순간 자신이 이상한 건가 고민하고 말았다.
설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자신뿐인 건가?
그때 집행자가 덤덤한 어투로 충격적인 얘기를 내뱉었다.
“오늘부로 괴도 레이븐은 회개했다.”
“···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괴도는 이제 착해져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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