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7
“그래서 확인해봤나?”
“네.”
가젯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레이스 가문이 인정했습니다.”
익명으로 보내진 편지의 가장 밑에 적혀 있던 한 문장.
그레이스가 정보를 제공했다.
그와 함께 그레이스 가문의 인장 역시 찍혀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경찰 측은 즉시 그레이스 가문에 이 편지의 진위를 밝혀달라 요청했다.
돌아온 답신은 이러했다.
‘확인한 결과 인장은 위조되지 않은 진품이 맞다.’
즉 정말로 그레이스가 정보를 제공했다는 뜻이었다.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군.”
분명 괴도의 정보를 밝히지 말라고 명령해놓고선 대뜸 본인이 이 사실을 알린다니.
“그레이스 경이 아닌 다른 일원이 아닐까요?”
“그건 말이 안 돼. 누구든 그레이스의 인장을 사용하려면 결국 가주의 용인을 받아야 할 테니까.”
만약 그러지 않고 독단으로 행동한 거라면 과장 보태서 가주에게 하극상을 일으키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다.
“설령 다른 그레이스가 주도한 거라 해도 결국 그 뒤엔 가주의 입김이 작용했겠지.”
“···왜 굳이 번거롭게 이런 짓을 했을까요?”
“글쎄다. 우리를 대놓고 욕 먹이고 싶었던 건가.”
지금 이 기사가 공개된다면 당연히 비난의 화살은 전부 경찰들에게 쏠릴 것이다.
청장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자신에게 압박을 줬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해서 공격해대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자신들에게 명령한 그 내용을 가지고서.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저희를 발판 삼아 본인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계획이라던가.”
“뭐든 간에 우리가 이용당한 건 확실해 보이는군.”
허탈함에 쓴웃음을 머금으며 청장은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차라리 정식으로 그레이스에 항의라도 한다거나···.”
“당장 화가 난다고 그랬다간 진짜로 죽는 거야. 그냥 숨죽이고 견뎌야지.”
“···그럼 특별한 대응은 없는 겁니까?”
“어쩔 수 없다.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진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나아.”
아무리 나라의 영웅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일개 개인이 공권력을 상대로 이런 파렴치한 짓을 벌이다니.
가젯은 눈을 찌푸리며 분노를 애써 눌러 삼켰다.
이것이 모두 괴도의 음모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서.
***
“이게 뭔 개소리야? 경찰들이 일부러 숨겼다는 거야?”
“······.”
신문을 읽은 레이첼은 화를 터뜨렸으며 샤론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이거 미친놈들이네. 어떻게 이런 중요한 정보를 은폐할 생각을 했지?”
“레이첼. 일단 진정해.”
“아니 말이 안 되잖아! 결국 언젠가 밝혀지면 후폭풍이 올 걸 모른다고?”
그녀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아마 다른 시민들도 전부 레이첼과 비슷한 생각이겠지.
이런 분노는 자연스레 다음 생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레이스 아니었으면 진짜 어쩔 뻔했냐.”
레이첼은 투덜거리면서 정확히 내가 예상한 반응을 보였다.
“역시 괜히 영웅이라 불리는 게 아니라니까? 그냥 입 싹 닫고 넘길 수 있던 걸 사람들을 위해서 총대 메고서 전부 밝힌 거잖아.”
계획이 잘 먹혀든 느낌이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레이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이게 유일했다.
판을 훨씬 넓혀 상대도 쉽사리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
이번 특종을 통해 여론은 급격하게 바뀔 것이다. 사람들의 분노는 내가 아닌 경찰들에게 향하고 그 반작용으로 그레이스를 향한 호감도는 쭉쭉 올라가겠지.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이 지나치게 몰린 이상 설령 그레이스라 하더라도 쉽게 움직일 수는 없다. 특히 정보 제공자가 거짓이었다는 걸 밝히면 여론이 뒤집힐 수도 있으니 딱히 부정하지도 못하리라.
거기에 더해 이런 흐름이 굳어지면 서로가 상부상조하는 그림이 되어버린다.
즉 악당인 내가 있으므로 영웅인 그레이스가 더욱 빛나게 되는 것이다. 상대 역시 이런 구도를 억지로 깨부수기보단 차라리 이용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리겠지.
중요한 건 상대가 짜두던 밑그림이 완전히 지워지며 내가 주도하는 흐름으로 변해버렸다는 것. 이제부터 판의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나였다.
“그나저나 괴도도 미친놈이네. 설마 궁전을 털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때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샤론이 얘기를 꺼냈다.
“뭔가 이상해.”
그 불길한 말에 나는 괜히 바짝 긴장한 채로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레이븐이 궁전을 습격한 지 이미 며칠이 지났는데도 지금껏 조용했다는 건 단순히 경찰만 숨긴다고 가능한 수준이 아니니까.”
