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4
“무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율리아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일단 진정시켜주었다.
“괜찮아. 아마 별일 아니겠지.”
“하지만 분명 안에서 비명이···.”
“음.”
내가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레이첼의 언니를 한번 본 적 있기 때문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좋게 말하면 천연 백치미라고 할지. 상당히 덜렁대는 타입이니까.
대충 별것도 아닌 일로 비명을 지른 것 같다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물론 그게 아닐 수도 있으므로 확인해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
“레이첼! 무슨 일이야?”
안에서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레이첼을 불렀다. 만약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면 괜찮다는 말이 들려올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나도 잠잠하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뒤늦게 서서히 불안감이 밀려왔다.
설마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그때 샤론이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들어가 보자.”
“···응. 역시 걱정돼서 그냥 못 기다리겠어!”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태평하게 기다릴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레이첼! 우리 들어갈게!”
율리아의 외침과 함께 우리는 현관을 지나서 조금씩 안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코너를 지나 부엌에 펼쳐진 풍경을 발견하고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부엌에 덕지덕지 흩뿌려진 핏자국. 식탁 테이블에 꽂혀있는 식칼.
바닥에 엎드려서 미동도 하지 않는 여인.
율리아는 입을 틀어막은 채 비명을 내질렀다.
“꺄 꺄아악!!”
“······.”
사건 현장을 가만히 관찰하던 샤론이 벽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쓸면서 말했다.
“토마토 소스야.”
“···어 응?”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율리아가 멍한 표정으로 되묻는 사이 반대편에서 부엌으로 황급히 들어오는 레이첼과 딱 마주쳐버렸다.
손에는 휴지를 들고 있는 레이첼은 우리와 마주치고는 당황한 티를 역력히 드러냈다.
“너 너희가 왜···! 밖에서 기다리랬잖아!!”
“샤론 케첩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 그러면 여기 쓰러져 있는 분은···?”
레이첼이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땅에 엎드려 있는 여인에게 외쳤다.
“언니! 일어나라니까 왜 아직도 그러고 있냐고!”
“힝···. 그게 넘어져서 무릎이 아픈데···.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막 들리니까 무서워서···.”
말끝을 흐려도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이 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은 척했다?”
“···언니. 제발. 나 진짜 쪽팔려 죽을 거 같아.”
세상에. 그 짧은 순간에 우리가 들어오니까 바로 죽은 척을 했다니.
이걸 순발력이 좋다고 해야 하나? 뭐든 간에 사고방식이 평범한 사람과 상당히 다르단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뻘쭘한 분위기 속에서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여자.
확실히 무릎에 멍이 선명한 걸 보면 넘어져서 아팠다는 건 사실인 듯했다.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해맑은 미소를 꾸며내며 우리에게 인사했다.
“아 안녕···! 우리 동생 친구들이구나! 모두 얘기는 많이 들었어!”
“언니. 그냥 제발 들어가 있어. 진짜 부탁이야.”
“에헤헤. 우리 동생은 부끄럼이 많아서···. 참! 내가 요리하던 도중이었거든! 조금만 기다리면 맛있는 스파게티 해줄게!”
부엌을 슬쩍 둘러보니 벽면과 바닥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토마토 소스.
그리고 냄비에 담겨 아직 삶지 않은 파스타 생면.
도마 위에 올려진 피망과 그걸 자르기 위한 테이블에 꽂힌 식칼까지.
하나씩 따로 보면 너무나 별거 아닌 풍경이었으나 그것들이 하나로 절묘하게 맞물리며 화룡점정으로 꽈당 넘어진 레이첼의 언니까지 합쳐지니 완벽한 살인 현장이 연출된 것이다.
어쨌든 오해가 풀리니 율리아도 겨우 진정하고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런 와중에도 유일하게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단 한 명.
제 언니를 어떻게서든 숨기고 싶은 레이첼이었다.
물론 동생의 친구들이 놀러 왔다고 마냥 좋아하는 중인 그녀에겐 뒤에서 쏘아지는 시선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닌 듯했지만.
“나는 레아야! 앞으로도 자주 놀러 와줘!”
“네! 그럴게요! 그런데 아까 레이첼이 저희 얘기를 자주 했다고요?”
“응응. 오늘 학교는 어땠냐고 물어보면 항상 너희 얘기만···.”
“으아악!! 말하지 마! 제발 멈춰!!”
설마 레이첼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이야.
차라리 시큰둥하게 넘어가면 몰라도 저러면 더더욱 듣고 싶어지는 법인 것을.
“특히 그중에서도···. 읍읍! 읍! 읍!!”
결국 극단의 조치로 아예 뒤에서 입을 막아버리는 여동생.
“어이. 너희 셋 다 지금 당장 내 방으로 들어간다. 실시.”
거역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에 우리는 얌전히 레이첼의 말에 따라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았음에도 바깥에서 또렷하게 들려오는 말소리.
쉽게 예상할 수 있듯 동생이 언니를 잔뜩 혼내고 있었다.
율리아는 방긋 웃으면서 우리를 보고 얘기했다.
