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9
“그래. 오랜만이로군.”
예상했던 대로 카지노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와 마주치고 말았다.
“왜 그동안 안 오셨어요!”
“최근 일이 바빠서 말이지.”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도 아무런 거리감 없이 치근덕대는 조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저야 늘 평소와 다름없었죠.”
“매일 도박으로 탕진했다는 뜻이군.”
“하하···.”
그녀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고 허탈한 웃음만을 흘렸다.
이 정도면 오히려 대단하다고 감탄할 지경이다.
그렇게 매일 돈을 잃어도 카지노를 꾸준히 출석할 만큼 돈이 많은 건가?
직업이 의사라고 하더니 벌이가 상당히 괜찮은 모양이다.
“그럼 뤼팽 씨는 오늘 카지노엔 무슨 일로? 저번에 헤어질 때는 다신 안 올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흠. 그런데 의외로 다시 생각이 나서 말이야.”
“역시 그렇죠!? 사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거든요.”
이런 말에 공감하지 말란 말이야.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도박에 중독되었는지 주절주절 읊어나갔다.
“맨 처음엔 카지노는 생각도 안 했고 그냥 경마로 가볍게 시작했던 거였는데···.”
아니 굳이 얘기해줄 필요 없거든?
어쩌다 보니 그녀의 한숨 섞인 인생사 푸념을 옆에서 듣게 되었다.
“그러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인생은 한방이라는 거죠.”
“그 얘기의 결론이 왜 그렇게 되는 거지?”
“지금까지 꼬라박은 돈도 대박 한번만 터뜨리면 바로 복구되니까요.”
그래. 이미 그쪽이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뇌가 망가졌다는 건 알겠다.
완전히 도박에 절어져서 정상적인 사고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로군.
“뤼팽 씨도 결국 카지노에 다시 방문했다는 건 그때의 돈맛을 잊을 수 없다는 거잖아요?”
“딱히. 나는 돈을 따는 것보단 게임을 즐기면서 스트레스나 풀려고 온 거라서.”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죠. 결국 게임이 재밌는 이유는 판돈이 걸려 있기 때문이에요. 돈이 걸려 있다는 스릴이 없으면 짜릿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녀의 말 자체는 사실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도박에 중독되는 이유도 결국 극한의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아드레날린과 돈을 땄을 때의 도파민이 선사하는 전율과 쾌락. 그걸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하면 소소한 일상이 너무 시시하다고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지난번의 포카드를 못 잊으신 거죠?”
“흠.”
하지만 나는 예외였다.
결국 도박에 중독되는 이유는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스릴과 인생 한방 역전의 꿈 때문인데 그 2가지 전부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으니까.
테이블에 앉아서 카드놀이나 하는 것보다 도둑질이 훨씬 스릴 넘친다. 도박판에서 오가는 금액이 귀엽게 보일 정도로 비싼 보석을 훔치니 돈을 따봤자 감흥이 넘치지도 않는다.
그러면 남는 건 순수한 게임의 재미 하나뿐이다.
그것만으로는 도박에 미쳐서 인생이 파탄 날 수가 없는 것이다.
“확실히 다시 포카드를 뽑으면 재밌긴 하겠군.”
이 정도가 내 감상의 전부였다.
“지금은 그렇게 여유로운 척하셔도 막상 테이블에 앉으면 다를걸요? 저도 처음엔 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건 거의 도박에 중독되라고 저주하는 수준 아닌가?
아무튼 우리는 자연스럽게 포커 테이블로 다가갔다.
“오. 다시 돌아왔네 아줌마? 아까는 씩씩거리면서 당장이라도 나갈 것처럼 굴더니.”
“누가 아줌마라는 거야! 그리고 내가 언제 그랬어. 그냥 바깥 공기나 쐬고 온다고 했지!”
“네. 그렇다고 쳐주죠. 그런데 옆에는 누구? 남편은 아닌 거 같고.”
그러자 조앤은 마치 든든한 형을 데려와 자랑하는 것처럼 나를 소개했다.
“내 친구야! 실력이 어마어마하니까 지갑 걱정하는 게 좋을걸.”
“하하. 지갑 걱정은 오히려 그쪽의 신사분이 하셔야겠는데. 딱 보니까 제법 여유로워 보이시구만.”
“잘 부탁하지요.”
굳이 많은 말을 섞지 않고 테이블에 착석했다.
내가 카지노에 온 목표는 돈을 따는 게 아니다. 인맥을 쌓는 것이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 상류층들과 말이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내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굳이 친해지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적당히 어울려 주면서 상류층을 만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좋아. 그러면 새로 들어온 선수의 실력이 어떤지 확인해 보자고.”
게임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조앤 역시 내 옆자리에 앉아서 함께 게임에 참가했다.
