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4
“설마 이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확실히 그렇구나.]
그냥 단순히 상류층과의 커넥션을 만들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카지노를 떠올렸던 것도 그래서였고 길버트 그레이스와의 만남도 조앤을 통한 우연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이런 요소가 그레이스를 공략할 열쇠가 될 줄이야.
단순히 행운이란 표현으로도 부족한 그야말로 운명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슬슬 출발해볼까.
마지막으로 모습을 점검한 뒤에 약속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목적지는 고급 레스토랑의 앞.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웨이터.
“어서 오십시오. 손님.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르센 뤼팽.”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로지 예약제로만 운영될 정도의 고급 식당.
내 이름을 듣자마자 곧바로 안내하는 걸 보니 일부러 의식하고 있던 건가.
웨이터를 따라 안쪽에 마련된 룸에 들어갔다.
그곳에 미리 와서 앉아있던 길버트가 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 마침 딱 좋은 타이밍에 왔군.”
“이거 초대해줘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뭘 이 정도로. 그리고 편하게 얘기해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길버트는 내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나로서야 그와 가까워질수록 이득이기에 굳이 사양하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이도록 했다.
“자네만 괜찮다면 나야 좋지.”
“그래. 어차피 같은 귀족 출신 동년배인데 무슨 상관인가? 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나를 동급으로 취급해준다는 사실에서 그의 성향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말만 같은 귀족이지 길버트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공작가 태생의 엘리트인 반면 뤼팽은 타국 출신의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이니까.
“다른 친구들도 조금 있으면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게.”
“다들 어떤 사람인지 기대되는군.”
“아마 자네라면 분명 만족할 거야.”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자리가 빠르게 만들어질 줄은 몰랐다. 내가 제안해놓고서도 안 될 거라 예상했는데 막상 길버트는 너무나 순순히 자리를 주선해주었다.
그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이 자리는 순수하게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 계획을 진행하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는 더 없으니까.
최대한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안 그러면 오히려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두 남녀가 함께 들어왔다.
그들을 보자마자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띠고 반겨주는 길버트.
“이야. 오랜만이로군!”
“세상에. 내가 아는 길버트 님이 맞나요? 저희를 식사에 초대하시다니. 이거 다음날 해가 동쪽에서 뜨겠네요!”
“···스테판. 태양은 원래 동쪽에서 뜨는 거야.”
“어? 그런가? 그럼 달이 서쪽에서 뜨나?”
“달도 동쪽에서 떠.”
매우 강렬한 등장씬이군. 이 짧은 순간 만에 눈앞의 남자가 어떤 느낌인지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밝은 갈색 머리의 두 남녀는 상당히 닮은 모습이었다.
분위기도 그렇고 아마 남매인 거 같은데 혹시 원작에 등장한 캐릭터인가 했으나 딱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스테판이란 이름도 처음 듣고.
“일단 서로 소개부터 해야겠지. 이쪽이 내가 말했던 아르센 뤼팽이라네.”
“반갑습니다. 부디 뤼팽이라 불러주시길.”
“이쪽은 하인즈 남매. 오빠가 스테판이고 여동생이 스텔라.”
남자는 밝게 미소 짓는 데 반해 여자는 차분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스테판 하인즈라고 합니다.”
“스텔라 하인즈예요.”
어쩐지 익숙하게 들리는 이름. 나는 잠시 기억을 떠올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케이틀린 하인즈가···.”
“어! 저희 어머니를 아시나요?”
그럼 알다마다.
원작에서 매우 강렬한 포스를 내뿜는 캐릭터로서 작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집행자다.
그런데 설마 이 남매가 그녀의 자식들이라니.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관계도에 살짝 놀랐으나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고 귀동냥으로 그분의 얘기를 들은 게 전부입니다.”
“뤼팽. 자네보다 한참 어린 핏덩이들이니 편하게 말해도 괜찮네.”
확실히 둘 다 나이가 어려 보이긴 한데 그래봤자 나랑 비슷한 나이대가 아닐까 싶다.
“네. 길버트 님 말씀대로 편하게 얘기해주세요.”
“흠. 그럼 사양하지 않도록 하지. 고맙네.”
일단 다들 자리에 앉아서 메뉴 주문부터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벼운 주제의 잡담이 오갔다.
“길버트 님께 얘기는 들었어요. 이번에 재단을 설립해서 운영하신다고.”
“그 말대로일세.”
“정말 대단하신 거 같아요! 세계 평화가 꿈이라니!”
“하하···.”
뭔가 분위기가 묘하네.
두 사람이 나름대로 집안이 받쳐준다는 건 인정한다.
정확히는 몰라도 케이틀린의 이름값 하나만으로 충분히 차고 넘치는 수준이겠지.
