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6
“오늘도 스터디 하는 거 맞지?”
수업을 마치자마자 언제 졸았냐는 듯 순식간에 쌩쌩해진 레이첼.
내 생각엔 굳이 스터디를 할 시간에 차라리 수업 시간에 집중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물론 본인이 졸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닐 테니까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번엔 너네 집으로 가자.”
“굳이? 그냥 도서관에서 하면 되잖아.”
그녀는 한번 본인의 집에서 모인 뒤로 계속해서 다른 집에도 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본인만 당할 수 없다는 마인드가 너무 대놓고 보인다고 해야 하나.
한창 장소를 어디로 할지 얘기하던 와중 율리아가 멋쩍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미안. 나는 오늘 아무래도 힘들 거 같아.”
“어?”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눈살을 찌푸리는 레이첼.
“안 되는데. 네가 없이 우리끼리 모여서 뭐 해.”
어라. 반응이 꽤 의외네.
설마 레이첼이 이만큼 솔직하게 아쉬워할 줄은 몰랐는데.
“사실상 네가 우리 과외 해주는 건데 빠지면 누구한테 모르는 문제 물어보냐고.”
“···그런 이유에서였냐.”
“샤론한테 물어보면 되지.”
적어도 이론에 한해서는 율리아와 비슷한 수준의 샤론.
반면 실전에선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그녀의 개성 마법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으니.
“쟤는 말주변이 없어서 제대로 설명을 못 한단 말이야.”
“내가 보기엔 그냥 네가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내 지적에 레이첼은 눈을 찌푸리며 옆구리를 쿡쿡 찔러왔다.
“어이. 요즘 내가 상냥하게 대해주니까 만만해? 막 기어오른다?”
“농담이야. 농담.”
그런데 그녀가 요즘 상냥하게 대해준 것은 맞다. 예전 모습과 비교하면 딴사람이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 그게 싫다는 건 아니지만 괴리감이 워낙 커서 조금 어색하달까.
갑자기 변하게 된 시점은 드라칸의 세뇌를 풀었을 때였나.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청초함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모습과 반반 섞인 느낌? 이렇게 생각하니까 딱 지금이 제일 적당하고 좋은 것 같기도 하네.
“그래서 조장님은 무슨 일로 빠지시는데? 평소엔 누구보다 열심히 참석했으면서.”
“그냥···. 집안에 볼일이 생겼거든. 오늘 하루만 빠지면 괜찮을 거야. 아마도.”
“그럼 어쩔 수 없지. 이 언니가 이번만 넘어 가줄게.”
집안 볼일이라.
자세한 내용은 밝히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굳게 느껴졌다.
역시 아까 표정이 어두웠던 것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샤론. 너는 괜찮지?”
“응.”
“오케이. 그럼 셋이서 가자고. 오늘은 샤론네 집으로 갈까.”
“그건 안 돼.”
조금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단호박의 의지에 레이첼도 순순히 포기하고 말았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너네 집으로 가는 수밖에.”
“그냥 도서관에서 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야?”
“응. 없는데?”
“···에휴. 그래. 가자.”
그래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집에 딱히 수상한 물건을 놔두지도 않았으니까.
어차피 이미 저번에 조별 과제를 준비하면서 한번 가기도 했었고.
***
“아 진짜 더럽게 어렵네.”
“동감이야.”
솔직히 말하겠다. 아무리 집중해서 책을 읽어도 이해 안 되는 내용이 훨씬 많았다.
애초에 나는 마법을 차근차근 기초부터 배워온 것이 아니었다.
그냥 대뜸 엑스트라 캐릭터에 빙의되어 여신님의 도움 아래 비정석으로 쌓아왔으니까.
이미 학기가 시작된 지 몇 개월이 지난 시점 수업 진도가 상당히 나간 상황에서 뒤늦게 따라잡으려 해도 쉽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 이번 시험은 깔끔하게 놔줘야 하나?”
“벌써 일주일도 안 남았긴 하지.”
“아아! 그래도 꼴등은 안 되는데. 성적 잘 받아야 장학금 계속 받는다고!”
아니 나는 그런 얘기 한 번도 안 했거든?
왜 네 멋대로 그런 조건을 추가하는 거야.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너희도 장학금 신청했다며. 어떻게 됐어?”
레이첼의 질문에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떨어졌어.”
“진심? 왜?”
“왜긴. 그냥 조건이 안 맞았던 거겠지.”
내가 괜히 장학금을 받다간 나중에 조사 같은 게 들어왔을 때 괜히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아예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 가차 없이 떨어트렸다. 신청서도 진작 소각시켜버렸고.
“샤론은?”
“아직 안 나왔어.”
“아직도? 나는 하루 만에 바로 나오던데.”
“내가 직접 사무실에 찾아가서 듣겠다고 했거든.”
“언제 가는데?”
“내일.”
아 그게 내일이었나? 너무 바쁘게 지내느라 깜빡 잊고 있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이번엔 굳이 복잡하게 준비할 필요도 없이 그냥 내가 변장해서 적당히 상대해주면 되겠지.
