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2
“어째서입니까?”
“이미 얘기는 끝났다. 자리로 복귀해라.”
최근 며칠 동안 몇 번이나 반복된 실랑이.
매번 똑같은 답만이 돌아왔음에도 가젯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레이븐이 버킹엄 궁전을 털었습니다. 이건 왕실을 향한 도전이라고요.”
“그리고 자네는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됐지.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궁에 멋대로 들어간 행위는 월권으로 처벌될 수 있고.”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뒤로 물러나겠지만 그녀는 오히려 성난 황소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대체 이유가 뭡니까? 적어도 제가 이해할 이유라도 알려주십시오. 왜 지난 사건을 극비로 부치는 겁니까.”
“나도 모른다. 우리는 그냥 위에서 내려온 결정에 따르면 된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의회의 결정이다.”
“그럼 정식으로 항의서를 작성하겠습니다.”
며칠이나 반복된 설전에 지친 청장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가젯.”
“네. 말씀하시죠.”
“자네는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보고도 하지 않은 채 궁에 멋대로 들어가 수사를 난잡하게 만들었지. 그 덕에 내가 얼마나 난감했는지 알긴 하나?”
“···그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가젯 본인 역시 뭐라 변명할 내용이 없었다.
실제로 그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 맞았으니까.
“자네의 처분이 유예된 것도 어디까지나 레지널드 경이 문제 삼지 않고 조용히 넘기기를 원했기 때문일 뿐이야. 그게 아니었다면 최소 근신 처분이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뒷짐을 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인 가젯.
청장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그런데 지금 이건 정말로 안 돼. 만약 의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유출이라도 시켰다간 단순히 옷을 벗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그때는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막아줄 수 없다.”
그 말은 협박이 아니었다. 상하관계 이전에 오랜 동료로서 건네는 진심 어린 걱정과 충고였다.
아마 단순한 빈말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될 확률이 높겠지.
그래서 가젯은 더더욱 궁금해졌다. 도대체 그 정도로 강력한 권력의 뒷배경이 누구에게서 나오는 것인지.
“그럼 하나만 알려주십시오. 대체 누구입니까?”
“의회라고 말했잖나.”
“단순히 의회가 결정을 내렸다고 이렇게 될 수 없다는 것쯤은 저도 압니다. 분명 배후에 누군가 있는 거겠죠.”
“···알려준다면 여기서 손을 뗄 건가?”
끄덕.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는 듯하던 남자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레이스다.”
***
그레이스.
나는 그 이름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무사히 왕가의 검을 놔두고 돌아왔는데 막상 마음의 짐이 더 얹힌 기분이다.
원인은 역시 공주와의 대화 끝자락에 나온 한 의원 때문이겠지.
사실 처음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정부가 이젠 내 활약상을 일부러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도 오히려 기세등등해질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상황을 주도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그레이스라는 얘기를 들으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레이스는 브리타니아에서 가장 유서 깊으며 명예로운 귀족 가문이다.
이 나라에 끼치는 영향력 역시 굳이 설명하기 입 아픈 수준.
이 가문의 일원은 하나하나가 막강한 존재감을 뽐낸다.
당장 멀리 갈 것도 없이 율리아만 해도 작중 시점이 지날수록 귀족 영애로서의 힘을 활용해 사건을 해결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보여준다.
카지노에서 만난 길버트 역시도 원작에선 등장하지 않지만 가볍게 조사해보니 군인으로서 상당한 활약상을 펼쳤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영웅이 넘쳐나는 가문.
하지만 그런 그레이스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따로 있다.
앞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레이스’라는 성만으로 지칭했을 때 사람들이 바로 떠올리는 인물.
즉 자타공인 그레이스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
리처드 그레이스.
그레이스 공작가의 가주이자 의회를 대표하는 상원의원 중 한 명.
쉽게 말해 사실상 왕 다음가는 권력을 지녔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
만약 거기서 끝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를 둘러싼 껍데기 즉 감투가 아니었다.
리처드라는 사람 자체가 지닌 능력. 악랄하다 싶을 정도로 뛰어난 정치력.
비록 아무런 무력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일반인에 불과함에도 리처드 그레이스는 누구보다 가장 확실히 주인공을 위기에 빠트렸던 빌런이다.
철저하게 설계된 그의 덫은 어디서부터가 시작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촘촘해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주인공 역시 율리아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함정에 걸려 죽었을 것이다.
“이건 생각보다 비상이네요.”
