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5
이건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물론 뤼팽이 나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다 샤론에게 빌미를 주기라도 하면···.
그런데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돌이켜 보니 샤론이 뤼팽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마주쳤던 사람은 카지노 내에서의 셜록이었다.
그렇다는 건 즉 샤론과 셜록이 동일 인물이란 결정적인 증거일 수도 있다.
이건 어쩌면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일지도 모른다.
“레이첼. 뤼팽이 누구야?”
“엉?”
여태껏 조용히 있던 샤론이 적극적인 태도로 레이첼에게 질문했다.
물론 이것만 보고서 확정 짓기엔 아직 부족하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뤼팽을 만난 적이 있다고 인정한다거나.
레이첼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 이번에 장학금을 탔는데 그때 심사하던 사람.”
“장학금?”
“사실 운이 좋았지. 최근에 새로 만든 신생 재단이라 했던가?”
“재단 이름이 뭔데?”
“뤼팽 재단.”
샤론과 달리 율리아는 그런 얘기에 별달리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재단 이름이 똑같은 거면 그 사람이 이사인가 보네.”
“아마도. 사실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저번에 사무실에 한번 갔을 때는 아무것도 없던데? 처음에는 사기 아닌가 했다니까.”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래도 지금은 안에 가구도 좀 집어넣어서 나름 그럴듯해졌는데.
뒷담 아닌 뒷담에 레이첼의 언니는 화들짝 놀라서 동생을 말렸다.
“그러면 안 돼! 우리를 도와주신 얼마나 고마운 은인이신데. 게다가 생긴 것도 자 잘생기셨고···.”
“언니는 그냥 그 남자한테 반한 것뿐이잖아.”
“아 아 아니야!”
극렬하게 부정하지만 막상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언니의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첼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 참···. 그런 아저씨가 어디가 좋다고.”
“아저씨라니! 뤼팽 님이 얼마나 멋지신데···!”
“어이구. 꿈 깨시지? 그 사람이 언니한테 눈길이나 주겠어? 애초에 그 나이대면 무조건 결혼도 했을 텐데.”
음. 당연히 뤼팽은 설정상으로도 미혼이다. 가족이 있다는 건 또 새로운 가짜 신분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니 작업량만 늘어나게 되니까.
하지만 레이첼의 말대로 보통 그 나이대. 특히 재단을 운영할 만큼 재력이나 신분이 받쳐주는 남자라면 보통 결혼도 한 상태인 게 일반적이긴 하다.
레이첼의 언니 또한 그 말을 반박할 수 없는지 거의 울먹거리는 눈빛으로 애처롭게 말했다.
“그 그런가···? 정말로 뤼팽 님이···. 힝.”
“진짜 마음이 있으면 처음부터 그런 걸 물어봤어야지! 그냥 좋다고 헤실헤실하면 남자가 넘어오겠냐고.”
갑자기 왜 또 분위기가 연애 상담으로 넘어간 건지 모르겠네.
[저 정도면 받아주는 게 어떠냐?]
‘···진심이에요?’
아니 이건 받아주는 게 더 나쁜 짓이잖아.
애초에 아르센 뤼팽은 실존하는 사람도 아니고 내 변장 신분에 불과하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샤론의 속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단 자연스럽게 주제를 원래대로 돌려볼까.
“그럼 장학금은 무사히 받은 거야? 심사는 어땠어?”
“심사? 딱히 뭐 없었는데. 신청한 지 하루 만에 합격해버려서.”
그 말을 들은 율리아가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와. 하루 만에? 장학금으로 얼마나 받았는데?”
“학기 전액 지원.”
“···진짜로? 그게 돼?”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을 후원하는 단체야 의외로 많다. 마법사란 인력이 워낙 회귀하다 보니 새싹일 때부터 눈도장을 찍는 느낌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학비 전액을 부담해주는 후원 단체는 거의 없다. 특히 아무런 대가 없는 장학 재단이라면 더더욱.
레이첼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내가 첫 장학금 대상자라 그렇다던가. 아무튼 나도 자세히는 몰라. 오히려 나보다 얘가 더 잘 알고 있을걸?”
그러면서 난데없이 나를 가리키는 손가락.
“네가 나한테 소개해준 거잖아. 뤼팽이랑 아는 사이 아니야?”
윽. 이건 조금 위험한데.
샤론의 반짝이는 눈빛이 곧바로 내게 고정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부담스러운 시선. 다름 아닌 레이첼의 언니로부터 쏘아지는 눈빛 레이저 공격이었다.
“정말로 뤼팽 님이랑 아는 사이야!?”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간절하게 질문하는 그녀.