심사 자체는 며칠 전에 끝내놨으니 결과만 통보해주면 된다.
당연히 친구라고 특혜를 주거나 하지 않고 기준에 따라 공정하게 심사했다.
“잠깐 쉬자.”
“또? 분명 30분 전에도···.”
“거기까지. 그냥 쉬어.”
그래. 본인이 쉬고 싶다는데 뭐 어쩌겠어.
우리는 책에서 눈을 떼고 잠깐의 휴식 타임을 가졌다.
온몸이 찌뿌둥한 것이 공부란 것도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런데 샤론은 여태껏 군말 하나 없이 묵묵히 집중하며 공부하는 게 신기할 정도.
저런 집중력이 있어야 천재 탐정이 될 수 있는 건가?
물론 그녀가 탐정이란 증거는 아직 없지만.
“하 그냥 이론은 던질까.”
“지금 너 그 소리 몇 번째인 줄 알아?”
“아니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진지하게. 솔직히 내가 이론 타입은 아니잖아?”
그걸 알고 있긴 하구나. 확실히 레이첼은 이론보다는 실전에 강한 타입이다.
단순 전투력으로만 따지면 주인공 일행 중에서도 내로라하는 수준.
그야말로 압도적인 화력과 파괴력으로 밀어붙이는 느낌이랄까. 가장 단순하면서도 상대할 때는 무엇보다 까다로운 개성이었다.
“실전에 올인하겠다고?”
“솔직히 그게 더 승산 있긴 하잖아.”
아카데미는 평범한 학교가 아니다 보니 단순 이론시험뿐 아니라 실기도 같이 진행된다.
어쩌면 레이첼의 말대로 어설프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하기보단 차라리 선택과 집중으로 하나는 깔끔히 포기하고 다른 쪽에 전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런데 그럴 거면 진작 했어야지. 지금 와서?”
“···하 씨. 어떻게 하지.”
전략을 바꾸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 아닐까.
지금 와서 실기를 준비하려 해봤자 며칠 만에 뚜렷하게 바뀌는 것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이번 시험은 약점을 보완하는 느낌으로 가는 게 어때? 이론은 벼락치기로 메꾸고 실기는 원래 자신 있으니까 적당히 선방하는 거지.”
“오···. 꽤 그럴듯한데?”
내 작전이 솔깃하게 들리는지 눈을 반짝이는 레이첼.
사실 겉 포장만 번지르르할 뿐 쉽게 번역하면 찡찡대지 말고 이대로 공부나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그럼 제법 쉬었으니까 슬슬 다시 시작할까.”
“윽. 공부하기 싫다···.”
“시험 때까지만 참아.”
사실 시험이 끝나도 며칠만 실컷 놀다가 다시 기말시험을 준비해야겠지만.
그 뒤로는 여름방학이고 2학기가 시작되면 똑같은 사이클이 반복되겠지.
그렇게 졸업 때까지 버티면 된다. 물론 그걸로 끝이 아니라 또 이후가 끝없이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그게 바로 인생 아닐까?
갑자기 현타 오네. 역시 나는 괴도가 아니면 다른 삶은 상상도 못 하겠다.
어느덧 창밖의 풍경이 깜깜해질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공부에 매진했다.
“으으! 진짜 더는 못해! 오늘은 여기서 끝!”
“공부하느라 수고했어.”
“진짜 머리에서 열이 나는데 이거 큰일인 거 아니야?”
뽀얀 이마를 까면서 내게 들이대는 레이첼. 적극적인 돌진에 나도 모르게 살짝 몸을 뒤로 뺐다가 조심스레 손으로 온도를 재 주었다.
“음. 멀쩡한데.”
“···알았으니까 손 치워. 변태.”
“아니 네가 들이대 놓고 왜 나한테 변태래?”
“흥. 시끄러워.”
어이가 없네.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은 마음에 샤론을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좋으면서 애써 부정하지 말거라.]
세상에 내 편이 아무도 없구나. 정말로 착잡하고 통탄할 일이다.
“밖이 시끄러워.”
대뜸 샤론이 꺼낸 얘기에 우리도 따라서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말대로 꽤 어수선한 바깥 소음. 원래 집 앞 거리는 한적한 편이라 이런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났나? 의문을 품음과 동시에 밖에서 분명하게 들려오는 소리.
“특종입니다! 특종이에요!!”
“···특종?”
레이첼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며 나는 원인을 깨달았다.
“지금은 신문이 나올 타임이 아닌데.”
보통 신문 배달은 새벽과 이른 아침에 하는 게 정설이다.
이런 늦은 저녁 시간대에 신문이 나온다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급히 알려져야 할 특종이란 뜻이기도 했다.
“내가 나가서 한 부 받아올게.”
“뭐 그러던가. 무슨 내용일지 궁금하긴 하네.”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 거리에 있던 신문 배달부에게 특종 신문을 받아왔다.
가장 앞면에 대서특필로 적혀 있는 내용은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괴도 레이븐 궁전을 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특종이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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