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1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카지노를 방문한 목적은 무사히 달성했다.
그렇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길버트 그레이스를 통해 차근차근 커넥션을 쌓아 재단의 영향력을 넓혀 나간다.
물론 그는 기회를 제공해줄 뿐이며 과정은 전적으로 내 손에 달려있다.
생각해보니까 참 아이러니하네.
괴도로서 부호들의 재산을 훔치는 한편 자선 사업가로 변장해 상류층 사이에서 입지를 다지려 하다니.
만약 내 정체를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제대로 끝장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검의 흡수가 모두 끝났다.
[느껴지느냐?]
“네. 확실히요.”
변화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체내에 유유히 흐르는 마력이 이전보다 훨씬 늘어남과 동시에 짙어졌다.
어쩌면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걸지도.
비록 출발선이 워낙 미약했던지라 아직 엄청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이 정도라면 동급생 사이에서 나보다 명백히 뛰어나다 할 사람은 그레인저 정도를 제외하면 없지 않을까?
아직 원작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선 내가 레이어드나 율리아 같은 주연 캐릭터보다 더 강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생각은 없다.
지금 나를 비유하자면 하드웨어만 오버 스펙인 빛 좋은 개살구에 가깝다.
마력의 크기와 관계없이 운용과 컨트롤 전투 감각 등은 아직 한참 발전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이번 중간시험에 사력을 다하는 거고.
객관적으로 아직도 나는 약자에 속한다.
당장 드라칸의 지크프리트와 집행자인 에반 레지널드만 생각해도.
그 두 사람이 마법사들을 일렬로 나열했을 때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과연 따라잡을 수나 있을까 막막해질 정도였다.
심지어 그들보다 강한 존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수준을 초월한 마녀 호수의 여인 등등.
당장 내 옆에서 언제나 헛소리만 늘어놓는 여신님까지.
세계관 최강자가 되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꿈꾸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 목숨 안전하게 건사하며 괴도 활동을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의 실력은 갖춰놓을 필요가 있으니까.
창가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왕가의 검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냐?]
“어쩌긴요. 다시 돌려놔야죠.”
처음 괴도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세워놓은 하나의 철칙.
만약 보석의 주인이 선량하다면 힘만 흡수한 뒤에 다시 돌려준다.
사실 상당히 애매한 부분이 많긴 했다. 특히 선악을 판단할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보니 결국 내 마음대로 주관이 섞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왕실을 과연 선량하다 할 수 있는가?
먼 옛날부터 현재의 브리타니아 왕조는 여러 패악질을 많이 부린 것으로 유명하다.
당장 선왕은 역사에 길이 남을 망나니로 악명이 자자한 수준.
반면 현왕은 뛰어난 통치력으로 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어가는 현군으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결국 무엇을 초점에 맞추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그래서 돌려놓겠다고 선택한 근거는 공주님 때문이었다.
어찌 됐든 내가 검을 훔치는 과정에서 도와줬으니까. 그걸 도와준 거라고 봐야 할지는 살짝 의문이긴 하지만.
그 전날 밤 내가 별궁에 잠입했을 때 순순히 살려 보내준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하자.
[그럼 언제 갈 생각이냐?]
“지금이요.”
굳이 늦장 부릴 이유도 없으니까.
게다가 사실 이 검은 내가 갖고 있기엔 상당히 부담스럽단 말이지.
만에 하나 들키기라도 하면 바로 끝장인 거잖아.
역시 오늘 바로 돌려놓는 편이 좋겠어. 지금 당장.
***
별궁에 잠입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저번에 들킨 것도 방 안에 갑자기 공주님이 들이닥쳐서 그랬던 거지 별궁으로 들어가던 와중에는 아무 문제 없었으니까.
‘좋아. 아무도 없네.’
꼼꼼하게 확인을 마친 뒤 검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음. 역시 이 녀석은 여기에 박혀있는 게 제일 낫네.
마치 이 제단이 검집인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잠시 왕가의 검을 감상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도중.
뒤에서 들려오는 제법 익숙해진 여인의 목소리.
“다시 돌려놓으러 온 것이냐?”
“윽! 기척 좀 내고 등장하세요.”
이번에도 당해버렸다. 일부러 경계를 바짝 세우고 있었는데도 접근하는 기미조차 느끼지 못했다.
나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옥좌에 앉아있는 빅토리아 공주를 바라보았다.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입가에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은 그녀.
“아니 어떻게 괴도보다 더 은폐를 잘하는 거예요?”
“후후. 궁금하다면 내 친히 알려줄 수 있지. 다만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 대체 뭐길래 저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지?
설마 왕실에서만 내려오는 비급 같은 건가? 그런 건 너무 무협지 감성 아니야?
“오로지 왕가에 속한 자만이 들을 수 있다.”
