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8
좋아. 대충 밑그림은 짜두었다.
아직은 구상 단계에 불과하지만 제대로 실현되기만 하면 여신님이 말한 것처럼 그냥 돈을 쥐여주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도움을 줄 수 있겠지.
그러면 우선 고아원에 다시 방문해야겠네. 이건 나 혼자 준비한다고 될 게 아니라 상대에게도 얘기한 뒤에 협조를 받아야 하는 거니까.
뤼팽으로 변장을 하고서 고아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앞마당에서 옥신각신 다투는 두 꼬마와 마주쳤다.
그중 오렌지색 여자아이는 왜인지 낯익은 모습. 지난번에 원장과 얘기를 나누고 돌아갈 때 마주쳤었던가?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지도 못하게 내 앞길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기에 일단 싸움을 말려보기로 했다.
“그쯤하고 둘 다 진정하거라.”
그제야 내 기척을 눈치챈 건지 이쪽을 뒤돌아보는 꼬마 아이.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잠깐 깜빡이더니 녀석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루팡!”
“뤼팽이란다.”
그건 잘못된 표현이라고.
“혹시 저 누군지 기억하세요?”
“물론이지.”
아마도 이름이···.
“주디! 주디 애벗이에요!”
“그래. 당연히 기억하고 있단다.”
미안. 사실 가물가물했는데 방금 듣고 떠올랐어.
녀석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어준 뒤에 고아원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친구랑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렴.”
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발견한 원장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는군요.”
요즘 이것저것 일이 바쁘다 보니 후원은 해놓고선 고아원에 제대로 신경을 못 쓰긴 했다.
내가 이 고아원을 후원하기로 선택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바로 원작에서 맞이하는 안타까운 최후 때문이었다.
빌런의 희생양이 되어 살아남는 인물은 오직 하나뿐.
그런 비극을 겪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었기에 이 고아원을 돕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은 무슨 일로 방문하셨는지요?”
“안에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고 싶군요.”
“그러시죠.”
어차피 짧게 끝날 얘기는 아니니 원장실에 들어가 단둘이서 조용히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안으로 들어가며 내부 풍경을 잠시 둘러보았다.
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저번과 제법 많이 달라져 있었지.
게다가 마주친 아이들의 옷차림도 훨씬 깔끔하고 예뻐졌었고.
내가 준 돈을 허투루 쓰지는 않은 듯하니 다행이네.
하긴 눈앞의 원장은 작중에서도 선역으로 등장하니까.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돈을 뒤로 빼돌려 자기 탐욕에 낭비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 믿고 투자할 수 있는 거지.
“저희 재단의 후원은 도움이 좀 됐나요?”
“물론입니다. 덕분에 아이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저도 이곳을 선택한 보람을 느낍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그래서 후원을 더 본격적으로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본격적으로요···?”
“예. 저번에도 말했듯 저희는 아직 신생 재단이라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툭 까놓고 말해 자본력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수준이죠.”
결국 돈만 있으면 뭐든 가능하다는 말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히 돈만으로 해결하기엔 비효율적이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많다.
중요한 건 체계적인 시스템이다.
돈을 투자한 만큼의 효율을 뽑아내기 위해선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
“학교 병원 공장 등등. 더 나아가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 전반에 걸친 물건들까지. 단순히 돈다발을 드리는 것보다 저희 재단을 통해 실용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구상해보려 합니다.”
내 얘기를 듣던 원장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그런 지원을 받을 첫 대상으로 이 고아원이 적격이라고 판단했으니까요. 물론 원장님의 동의가 필요하겠지만요.”
“저희 고아원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작게 벌리며 되뇌어보는 원장.
“아직은 언감생심이지만 나중에 가면 저희 재단이 직접 학교나 병원을 설립할 수도 있겠죠. 그 시작이 바로 지금 이 자리인 겁니다.”
“왜 저희인 겁니까?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원장은 급작스러운 행운이 조금은 수상쩍게 느껴졌던 건지 의심이 싹튼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무슨 조건이 있는 건가요···?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지금 바로 말씀해주시죠. 어떤 좋은 제안을 하시더라도 그게 아이들을 불행하게 하는 거라면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확실히 제대로 된 사람이로군.
하긴 고아원을 이끌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래야지.
흡족한 마음에 고개를 주억이면서 대답했다.
“제 조건은 딱 하나입니다. 모두 행복하게 사는 거죠.”
