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2
“흠···.”
[뭔가 고민이 많아 보이는 눈치구나.]
그야 고민이 많을 수밖에.
무사히 검을 훔치긴 했으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한번 집행자가 등장한 이상 앞으로도 집행자가 나를 뒤쫓으리란 건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만약 에반이 내게 영입 제안을 하지만 않았어도 손쓸 새도 없이 무참하게 패배해 버렸을 테니까.
만약 똑같은 상황이 다음에 또 펼쳐진다면.
과연 그때는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결국 답은 하나뿐이었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설령 집행자를 상대로 이기진 못하더라도 도망칠 수는 있도록.
나는 창가로 들어오는 달빛에 왕가의 검을 비춰보았다.
“이 보석의 힘은 언제 흡수될까요?”
[한 나흘 정도는 걸리겠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흡수에 걸리는 기간이 늘어나고 있다.
즉 그만큼 힘이 많이 담겨 있다는 뜻이며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다는 거겠지.
이미 처음 괴도로 활동할 때와 비교하면 마력의 양과 컨트롤 능력은 엄청나게 성장했다.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내가 이젠 웬만한 동급생들과 비교해도 우위를 점할 정도가 되었으니.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더 가치 있는 보석을 훔쳐 능력을 성장시키고 그 성장을 바탕으로 더 뛰어난 보석을 훔친다.
그렇게 계속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누구도 막지 못하는 진정한 낭만 괴도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번 검을 흡수하기 위한 시간은 나흘.
그동안은 우선 휴식을 취하며 재정비의 시간을 가져야겠군.
하루를 마무리하며 침대에 누우니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내일 과연 특보가 나올까요?”
[흠. 평소대로라면 나오지 않겠느냐?]
“원래라면 그런데 이번에는 제 행각을 일부러 숨겼었잖아요.”
[하긴 그것도 그렇구나. 정확한 건 내일이 되어보면 알 수 있겠지.]
단순한 연극에 불과하다지만 무려 궁전 침입에 공주의 인질극까지 벌어진 사건인데 과연 이마저 숨기려고 할까?
웬만해선 공개하지 않을까 싶었으나 여신님의 말대로 확실한 건 내일 아침이 되어봐야 알 수 있을 듯싶었다.
에이. 그래도 설마 이걸 숨기겠어?
***
이걸 숨기네···.
일어나자마자 집 앞에 놓여있는 정기 구독 신문을 챙겨 보았으나 원래라면 일면에 대서특필로 적혀 있어야 할 어제의 사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면 참 대단하다.
이러다가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원래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높으신 분의 생각은 이해하기 힘든 게 정상이니까.
사실 어차피 내가 신경 쓸 부분도 아니고.
막말로 나라가 이걸로 들썩여봤자 나한테 피해 오는 거라도 있나? 차라리 이득이면 몰라도.
“···흠.”
이득. 이득이라.
어쩌면 이 상황을 잘 이용해 이득을 챙길 수도 있으려나?
당장 뚜렷한 그림이 그려지진 않았으나 한번 고민해볼 가치 정도는 있어 보였다.
우선 그보다도 학교에 가는 게 우선이다.
괜히 늦었다가 벌점을 받는 건 사양이기에.
대충 아침 끼니를 때운 뒤 교복으로 갈아입고서 아카데미에 향했다.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북적거리는 학교의 복도.
문득 전날의 기억이 떠올라 괜히 주변을 흘끗 살펴보았다.
‘휴. 다행히 오늘은 없나?’
“뭘 그리 열심히 찾냐?”
“헉! 놀라라···.”
갑자기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거는 누군가.
진 그레인저.
분명 아무런 접점도 없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자꾸 엮이는 불길한 녀석.
아무리 선역이라곤 해도 성격부터 상당히 뒤틀려 있는 놈이기에 친해져봤자 좋을 게 전혀 없었다. 문제는 딱히 엮이기 싫은데 자꾸 상대가 먼저 다가온다는 거다.
“설마 내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거든.”
“뭐 특별히 아니라고 쳐줄게.”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벌써 피곤해진다.
레이첼과 더불어 나랑 상성이 제일 안 좋은 타입인 게 틀림없다.
생긴 건 천생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겨서는.
심지어 외모로만 따졌을 땐 율리아나 샤론보다도 더 여리여리한 수준이다.
피부도 완전 뽀얗다 못해 창백하고. 흔히 말하는 병약 미소녀의 느낌이랄까.
그렇게 생긴 것과 달리 2학년생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게 언밸런스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녀석 남자라는 거다.
애초에 첫 만남도 수업 중에 남자 화장실에서 만난 거였잖아.
“할 말 더 없으면 가도 되지?”
“하? 나랑 같이 있는 게 싫다는 것처럼 들린다?”
