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8
다음날이 되자 소문은 전역에 퍼졌다.
괴도가 궁을 털었단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아카데미 내에서도 그 주제로 떠들썩한 의견이 오고 갔다.
특히 계속해서 실패만을 반복하는 경찰들을 향한 부정적인 여론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이 눈에 보일 정도.
‘음···. 솔직히 이 정도를 원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죠.’
예상보다 너무 효과가 좋아서 괜히 미안해질 정도인데.
특히 가젯 형사 누님에게 상당히 죄책감이 들었다. 평소에도 내가 괴롭히고 있는데 의도치 않게 이런 골칫거리도 떠넘겨줘 버리게 될 줄이야.
“뭔가 낭만적이지 않아?”
“어떤 점이?”
“괴도가 궁전을 털다가 공주님을 만난다는 거!”
“글쎄···. 오히려 식겁할 상황 아니야? 왕족이 범죄자와 맞닥뜨린 건데.”
“평범한 범죄자가 아니잖아! 괴도가 사람을 해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둘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나눴을지 궁금하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수다 소리에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진짜 의외인 점이 생각보다 나를 향한 여론은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거다.
물론 싫어하는 사람은 철천지원수처럼 증오하긴 한다. 감히 어떻게 좀도둑 나부랭이가 위대한 버킹엄 궁전을 털 수 있냐며 길길이 날뛰는 할아버지도 목격했다.
그런데 막상 크게 관심 없거나 오히려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분명 있었다.
아무래도 왕실을 향한 충성심 자체가 많이 사그라든 탓이 없잖아 있는 듯했다. 결국 이것도 시대가 변하는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는 거겠지.
사실 그것보다 더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나는 힐끔힐끔 저 건너편에 있는 소녀의 모습을 기웃거리며 살폈다.
어제저녁 우리 집에서의 스터디를 마치고 어딘가로 향했던 샤론.
대체 어디를 갔던 걸까? 눈치를 보아하니 분명 어제 들은 특종과 관련 있어 보이긴 하는데.
가장 그럴듯한 추측은 경찰서로 향해 가젯과 만났다는 것.
두 사람은 함께 나를 잡기 위해 힘을 합치면서 자연스레 친해진 듯 보였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고 가젯을 만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추측도 어디까지나 그녀가 셜록이 맞다는 가정하에 의미가 있다. 둘이 다른 사람이라면 애초에 가젯과는 연결점조차 생기지 않는 셈이니까.
사실 지금 와서는 그냥 속 편하게 동일 인물이라 취급해버리고 싶다.
어차피 대놓고 맞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당장 밝혀낼 방법도 애매하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움직이는 편이 훨씬 안전하지 않겠는가.
“제대로 난리네.”
턱을 괸 채로 멍하니 있던 레이첼이 대뜸 얘기했다.
아마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옆에서 나누던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
“그러게. 하긴 오랜만에 나온 괴도 소식이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같이 브리튼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괴도 레이븐이 갑자기 언급이 뚝 끊긴 후 꽤 오랫동안 잊혀졌으니 사람들도 전부 궁금했었겠지.
“그런데 왜 평소와 달리 가장 시끄러워야 할 사람이 보이질 않을까.”
“아직 오지도 않았어. 슬슬 수업 시간 다 되어가는데.”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일찍 등교하는 율리아가 아직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니. 레이첼이 말한 대로 괴도의 소식으로 가장 흥분해야 할 사람이 바로 율리아인데 말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뭘 또 그렇게까지. 그냥 늦잠 자서 후다닥 달려오고 있겠지.”
내 걱정에 대수롭지 않게 추측을 내놓는 레이첼.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겠지?
나도 가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레이첼이야 굳이 말할 것도 없이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녀석이고.
“엉? 방금 뭐랬냐?”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씁. 뭔가 수상한데.”
뭐야? 개성 마법으로 독심술을 익히기라도 한 거야?
분명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는데 곧바로 눈치채는 모습에 순간 식겁했다.
그냥 감으로 때려 맞춘 거라면 그게 더 대단하다. 거의 짐승이나 다름없는 직감을 지니고 있다는 거니까.
우리의 예상과 달리 율리아는 종이 울리고 나서도 반에 나타나지 않았다. 비어있는 자리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와중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 조례가 시작되었다.
“참 그리고 율리아는 몸이 안 좋아서 오늘 하루 쉰다고 하더구나.”
마지막에 깜빡했다는 듯 덧붙인 얘기로 그녀가 결석한 이유를 겨우 알 수 있었다.
레이첼은 살짝 탄식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흠. 조금 의외네. 어제만 해도 멀쩡했던 애가.”
“그러게···.”
“난 솔직히 아파서 빠진다면 당연히 샤론일 줄 알았는데.”
아무 맥락도 없는 뜬금없는 말에도 나름대로 공감이 되는 것은 왜일까?
확실히 그런 느낌이 있긴 하지. 율리아는 언제나 쾌활하고 밝다 보니 건강해 보이고 반면 샤론은 무뚝뚝한 얼음 공주 스타일이라 왠지 병약할 것 같다는 고정관념이 있달까.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아카데미의 하루.