“···선생님께선 대단하신 분이로군요.”
“아니요. 저는 딱히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요.”
이 말은 진심이다.
실컷 신나게 도둑질로 털어놓고 사회에 환원도 안 하면 그건 괴도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도둑놈이지.
어차피 내가 괴도로 활동하는 이상 기부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것뿐이다.
내가 딱히 대단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
“그런 고로 이제부터는 자주 들리게 될 것 같군요.”
“물론 환영입니다. 혹시 제가 도와야 할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단기간에 끝낼 일은 아니다. 오히려 여태껏 해왔던 일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장기 프로젝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커넥션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부터 막막하네.
보통 이런 건 상류층 사이에 이어진 연결고리를 활용하는 편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뤼팽이란 대부호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짜 신분이니까.
즉 지금 당장 뤼팽은 수상하리만치 돈이 많은 수상한 부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난제와도 같은 고민을 품은 채 원장실을 나섰다.
“앗.”
“아 괜찮니?”
그리고 문 앞에 있던 꼬마와 부딪히고 말았다.
오렌지색 머리의 소녀 주디 애벗.
바닥에 콩! 하고 쓰러진 아이를 부드럽게 일으켜주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딱히 없는 모양이네.
“아저씨.”
“그래. 왜 그러니?”
아저씨란 소리를 벌써 듣게 될 줄이야.
지금은 변장 중이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래도 기분이 조금 오묘했다.
“전부 아저씨가 한 거죠?”
“했다니. 뭐를?”
아이는 손을 좌우로 펼쳐서 쭉 뻗으며 말했다.
“이거 전부요. 고기 수프 하얀 원피스 2층 침대까지 전부.”
“흠. 그래. 아마 내가 한 게 맞는 것 같구나.”
그나저나 잠깐 사이에 많이도 갈아치웠네.
이거 굳이 내가 신경쓸 필요 없이 돈만 줘도 알아서 잘하는 거 아니야?
그게 궁금했던 건가.
순순히 맞다고 긍정했으니 이제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했다.
감사하다고 말하려나?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사달라고 조를지도.
철없는 행동이긴 해도 아직 어린아이니까 그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꼬맹이는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의문 모를 말을 내뱉었다.
“왜 그랬어요?”
“···음. 그게 무슨 뜻이니?”
아무리 좋게 들어도 고마워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나를 탓하는 듯한 말투와 어조.
이게 뭔가 싶어 어리둥절해 있던 찰나 꼬마는 대답도 없이 쪼르르 달려가 모습을 감춰버렸다.
‘어 제가 뭘 잘못했나요?’
[원래 여자의 마음은 알 수 없는 법이란다.]
‘아니 쟤는 여자가 아니라 꼬맹이잖아요.’
[그렇긴 하구나.]
뭔진 몰라도 참 특이한 애네.
딱히 원작에서 나온 적도 없는 엑스트라인 거 같은데.
그러고 보면 원작과 상관없이 특이한 존재감을 내뿜는 사람이 제법 있었지.
대표적으로 샤론-셜록이라던가. 둘이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가젯 형사 누님도 계시고.
그 외에 또 누가 있지?
아 그녀도 있었다.
조앤 왓슨.
단순히 특이함만으로 따지면 1순위를 다투지 않을까 싶은 여자.
이상하게 얽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그날 헤어진 이후로는 다행히 만난 적이 없었다.
아마 지금도 똑같이 카지노에 눌러앉아서 돈이나 잃고 있지 않을까?
“흠···.”
잠깐만. 카지노?
의식의 흐름에 따라 떠올렸던 공간을 몇 번이고 곱씹어 되뇌었다.
이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답을 찾아낸 거 같은데.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단연코 상류층과의 연결고리.
문제는 그걸 어디서 구하느냐였다.
이렇다 할 연줄도 신분도 없는 내가 상류층과 가까워질 공간이 있다면 카지노밖에 없으리라.
그곳이야말로 오로지 황금만이 알파이자 오메가인 무대이니까.
좋아. 결정을 내렸으니 굳이 뜸 들이지 말고 바로 가보자.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다시 그 특이한 여자와 재회하게 되는 것뿐.
설마 아직도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뭔가 불안한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
“뤼팽 씨!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이건 운명이네요!”
“···쳇.”
“왜 혀를 차는 건가요!?”
결국 다시 만나고 말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거시 바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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