“둘이 사이가 너무 좋다. 그치?”
“음···.”
저걸 좋다고 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딱히 율리아의 얘기에 공감하긴 어려웠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며 들어온 레이첼은 꽤 후련한 표정이었다.
아마 그와 반대로 지금 언니분의 표정은 매우 침울해져 있지 않을까.
“이제 알겠지? 내가 왜 우리 집에서 하는 걸 결사반대했었는지.”
“언니분 너무 귀엽고 상냥하시던데? 레아 씨라고 했던가?”
단순한 빈말이 아닌 진심이 섞인 율리아의 칭찬에 레이첼은 감탄을 터뜨렸다.
“와···. 그냥 네가 이 집에 살아라. 우리 바보 같은 언니 좀 제발 먹여 살려줘.”
“에이. 그렇게 말해놓곤 막상 떨어져 살면 보고 싶어 할 거면서.”
그러자 레이첼은 엄청나게 질색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짜 내가 기숙사만 붙었어도 무조건 독립했다. 제발 하루라도 떨어져서 살고 싶은 정도라고.”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 말이 거짓말이란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수정 구슬로 과거를 보았을 때 언니가 며칠 동안 연락이 끊기자 즉시 한걸음에 직장까지 달려가 난리를 치던 모습을 지켜봤었기에.
“어쭈? 야? 웃어? 내 말이 웃겨? 진짜라니까.”
“그래. 그렇다고 쳐줄게.”
“하. 이게 한동안 좀 오냐오냐 봐줬더니 기어오르려 하네.”
막상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별달리 행동을 취하지도 않는 레이첼.
확실히 최근 부쩍 많이 부드러워지긴 했다.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찐따라는 말도 안 쓰고.
“자자 얘기는 나중에 실컷 하고. 일단 오늘은 공부하려 모인 거잖아?”
“우리 반 최고 우등생님이 족집게로 가르쳐주시는 건가요?”
“당연히 서로 같이 도와줘야지! 스터디그룹은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율리아의 주도 아래 책을 펴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려 하는데 전혀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방에 네 사람이 앉을 자리가 마땅찮은 것이다.
그냥 바닥에 앉아서 상 하나 피면 되지 않냐 싶겠지만 여긴 21세기 한국이 아니라 19세기 영국이다. 바닥에 앉는 문화도 아니고 접었다 펴는 밥상 같은 것도 당연히 없다.
책상이 있긴 하나 4명이 같이 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언니. 우리 공부해야 하니까 조용히 해야 해. 진짜로.”
“응! 나만 믿어!”
결국 우리는 방에 들어온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부엌으로 나왔다.
4명이 한자리에 같이 앉을 공간은 부엌 식탁만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스파게티를 만들던 언니는 동생의 경고에 입을 막고 요리를 이어갔다.
다만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조용한 건 아니었다.
보글보글.
서걱서걱.
“······.”
쿠당탕탕!
쨍그랑!!
“하아···. 언니.”
“나 입 안 열었어! 와 완전 조용히 있었어!”
“지금 나 열받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미 미안해···.”
완전히 쭈그러져선 나지막이 사과하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래도 명색이 언니인데 이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닌가?
율리아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건지 레이첼을 부드럽게 말렸다.
“괜찮아. 우리가 엄청 급한 것도 아니고 언니가 만들어주는 스파게티 먹고 나서 공부해도 되잖아?”
“어휴···.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헤헤. 알았어! 그럼 조금만 기다려!”
순식간에 헤실헤실해져서는 부산스럽게 요리를 마무리해가는 레이첼의 언니.
그렇게 완성된 토마토 스파게티는 겉보기에도 매우 먹음직스러웠다.
확실히 괜히 메이드가 아니었던 건가?
“음. 맛있네요.”
“진짜 최고!”
“냠냠.”
맛 역시 일품이었다.
우리의 칭찬 세례에 함박웃음을 띠며 기뻐하는 언니분.
조금 엉뚱하긴 해도 사람 자체가 밝은 에너지를 주다 보니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레이첼도 파스타를 먹으며 새침하게 말했다.
“그 난리를 친 보람은 있네.”
“레이첼. 보니까 너 언니한테 너무 모진 거 같아.”
“나도 억울해! 오냐오냐 키우면 사고만 더 친다니까!”
네가 키우는 입장인 거야?
자신의 편이 생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즉시 그녀는 아군인 율리아에게 달라붙어 어리광을 부렸다.
“우리 친구는 아는구나! 동생이 자꾸 너무 못되게 막 괴롭히고 맨날 혼내고. 힝···.”
“언니는 지금 동생 친구한테 대체 뭐 하는 건데.”
“솔직히 맞잖아! 저번에 뤼팽 선생님 오셨을 때도 그렇고···!”
“언니가 혼날 짓을 하잖아! 그때도 차 쏟은 것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 그건···.”
한창 자매의 말다툼이 이어지던 사이.
옆에서 가만히 얘기를 듣던 샤론이 작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뤼팽?”
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스파게티 먹고 싶네용
후루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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