문제는 지금 율리아는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
애초에 현시점에선 그녀가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승산이 없다. 아직 율리아는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않은 학생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리처드가 주인공 때와 똑같은 함정을 설계하지도 않았겠지.
분명 나에게 맞춰서 전용 덫을 설치했을 확률이 높다.
만약 주동자가 누군지 몰랐다면 나는 별일 아니라고 가볍게 넘겼으리라. 하지만 지금 침묵의 원인이 리처드란 사실을 안 이상 이 모든 상황도 덫을 깔기 전의 사전 준비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이 사실을 지금이라도 알아차렸다는 걸까.
아직은 거미줄이 처지기 전이니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계획은 있느냐?]
“···전부 망가뜨려야겠죠.”
원래 모래탑을 만드는 것보다 공든 모래탑을 부수는 게 훨씬 쉬운 법.
최대한 난장판의 진흙탕으로 만들어야 한다.
상대가 더러워서라도 발을 빼도록. 굳이 저렇게 날뛰는 벌레는 잡아먹기 귀찮다고 거미가 생각하도록.
마침 괜찮은 아이디어가 하나 있었다.
***
가젯은 자리로 돌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다.
왜 괴도의 잘못을 우리가 대신 숨겨줘야 한단 말인가?
떳떳하지 못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죄를 저지른 레이븐이어야 한다.
범죄자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경찰이 잘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범죄 사실을 은닉하며 부끄러워해선 안 되는 거니까.
그녀는 행동할 생각이었다.
잘못을 바로잡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알려주기 위해.
괴도가 얼마나 악랄한 녀석인지를 확실하게 경고하지 않으면 피해는 계속 늘어날 테니.
하지만 이름 하나가 거대한 벽이 되어 그녀의 앞을 막아 세웠다.
그레이스.
그 이름에 반응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적어도 브리타니아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모두가 입을 모아 얘기한다.
리처드 그레이스는 위대한 영웅이라고.
브리타니아가 세계 최강국으로 우뚝 선 데는 그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극단적인 소수의 사람은 그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런 영웅이 제안해 의회의 통과를 받고 결정된 사안이다.
일개 경찰 나부랭이가 왈가왈부 의견을 고집할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청장의 경고는 정확했다.
만약 여기서 가젯이 입을 열었다간 단순히 옷을 벗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앞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밝은 빛깔은 아니겠지.
“···젠장.”
그녀는 처음으로 압도적인 무력감을 느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하물며 그 얄미운 괴도를 놓칠 때도 항상 분함이 앞섰지 무력감과 패배감에 점철되지는 않았었으니.
여전히 레이븐은 내가 잘만 하면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레이스라는 이름을 이겨낼 수 있나?
무리다. 이건 불가능한 싸움이다.
애초에 성립이 되질 않는데 싸움이라 부를 수나 있을까.
토끼가 사자를 상대할 때 싸움이란 표현은 쓰지 않는다.
사냥당하기 전 최후의 몸부림이라면 몰라도.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그냥 신경을 아예 꺼버리면 된다.
어차피 이미 수사권은 집행자에게 넘어갔다. 당장 그가 실패했던 것도 어디까지나 공주의 협력 때문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괴도는 꼼짝없이 잡혔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외부에 노출하지 않는 게 큰 잘못일까?
결국 괴도는 잡힌다. 집행자가 진심을 다한다면 못 잡을 리 없다. 그렇다면 체포한 뒤에 사실을 밝히면 되는 거 아닌가. 단지 알리는 타이밍이 조금 딜레이 될 뿐이다.
“시발.”
그녀는 욕설을 내뱉었다.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합리화를 열심히 진행 중인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해 보였기 때문에.
차라리 머릿속을 텅 비워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과 함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찰서 바깥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
하얀 담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가젯의 머릿속도 뿌연 연기로 가득 뒤덮였다.
멍하니 길거리를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고 있던 와중.
자전거를 타고서 등장하는 집배원.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아니에요.”
그런 인사를 받기엔 딱히 수고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여기 우편물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여러 종류의 편지들.
관공서로부터 날아온 공문서 사건을 목격했다는 증언 탄원서 등등.
온갖 내용이 뒤섞여 있는 가운데 그녀는 유독 눈에 띄는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이건···.”
이미 집배원은 이미 저 멀리 떠난 상황.
가젯은 발신인이 적혀있지 않은 익명의 편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겉봉을 뜯고 편지를 읽어내렸다.
“······.”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무도 안 다치고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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