어라? 설마 진짜 비급 클리셰라고?
“즉 이 몸의 부군이 된다면···.”
“잠깐! 그 그게 왜 그렇게 가는 겁니까?”
“물론 농담이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 공주를 보며 한숨을 돌렸다.
진짜로 식겁했네. 이 여자 생각보다 남을 골려 먹는 걸 좋아하는 악질적인 성향이 있다.
[흠. 저건 분명 진심이로군.]
‘여신님은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거잖아요.’
[아니. 내 직감이 소리치고 있다. 아주 훌륭한 아내가 되겠어. 물론 측실로.]
이젠 뭐라고 딴지를 걸기도 지친다.
차라리 그냥 무시하다 보면 언젠간 여신님도 그만두지 않을까?
아무리 봐도 내가 자꾸 반응해 주니까 재밌어서 더 그러는 느낌인데.
“그나저나 왜 돌아온 게냐? 분명 내기에서 진 쪽은 나였을 터인데.”
아 그러고 보니까 내기 조건이 검의 반환이었지.
그렇다는 말은 셜록이 인질극을 눈치챘다는 거구나.
“생각해 보니까 저는 내기 결과를 확인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아 그것도 그렇구나.”
사실 당연히 예상했던 거라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오히려 만약 못 알아차렸다면 굉장히 실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괜찮으세요?”
“음? 뭐가 말이냐?”
“셜록이 알아차렸다면서요. 위험한 거 아니에요?”
괴도와 협력하는 공주라니.
만약 이 사실이 외부에 밝혀진다면 즉시 이후의 모든 정치 행보는 끝장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괜찮아. 둘 다 입이 무거운 친구들이니.”
“친구···? 그 두 사람이랑 언제 친구가 됐대요?”
“전부 자네 덕분이지.”
뭔가 오묘한 조합이네. 사실 셜록과 가젯 형사 둘만 해도 굉장히 유니크한 캐릭터인데 거기에 공주까지 합세해 전설의 3인방이 결성되어버렸다.
더 놀라운 건 세 사람 모두 원작에선 제대로 등장도 안 하는 엑스트라라는 것.
이 세상이 원작 중심으로만 돌아가지 않는 실재하는 세계란 증거겠지.
“그 둘은 그렇다 치고. 집행자도 봤잖아요?”
“아 그 사내라면 우리 얘기를 듣기 전에 자리를 떠났으니 아마 모를 거야.”
“음···.”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역시 뭔가 불안하단 말이야. 특히 너무 조용한 게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혹시 공주님이라면 이 비정상적인 침묵에 관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왕실에 침입해 왕가의 검을 훔치고 공주님을 인질로 삼으면 보통 어떤 느낌인가요?”
“흠. 글쎄다.”
잠시 턱을 짚으며 생각에 잠기던 공주님이 농담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왕실 모독죄로 사형되지 않겠느냐?”
“······.”
어우. 등골이 오싹하네. 더 섬뜩한 사실은 저 말이 농담이 아닐 것 같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며칠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잠잠할까요?”
“그게 상당히 궁금한 모양이구나.”
내 속마음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한 그녀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나도 잘 알지 못한다.”
“정말요?”
솔직히 좀 의외였다.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런 정보쯤은 가볍게 얻을 텐데.
그렇다고 아예 흥미가 없어서 찾아보지도 않은 거라고 하기엔 당장 그녀도 깊게 연루되어 있으니 본인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알아볼 법한 내용이지 않나?
“물론 알아내려면야 가능은 하겠지만. 그건 나로서도 꽤 위험 부담이 큰 선택이다. 왕실이 의회가 내린 결정에 간섭하는 그림으로 비칠 여지가 있으니까.”
대충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 틀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왕실이 의회에 섣불리 간섭하는 건 위험하다.
즉 의회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막강하다.
브리타니아는 이미 현대의 의원내각제가 이루어지려는 중이었다.
겉보기엔 귀족과 마법이 존재하는 중세적인 면모가 존재하지만 속으로 파고들수록 시대가 빠르게 급변하고 있음을 여러 요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이 뻔하지 않으냐. 그대의 활약상이 세간이 더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 거겠지.”
“네. 아마도 그렇겠죠.”
거기까진 나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정말로 궁금한 건 그 너머의 누가 그런 결정을 주도했냐는 거다.
“의회가 그런 선택을 내린 건가요?”
“누구인지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겠느냐?”
물론. 당연히 있고말고.
“대비할 수 있으니까요.”
내 머릿속에 있는 원작 지식을 활용한다면.
단순히 대비하는 걸 넘어 저번에 생각했던 대로 역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숨기려는 의회의 뒤통수를 거하게 쳐서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빅토리아 공주는 그런 내 당당한 포부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내가 알려줄 수도 있겠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원한다면 알려줄 수도 있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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