당연한 소리를 하네. 내가 너랑 같이 있고 싶어 해야 할 이유라도 있니?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특유의 삼백안으로 나를 째려보는 그레인저.
저 눈빛 좀 보게. 이러다 그냥 확 잡아먹히겠어? 응?
“크로? 복도에 가만히 서서 뭐 하고 있어?”
그때 뒤에서 들리는 새로운 인물의 낮은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짙은 갈색 머리의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레이어드.
이 세상의 주인공인 소년.
처음에는 대련에서 생긴 오해로 꽤 미묘한 사이였으나 지금은 조별 과제 이후로 나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오해는 풀리지 않아 내가 힘을 숨기고 일부러 져줬다 확신 중이긴 하지만.
“응? 넌 뭐냐?”
“처음 보는 여자앤데. 아는 사이야?”
레이어드의 무심한 말투에 옆에 있던 그레인저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명백하게 심기 불편한 티를 팍팍 내는 녀석.
그야 그럴 수밖에.
놈이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여자 같다는 말이었으니까.
실제 원작에서 둘이 라이벌 관계가 되는 계기 역시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그 중간에 끼어있는 걸까?
애초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공간도 복도가 아닌데 말이다.
“어이. 거기 촌티 나는 놈. 방금 뭐라고 했냐?”
“여리여리하게 생긴 거랑 다르게 입이 꽤 거치네.”
“하하. 알겠다. 지금 일부러 나랑 싸우고 싶어서 도발하는 거냐? 앙?”
큰일이다. 이대로 놔두다간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말 거야. 강한 직감의 경고에 따라 즉시 둘을 말리기로 했다.
“자자 서로 싸우지 말고. 조회 시간도 다 돼가니까 각자 갈 길 가자고.”
“어이. 어딜 은근슬쩍 내빼려···.”
“그래. 나도 만나서 반가웠고 지금 못다 한 얘기는 나중에 단둘이 천천히 즐기자~!”
녀석의 말을 끊고 어깨를 붙잡아 그대로 앞으로 밀고 갔다.
그나저나 진짜 왜 이렇게 말랐대?
게다가 교복 너머로도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결.
아무리 봐도 도저히 남고생이라곤 믿을 수 없는 외형이란 말이지.
“야! 나 아직 저 촌놈이랑 얘기 안 끝났단 말이야!”
“그래. 나중에 실컷 해. 나 없는 데서 단둘이 실컷 하면 되겠네.”
“하 뭐냐? 너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야?”
이게 미쳤나.
순간적으로 그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아니 아무리 여자처럼 생겼다 해도 결국 시커먼 남정네잖아.
이런 놈한테 질투하냐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 참 상쾌하고 좋네. 진짜 너무 좋아서 꿀밤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것도 꽤 나쁘지 않은 조합일지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래도 지금껏 여신님의 말들은 그냥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내가 하렘을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확실히 여신님이 간택한 여자들은 하나 같이 우위를 가릴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이성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지. 이성이 아니라 동성이잖아.
아무리 그리스 신화부터 이어진 신계의 정조 관념이 문란하고 동성애에 너그럽다 해도 그걸 인간 사회에까지 적용시키면 안 된다는 거다. 지금은 고대 그리스가 아니라 19세기 영국이라고.
아무튼 가까스로 상황을 해결하고 반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휴···.”
나도 모르게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옆에서 나란히 오던 레이어드는 속 편하게 물었다.
“무슨 문제 있어?”
네가 문제야. 너랑 그 싸가지가 내 가장 큰 문제라고.
딱 보니까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귀찮아질 게 뻔하니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인공에게 물어보았다.
“너 아까 복도에서 본 걔랑 아는 사이야?”
“어? 그 여자애? 아니 모르는데.”
역시 그랬군. 아직은 둘이 만나지도 않은 건가.
사실 둘이 만나는 건 원작의 극초반 내용인데 말이지.
내가 빙의한 이후로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아직도 작중 시점은 극초반도 지나지 않았다니.
그게 아니면 혹시 이것도 내 개입으로 인한 나비효과인가?
그런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그럴 확률은 상당히 낮아 보였다.
애초에 실제로도 아직 현실 시간은 많이 안 흐른 게 맞았다.
당장 아카데미만 해도 꽤 오래 다닌 듯했는데 겨우 두 달밖에 흐르지 않았으니까.
마침 그런 생각과 일치하게 조회 시간에 담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부터 중간시험 기간이네요. 다들 열심히 준비하시길 바라요.”
그렇다. 이제야 1학기 중간시험 기간에 돌입한 거다.
아직 갈 길이 너무 먼 거 아니냐고.
그나저나 중간시험이라.
하나도 준비 안 했는데. 어떡하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요즘 글이 잘 안써지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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