수업 시간에 최대한 집중해서 들으며 내용을 머릿속에 심어두려 애썼다.
이제 중간시험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기에 벼락치기라도 할 필요가 있다. 목표로 정해둔 성적에 달성하려면 아직 턱도 없는 수준이니까.
쉬는 시간이 되어서는 자연스럽게 샤론에게 다가가서 얘기를 꺼냈다.
“어제 잘 들어갔어?”
“응.”
역시나 차갑고 도도한 대답.
그래도 벌써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제 비밀이란 얘기를 들었어도 한번 물어볼 수야 있는 거잖아? 친구로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슬쩍 질문을 투척했다.
“그래서 어디 인지는 안 알려줄 생각?”
“궁금해?”
“어? 그야 궁금하지···?”
“어째서?”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에 조금 당황해버렸다.
거기서 왜냐고 물어본다 한들. 그냥 딱히 특별한 이유 없이 궁금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대답했다.
“어 친구니까?”
“친구···.”
내 대답을 곱씹는 모습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마치 그런 대답이 의외라는 뉘앙스라 설마 나 혼자만 친구라고 생각했나 괜히 울적해지려 했다.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누군가.
“크로.”
손을 흔들며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이어드였다.
“아 레이어드. 무슨 일이야?”
“다음 수업 대련이잖아. 같이 하자고 제안하러 왔지.”
이 미친 싸움광 녀석 같으니라고.
이런 제안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이제는 지긋지긋한 수준이다.
역시 처음 단추를 잘못 끼운 게 문제였어. 괜히 주인공의 관심을 끌어버려서 이렇게 된 거잖아.
그런데 막상 돌이켜 보니까 내가 잘못한 게 맞나 싶다.
내가 한 거라곤 열심히 대련에 참여해서 아쉽게 진 것뿐인데. 본인이 멋대로 내가 봐줬다느니 이상한 착각에 빠져선 해명은 듣지도 않았었지.
이대로 계속 녀석한테 휘둘리다간 학년이 끝날 때까지 줄곧 이놈이랑만 대련하게 될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건 싫다. 원작의 주인공인 것과 별개로 칙칙한 남정네랑 맨날 얼굴을 맞대라니.
다른 건 몰라도 레이어드와의 대련은 피하고 싶다.
승부욕이 너무 심한 탓에 승패와 관련 없이 내가 너무 피곤해지니까.
그래. 나중에 더 거절하기 힘들어질 바엔 차라리 지금 단호하게 쳐내자.
“미안. 나는 오늘 다른 애랑 대련해 보려고.”
“···뭐?”
마치 믿기 힘든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것처럼 반응하는 주인공.
아니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사람이 어떻게 매번 똑같은 짝이랑만 어울리냐고.
“누구랑?”
나는 큰 고민 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내뱉었다.
“여기 있잖아.”
마침 바로 옆에 있던 샤론을 가리키자 녀석은 즉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만. 눈빛이 무서워.
하지만 샤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 응시하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뭔가 의도치 않게 갑자기 미묘한 대치전이 시작되었다.
원작에서 레이어드가 샤론과 엮이는 일은 거의 없다. 딱히 기억나는 장면이 없는 걸로 봐선 아예 없다고 확정지어도 무방하리라.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샤론이란 인물 자체가 작중에선 비중이 거의 없는 엑스트라에 불과했으니까. 말 그대로 주인공이 속한 반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잠깐 등장하는 정도일 뿐이다.
“이름이···. 샤론이었나?”
야. 암만 그래도 그건 좀 심했잖아.
아무리 접점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넘게 흘렀는데 이름부터 헷갈려버리면 어쩌자는 거냐고.
“응.”
“미안. 순간 헷갈렸네.”
샤론은 잠시 레이어드를 올려다보다 덤덤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나는 아예 모르니까.”
“······.”
이건 큰일이다.
레이어드가 먼저 미사일을 날려 도발했다지만 샤론은 그에 맞대응으로 핵폭탄을 투하해버린 격이었다.
둘 사이에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는데도 주변의 온도가 뚝 떨어진 느낌.
이대로 놔뒀다간 정말로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황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스 슬슬 수업 시작하겠네! 얘기는 이따 나누고 이만 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겠지···?”
거의 애원에 가까운 제안과 함께 슬쩍 레이어드를 잡아끌려 했지만 녀석의 다리는 바닥에 뿌리내린 듯 고정되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조용히 있던 레이어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이름을 모를 수도 있지.”
오. 그냥 넘어가 주려는 건가?
역시 주인공답게 대인배다운 배포를 보여주는구나.
“그러면 다시는 잊을 수 없게 해줄게. 다음 대련 때 붙어 보자고.”
좋아. 기대한 내가 멍청이지.
그렇게 내 마음대로 술술 풀릴 리가.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을 내뱉는 샤론.
“알았어.”
하하. 이젠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먼저 걸어오는 승부는 굳이 사양하지 않는 샤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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