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6
“오늘은 어디서 공부할 거? 참고로 우리 집은 절대 안 된다.”
수업 종이 마치자마자 레이첼이 내게 물었다.
어제의 사건 때문인지 절대 본인 집만은 안 된다는 결사의 눈빛이 인상적이다.
“오늘은 못 할걸.”
“응? 매일 모이는 거 아니었어?”
“정 그러면 너랑 율리아 둘이서 하던지.”
“설마 샤론이랑 둘이서 데이트라도 하는 거냐?”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몰아붙이는 레이첼.
“뭔 소리야. 네가 말해준 사무실에 가려는 건데.”
“아 그거?”
“애초에 네가 나한테 같이 가라고 제안했으면서. 그걸 벌써 까먹어?”
“에이. 나는 당연히 어제 바로 간 줄 알았지.”
그건 무리다. 내게도 준비할 시간은 필요했으니까.
정말로 샤론이 셜록이 맞다면 이번 기회에 확실히 나를 의심 선상에서 제외시키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오늘 스터디는 취소하는 걸로.”
“야. 괜히 끝나고 딴 데로 새지 말고 바로 헤어져라. 알겠냐?”
뭐 이런 것까지 일일이 간섭하려 한대.
얘기하는 것만 들어보면 오해할 만한 수준이다.
“누가 들으면 네가 내 여친인 줄 알겠다.”
“윽. 뭐래···! 진짜 역겨운 소리 하지 마! 나는 그냥 네가 괜히 샤론한테 찝쩍대는 꼴을 보기 싫어서 그런 것뿐이라고!!”
“아 알았으니까 진정해. 애들 다 쳐다보잖아···!”
아니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역겹다고 말할 것까지 있냐.
나도 그냥 농담 삼아 던진 말인데 좀 섭섭해지려 하네.
[흠. 왕도적이로군.]
‘이젠 뭔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겠네요.’
언제부터인가 여신님의 위엄은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남은 건 하렘에 미쳐버린 변태밖에 없었다.
아무튼 수업도 전부 끝났으니 드디어 결전의 시간이다.
나는 샤론이 있는 자리로 다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장학금 신청하기로 한 거 기억하지?”
“응. 바로 가자.”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즉시 아카데미를 빠져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
드디어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별다른 얘기는 딱히 오가지 않았다.
내가 기껏 말을 붙여도 대부분 단답만이 돌아올 뿐이랄까. 사실 나도 오늘은 약간 긴장한 탓에 그다지 입을 자주 열지는 않았으니까.
눈앞에 뤼팽 재단의 사무실이 보였다. 이제 저기로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다.
말하자면 승패를 가를 승부수를 띄운 셈이다.
만약 그녀가 위화감을 눈치채고 꾸며진 무대임을 간파한다면? 사실상 내가 괴도라는 사실을 들키는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반대로 샤론을 무사히 속여 넘길 수만 있다면 나와 뤼팽이 동일 인물이란 의심을 방어할 완벽한 알리바이가 만들어지게 된다. 물론 이것도 정말 그녀가 셜록이어야 의미가 있겠지만.
“여기야.”
“바로 들어가자.”
샤론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뎌 문손잡이를 잡아 쥐었다.
끼익.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린 문.
안쪽은 불이 켜져 있지 않아 꽤 어두컴컴했다. 그런 가운데 책상에 앉아있는 누군가.
“어서 오십시오.”
나지막한 사내의 목소리. 샤론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맞은편에 있는 그림자를 빤히 응시했다.
“불을 좀 켜도 될까요?”
“물론. 편하신 대로.”
전등을 켜자 환해진 사무실 내부. 그와 동시에 사내의 모습 또한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어색함 없이 살아 숨 쉬는 중년의 남자.
미묘한 움직임이나 호흡에 따른 미세한 떨림까지. 누가 보더라도 인형이나 가짜라곤 상상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었다.
“그래서 두 분께선 무슨 일로 방문하셨는지?”
나는 굳이 앞에 나서지 않고 대화의 주도권을 샤론에게 넘겼다.
“장학금을 신청하려고요.”
“흠. 장학금이라. 좋습니다. 우선 제 앞에 놓여있는 신청서를 작성해주십시오.”
손짓으로 책상에 올려져 있던 서류 더미를 가리키는 뤼팽.
내가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에 자연스레 앞으로 걸어가서 신청서 2장을 챙겨 돌아왔다.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 없이 잘 흘러가고 있는 느낌이네.
하지만 아직 방심은 금물이다. 최대한 여러 변수를 고려하며 신경 쓰긴 했으나 완벽하다고 자신하기에는 불안한 면이 있으니까.
일단 나도 옆에서 의심받지 않도록 서류를 꼼꼼히 작성했다.
“다 썼어?”
“응.”
“저 그냥 이대로 제출하면 되나요?”
“네. 제게 주시면 됩니다.”
신청서 2장을 책상에 앉아있는 그에게 건네주었다.
적은 내용을 가볍게 훑어본 뤼팽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신청서를 챙겼다.