나는 샤론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얼굴도 전혀 몰라요.”
“그 그치만! 우리 동생한테 소개해줬다면서···!”
“그건 집 근처에 못 보던 사무실이 생겼길래. 명함도 우편함에 꽂혀있던 걸 건네준 것뿐이고요.”
내 해명에 실망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는 레이첼 언니.
미리 생각해둬서 망정이지 자칫 까딱 잘못했으면 진짜로 큰일 날 뻔했다.
“뭐야. 그런 거였어? 나는 둘이 친척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내가 그 사람이랑 닮았어?”
설마 레이첼이 변장의 위화감을 눈치챘던 걸까?
“아니. 생긴 건 별로 안 닮았는데. 뭐라고 해야 하지? 약간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흠···.”
분위기가 비슷하다. 그런 추상적인 감상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다. 결국 변장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내 연기에서 미묘한 공통점을 눈치챈 것에 가깝겠지.
나는 샤론을 바라보며 가볍게 툭 물었다.
“샤론은 어떻게 생각해?”
“글쎄.”
좋아. 미끼를 물었다.
레이첼의 말을 듣고 실제로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샤론.
만약 내 추측대로라면 정말로 뤼팽과 나의 분위기가 유사한지 비교하려던 것이리라.
다시 말해 샤론은 뤼팽을 이미 알고 있다.
즉 카지노에서 만났던 셜록이 샤론이다.
그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나는 방금 질문을 던져 반응을 유도했다.
돌아온 대답은 ‘글쎄’.
중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적어도 내 가설을 더욱더 견고하게 뒷받침해주기엔 충분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내 속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듯이 곧바로 뒷말을 덧붙였다.
“뤼팽이란 사람을 모르니까. 비교할 방법이 없네.”
“······.”
이러면 결국 다시 원점이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입에서 뤼팽을 모른다는 확답이 나왔으니 더 안 좋아졌다.
물론 샤론이 거짓말로 속이고 있음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가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내 노림수를 완벽히 간파하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여기선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는 듯했다. 괜히 더 억지를 부려봤자 의심의 눈초리만 강해지겠지.
“혹시 그 재단 말이야. 신청하는 데 따로 자격이 필요해?”
“그 사람이 말하기론 성적보다 오히려 소득 수준이나 다른 것들을 더 따진다던데.”
“음···. 그러면 나는 힘들려나.”
확실히 율리아는 힘들 것이다.
캐릭터 컨셉 자체가 뭐 하나 빠짐없이 완벽한 아가씨인 덕에 집안 배경 역시도 으리으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차피 심사 기준은 내 마음이지만 그래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그걸 학연·지연 등을 이유로 어기고 싶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레이첼에게 망설임 없이 장학금이란 명분으로 도와준 것도 그녀가 조건에 부합했기 때문이니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장학금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도와줬겠지.
“샤론은 어때?”
“음. 잘 모르겠어.”
“한번 신청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어차피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이건 또 예상 밖의 전개인데. 샤론이 직접 내 사무실에 찾아온다고?
이게 과연 기회일지 아니면 또 다른 위기일지.
잠시 머리를 굴리며 그림을 그려보다 곧 나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겠네. 한번 가보는 게 어때?”
내 제안에 샤론은 가만히 이쪽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면 둘이 같이 가자.”
“···어?”
“오. 그것도 괜찮은 듯? 솔직히 여자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냐. 어차피 너네 집 근처니까 같이 가주면 되겠네.”
당연하지만 그건 안 된다.
뤼팽과 크로가 한자리에 동시에 존재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까.
“그 그럼 나도 같이···.”
“언니는 빠져. 아카데미 학생도 아니면서.”
“힝.”
거절해야 한다. 하지만 무슨 명분으로?
이건 샤론이 준비한 노림수였다. 아까의 나와 차이점이 있다면 그녀는 무사히 노림수에서 벗어났으나 반대로 나는 빠져나가기 힘들어 보인다는 것.
침착하자. 아직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다.
아마 나와 마찬가지로 상대 역시 아직 의심하는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벌써 그걸 이용해 나를 압박했었겠지.
어쩌면 사실은 아예 의심조차 못 하는 중이고 그냥 나 혼자 섀도복싱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면 거절을 어떻게 한담?
···아니지. 굳이 거절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어쩌면 이걸 역으로 활용한다면.
이 위기를 잘만 넘긴다면.
상대는 나를 아예 의심 선상에서 제거할 수도.
그래. 이건 오히려 기회였다.
“좋아. 같이 가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것이 바로 자강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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