사실 나는 딱히 실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도박에 실력이 어디 있겠냐 해도 심리전과 수 싸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장 조앤을 비롯해 이 자리의 대부분은 밥만 먹고 도박에 미쳐 살아왔다고 해도 될 정도의 중독자들. 당연히 기본 룰만 겨우 숙지한 나와 비교하면 한참 우위에 있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결국 도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운.
오로지 신만이 조율할 수 있는 행운이라는 요소가 제일 중요했으니까.
대략 테이블에 앉은 뒤 30분 정도가 흐른 뒤.
맞은편에 있던 사내가 처음과는 극명히 달라진 상태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건 사기야!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가 가리킨 손가락은 명확히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시치미 떼지 마! 게임을 몇 판이나 진행했는데 한 번도 돈을 잃은 적이 없다는 게 말이 돼!?”
“돈은 잃었습니다. 나중에 따서 메꿨을 뿐이고요.”
“말이 안 되잖아! 어떻게 패 상태를 완벽히 알고 바로 손절매할 수 있냐고!”
그의 말대로 나는 테이블에서 압도적인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무조건 미친 패가 손에 잡혀서 게임을 다 이기는 건 아니다. 단지 이길 게임에선 판돈이 상당히 쌓이는 반면 패가 별로 좋지 못한 판은 칼같이 죽어버리니 손해가 거의 없는 것뿐.
나는 일부러 상대가 더 열받도록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겠습니까. 제 실력이 좋은걸.”
“저 저 미친 새끼가···!”
“그렇게 억울하시면 딜러한테 정식으로 항의하십시오. 추잡하게 욕만 해댄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상대는 이젠 아예 고혈압으로 쓰러지려 했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네.
사실 내가 악질적으로 상대를 농락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딜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에 몰려든 구경인들에게 공식적으로 대답했다.
“여태껏 진행된 게임에서 부정행위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웅성대는 소리들.
귀를 잘 기울여보면 그들이 하는 얘기가 언뜻언뜻 들려왔다.
“저게 말이 돼?”
“그런데 저 사람 어디서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아 그때 그 사람이잖아! 그 갬블러 신사!”
“저번에 포카드 띄웠던 그놈이라고?”
그래. 바로 이걸 노렸다.
일부러 소란을 일으켜 카지노 전체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내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날 나를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전부 내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옆에서 게임을 지켜보다 보면 자연스레 내가 갬블러란 사실에 확신을 품겠지.
당연히 어떤 목적으로든 나한테 접근하는 사람은 많아질 것이며 그중에는 흥미를 품고 다가오는 상류층 역시 존재할 것이다.
덕분에 테이블은 금방금방 새로운 얼굴들로 회전되었다.
내게 돈을 전부 잃은 사람은 허망한 표정으로 일어나고 그 자리를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대체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미 옆자리에 있던 조앤 역시 돈을 싹 꼬라박은 뒤에 옆으로 비켜나 멀뚱멀뚱 나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와···.”
“저 사람 또 이겼어.”
“진짜 무슨 속임수 있는 거 아니야?”
“이렇게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무슨 수로?”
백날 들여다봐도 이상한 점은 절대 못 찾을 거다.
애초에 진짜 속임수를 부린 게 아니니까.
뭐 어쩌겠어.
꼬우면 본인들도 행운의 여신한테 이쁨받던지.
어차피 운이 무엇보다 중요한 도박판에선 나는 반드시 승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딱히 입질이 없네.
테이블에 앉는 사람도 전부 아까와 비슷한 날라리 녀석들밖에 안 보인다.
애초에 여긴 돈만 내면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일반 카지노라 그런 걸지도.
진짜 내가 원하는 상류층들은 까다로운 자격을 만족해야만 입장 가능한 초호화 카지노에서 놀고 있을 확률이 높다.
여기서 인맥을 쌓는 건 포기해야 하나?
아니면 아예 완전히 눌러앉아서 갬블러의 명성을 확 쌓고 그걸 통해 카지노에 입성해? 그렇게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나저나 이 여자는 또 어디 갔대.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옆에서 구경하던 조앤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아보았다.
뒤이어 살짝 떨어진 곳에서 배 나온 중년과 하하호호 담소를 즐기는 조앤을 발견했다.
그런데 저 남자는 누구지?
의문을 품음과 동시에 두 사람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게 옆의 남자를 소개해주는 조앤.
“이분이 지금 핫한 갬블러 신사예요.”
“오호. 과연.”
“뤼팽 씨! 이분은 제 병원 VIP 고객이신 길버트 그레이스 씨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확신했다.
이 남자야말로 내가 찾던 상류층 연줄의 열쇠라는 것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왜 주인공이 이름을 듣자마자 확신했을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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