“심사에는 며칠 정도 시간이 걸릴 겁니다. 결과가 나오면 제가 집에 방문해 직접 알려드리죠. 혹시 그게 불편하시다면 우편으로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럼 우편으로 보내주세요.”
“그쪽의 아가씨께서는?”
샤론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대뜸 물었다.
“제가 다시 사무실로 방문해도 되나요?”
“물론. 편하신 대로.”
“그럼 언제 다시 올까요?”
“흠. 일주일 뒤면 괜찮겠군요.”
아직 괜찮다. 샤론도 특별히 의구심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제 마무리만 깔끔하게 매듭지으면 완벽한 알리바이가 만들어진다.
“그럼 오늘은 바로 돌아가면 되나요?”
내 질문에 뤼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오늘은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혹시 레이첼이 누군지 아시나요?”
다소 뜬금없는 질문임에도 뤼팽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다마다요. 저희 재단의 첫 장학생이니까요.”
“그 아이가 추천해줘서 여기 왔어요.”
“오. 그렇군요. 나중에 따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군요.”
“그럼 혹시 레이첼의 언니도 뵌 적 있으세요?”
뭐야. 거기까지 간다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여 슬쩍 샤론을 말렸다.
“그 샤론. 그런 얘기는 지금 좀···.”
“괜찮아. 별다른 뜻은 없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뤼팽은 잠시 뜸을 들이다 답변을 내놓았다.
“물론 알다마다요.”
“그럼 혹시 뤼팽 씨는 기혼자이신가요?”
“흠.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레이첼의 언니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건 정말로 큰일이다. 어떻게서든 상황을 넘겨보려 했으나 이 이상은 무리였다.
샤론의 상당히 무례한 질문에 딱딱하게 표정이 굳은 뤼팽.
곧 그는 단호하게 얘기를 끊어버렸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네. 죄송했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미련 없이 밖으로 나서는 샤론. 나도 뒤따라 허겁지겁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휴우. 저기 마지막에 왜 그랬던 거야?”
“아니 그냥.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확인? 어떤 걸?”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내 착각이었나 봐.”
그렇게 밖으로 나온 우리는 곧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나는 그렇게 돌아간 척하고 다시 사무실로 복귀했지만.
사무실 문을 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위험했다. 만약 거기서 조금만 잘못 대응했더라면 바로 들켰을지도.
내가 들어왔음에도 가만히 앉아있는 뤼팽.
그 모습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다 곧 등을 뒤돌아 문 위에 있던 조그마한 마법진을 쓱쓱 지워버렸다. 그러자 마치 그림자가 사라지듯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뤼팽의 모습.
그렇다. 뤼팽은 애초부터 내가 만들었던 마술.
더 정확히는 마술로 연출한 그림자였다.
원리는 쉽게 말해 빔프로젝터와 같았다. 대놓고 정면에서 마법을 쓰면 혹시라도 그녀가 눈치챌 수도 있다고 판단해 오히려 그녀의 뒤쪽에서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배우는 당연히 나 자신이었다. 더 정확히는 뤼팽의 모습으로 변장해 연기했던 어제의 나였다.
그렇기에 당연히 인형이나 마네킹처럼 부자연스럽지 않은 모습을 연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살아 숨 쉬는 내가 직접 연기한 거니까.
그렇다면 실시간 대화는 어떻게 처리한 것이냐?
그것도 전부 사전에 준비해둔 대사들을 상황에 맞춰 재생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어느 상황에서든 어울릴 보편적인 반응을 위주로 녹음해놨었다.
거기에 덤으로 샤론이 내뱉을 만한 내용 몇 가지도 예상했었고. 대표적으로 레이첼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마지막에 튀어나온 레이첼의 언니에 관련된 주제는 상상도 못 했었다.
애초에 샤론은 그런 주제에 관심을 가질 이미지가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순발력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까딱 잘못했다간 진짜 위험할 뻔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앞서 사용했던 전혀 다른 대답 두 가지를 잘라서 붙여넣기였다. 그 덕에 대답 사이에 미묘한 끊김이 생기긴 했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전혀 느끼지 못할 수준이니 괜찮을 것이다.
이 트릭을 완벽히 연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특히 중간에 뤼팽이 신청서를 훑어보는 사소한 장면은 엄청난 디테일을 쏟느라 밤을 새워 작업해야만 했다.
그래도 노력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덕에 전부 알고서 지켜본 나조차 전혀 의심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알리바이가 탄생했으니까.
성공했다는 뿌듯함과 긴장이 확 풀리며 몰려오는 피로감에 의자에 녹조처럼 널브러졌다.
그 상태로 샤론이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내 착각이었나 봐.’
“···후후. 후후후.”
내 승리다. 이번에는 완벽히 내가 이겼다고.
그렇게 자축하다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
이랬는데 샤론이 셜록이 아니라면?
그럼 나 밤새워서 개고생한 거야?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샤론이 사실 셜록이 아니라 샤론이면 셜록이 아니라서 어떡하죵??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