하지만 그와 별개로 두 사람 자체가 딱히 내 목적에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길버트의 말대로 아직 어린 핏덩이들 아닌가?
집안 신분과 관계없이 번듯한 뭔가가 존재하기엔 너무나 어린 나이다.
딱 보니까 오빠인 스테판은 4차원 철부지 도련님에 여동생인 스텔라는 새침하고 도도한 귀족 영애 스타일이다.
즉 사업과는 아무리 봐도 거리가 먼 캐릭터들이다.
아니면 정말로 순수하게 상류층과의 인맥을 쌓는 것에만 집중한 건가? 그렇다면 길버트에게 조금 실망할 것 같은데.
물론 그런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진 않으며 시종일관 입가엔 미소를 유지했다.
그와 별개로 식당의 수준은 과연 엄청났다. 지금이 19세기가 맞나 싶을 만큼 현대에도 먹어보지 못한 다채로운 고급 요리가 테이블에 연이어서 올라왔으니.
그렇다고 너무 호들갑을 떨지는 않고서 최대한 점잖게 체통을 지키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확실히 요즘은 세상이 너무 급격히 바뀐다는 게 실감이 되더군.”
“그렇지. 하루가 바뀔수록 새로운 문물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내가 전장에서 뛸 때만 해도 철 덩어리는 전쟁에서만 쓰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길버트의 푸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상대해주었다.
“너희는 좋겠구나. 아직 어리니 그런 걸 딱히 느낄 리도 없을 테고.”
“그건 아니에요. 저희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자주 있는걸요.”
“그러냐? 예를 들면?”
스테판은 잠시 턱을 짚으며 고심하던 도중.
“음···.”
“괴도 레이븐.”
“오! 맞아 내가 말하려던 게 그거였어!”
옆에서 조용히 있던 스텔라의 대답에 그 역시 동조했다.
설마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흠. 그래. 그 녀석이 있었군.”
“그런데 요즘은 좀 잠잠하더라고요.”
“너무 관심이 쏠리니 잠시 몸을 사리는 거겠지. 그런 녀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못 참고 활동을 재개할 거다.”
안타깝지만 딱히 몸을 사린 적도 없이 계속 활동하고 있다.
단지 누군가의 소행으로 그런 사실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고 있을 뿐.
그래. 당신 가문의 가주가 범인이라고.
“세상이 참 말세로군. 빠르게 변하는 건 좋지만 그러면서 정작 중요한 게 사라지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해.”
그 말은 지금 시대로부터 100년이 넘게 흘러도 똑같이 나오더라.
물론 어느 정도 공감하긴 한다. 기술과 문명이 발전할수록 기존의 시대적 가치관도 완전히 변해버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네의 꿈은 아주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네. 누군가는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움직여도 괜찮지 않겠나.”
“그렇게 얘기해주니 나야 고맙군.”
느낌이 왔다. 드디어 상대가 본론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강한 직감이.
“오늘 이 자리에 두 친구를 왜 초대했는지 꽤 의아할 거야.”
“확실히 부정은 못 하겠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가 이 둘의 후원자가 돼볼 생각은 없나?”
뜻밖의 제안에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후원자? 정확히 무슨 뜻인가?”
“더 정확히 말하면 컨설팅을 맡는 거지.”
컨설팅이라. 일단 확실한 건 내가 생각했던 밑그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단순히 일반적인 사회 재단 즉 사정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 치중하려던 내 계획과 달리 길버트의 제안은 좀 더 귀족 친화적인 재단으로 방향을 잡으면 어떻겠냐는 뜻으로 들렸다.
“흠. 굳이 내가 나선다고 큰 도움이 되겠나? 오히려 나는 귀족 사회 전반에 대해 상당히 어둡네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아까도 말했듯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는 결국 신분보다 돈이 더 중요해지겠지. 그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상식이니까.”
그의 말은 사실이다. 런던을 비롯해 점점 도시는 거대해지며 사람들을 몰려들어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고 있다. 거대한 자본이 밀집되며 규모가 더더욱 커지는 자본의 인플레이션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급격하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네는 출신과 별개로 황금에는 일가견이 있으니 그야말로 격변하는 이 시대에 가장 안성맞춤인 선생과도 같지.”
“흠···.”
조금 고민해볼 필요는 있겠지만 꽤 솔깃하게 들리는 제안이긴 했다.
그리고 그의 제안을 승낙한다고 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선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니까.
둘 다 동시에 하면 되잖아?
“알겠네. 한번 해보도록 하지.”
“하하. 자네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그 대신 자네에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사실 지금 당장은 이게 더 중요했다.
그레이스의 함정을 피하기 위해.
그레이스의 도움을 빌린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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