샤론의 지적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피해를 본 왕실과 정부도 그 사실을 묵인했을 확률이 높아. 즉 의회 소속인 그레이스도 알고 있었겠지.”
과연 날카로운 추리였다. 레이첼 역시 그 얘기를 듣고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알고 있었으니까 내부고발 한 거 아니야?”
“그런 거였으면 경찰보다 왕실을 저격했겠지.”
“어? 왕실은 왜?”
“당장 지금 상황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경찰들보다 왕실이 더 수상해야 정상이니까. 본인들이 피해를 봤는데도 숨기고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음···. 그러게.”
처음에는 반대 의견을 내놓던 레이첼은 점점 의견에 동조하며 서서히 납득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사에선 콕 집어 경찰들만 저격하고 있잖아. 마치 뭔가 의도가 있다는 것처럼.”
“무슨 의도랄 게 있을 수가 있나?”
“그거야 생각하기 나름이지. 예를 들어 전부 누군가의 설계라던가.”
뜨끔하게 된다. 신문을 보자마자 저 정도까지 추리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그래도 아직 이 사건에 괴도가 관여되어 있다는 것까지는 미치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알고 있는데도 얘기를 꺼내지 않고 있는 건가?
분명 아까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별달리 말도 없이 묵묵히 있던 애가 갑자기 탐정이 되어서는 이렇게 말이 많아지니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심지어 처음엔 내가 원하던 반응을 보이던 레이첼도 어느새 샤론에게 완전히 설득되어 의문을 품게 되어버렸지 않은가.
이런 위험한 여자 같으니라고.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셜록이 분명했다.
[후후. 과연 어떨까.]
‘여신님은 알려주실 거 아니면 그냥 조용히 계세요.’
괜히 옆에서 얄밉게 팝콘이나 뜯지 말고.
“야. 네가 보기엔 어떤 거 같냐?”
“어? 나?”
“그래. 아까부터 말도 없이 조용히 있더만.”
갑작스레 내게 날아온 화살에 멈칫하며 어떻게 대답할지 망설였다.
여기서 괜히 잘못 대답했다가 샤론에게 의심의 여지를 주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물론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저번에 장학금 심사를 빌미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안심하기엔 어딘가 찝찝한 결말이었단 말이지.
“글쎄. 확실히 이상하긴 해도 아직 단정 짓기엔 좀 이르지 않을까?”
“그렇긴 하지. 결국 지금 나온 거라곤 기사 하나가 전부니까.”
어차피 기사야 시간만 지나면 쏟아진다. 내가 익명으로 제보한 신문사를 제외하고도 이런 특종을 놓칠 리 만무하니까.
물론 지금이야 이게 사실인지 눈치를 보면서 몸을 사리겠지만 경찰 측에선 시간이 지나도 정정 보도를 내지 않을 확률이 높다. 차라리 아무 입장도 내놓지 않고 무반응으로 일관하겠지.
그러면 다른 신문사도 이게 진짜란 걸 깨닫고 허겁지겁 대세에 편승해 추가 기사를 마구 쏟아내리라. 그때 가면 되돌리고 싶어도 이미 전 국민이 모두 알게 된 후일 것이다.
우리는 그 뒤로도 신문에 관해 여러 얘기를 나눴다. 사실 이번 특종에서 유의해야 할 내용은 그런 음모론이 아닌 괴도의 행적 자체였다.
무려 궁전을 털었다는 건 이전 어느 사건과 비교해도 훨씬 중대한 문제였으니까.
물론 그 속을 파고들면 평소엔 아무도 없는 빈 별궁을 털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공주와 괴도가 마주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 신문에는 빅토리아 공주가 괴도와 마주쳤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다행히 그 내막의 인질극은 기사에서 빼버렸지만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되기엔 충분했다.
“공주는 대체 왜 별궁에 있던 거래?”
“그러게. 자세한 내용이 안 나와 있으니 알 방법이 없네.”
사실 내가 괴도라서 내용은 다 아는데 말이지.
그런데도 잘 모르겠다. 공주님이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러는 건지 나도 전혀 감이 안 잡힌다.
어쩌면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은 다름 아닌 공주님이 아닐까.
“아 신문 보느라 너무 늦었네. 언니 혼자 찡찡대고 있겠다.”
“···언니 취급이 너무 야박한 거 아니야?”
“언니 노릇을 해야 대우를 해주지.”
레이첼의 말에 뭐라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비록 실제로 본 건 두 번밖에 되지 않으나 확실히 그렇게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느낌을 받았으니까.
“이제 슬슬 가야지. 샤론 너도 집에 갈 거지?”
“나는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응? 이 늦은 시간에 어딜?”
샤론은 덤덤한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비밀이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은 아주 기분이 좋은 날이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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