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9
뜻밖의 전개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여태껏 샤론의 개성 마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으나 딱히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본인의 마법에 대해 밝혀지면 약점을 드러내는 꼴이니 보통 숨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대련 같은 상황에서 어떤 마법을 쓰는지 지켜보면 대략이나마 파악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샤론의 마법은 베일에 감춰진 수수께끼였다.
대련 때도 늘 일반 마법만을 사용하며 질 것 같으면 적당히 항복해버리며 진심으로 임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누가 보더라도 레이어드와의 마찰로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모습.
즉 바로 다음 수업인 대련에서 진심을 다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그녀의 개성 마법이 무엇인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샤론이 원작 주인공인 레이어드와 사이가 나빠지는 건 조금 불안하지만.
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히려 대련을 통해서 친해질지도 모르잖아?
정 안 된다 싶으면 내가 중간에서 최대한 조율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적당히 떨어트려 놓는 수밖에.
그렇게 쉬는 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대련실로 이동했다.
“오늘은 자유롭게 둘씩 짝을 지어 대련을 진행하겠다. 나는 전체적으로 둘러볼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손을 들고 부르도록.”
특별한 심판·감독 없이 자유 대련을 허락하는 선생님. 하긴 이미 대련을 시작한 지 몇 달이나 지났으니 굳이 선생님이 지켜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지 정도는 모두 익혔을 것이다.
나는 힐끗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역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샤론에게 다가가서 먼저 대련을 신청하는 레이어드. 누가 멀리서 보면 용감하게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뭐 하냐?”
그때 레이첼이 내 뺨을 쿡 찌르며 말을 걸었다.
“아니 그냥.”
“뭔데 그리 음흉하게 보고 있냐고. 설마 너···.”
또 이상한 소리를 주절거릴 게 뻔해서 사전에 차단하고자 녀석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괜히 사람 몰아가지 마시지?”
“웃기시네. 이젠 율리아에 이어서 샤론까지? 하다 하다 나한테까지 손대겠다?”
그런 내 저지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내뱉는 레이첼.
이쯤 되면 내가 그런 야망을 품고 있기를 원하는 것처럼 들릴 지경이다.
[음. 아주 바람직한 야망이로군.]
‘시끄러워요.’
그게 아니면 질투하는 건가?
내가 다른 여자한테 눈길을 주는 게 샘이 나서?
“음···.”
“뭐. 눈깔이라도 찔러줘?”
에휴. 이 녀석이 그럴 리가 있겠나.
아무리 전보다 순해졌다고 한들 결국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누구보다 험하고 거친 녀석이 설마 그런 여리여리한 마음씨를 품고 있을 리가.
차라리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걸 믿겠다.
[크로. 원래 해는 동쪽에서 뜬다.]
아 그랬었지.
저번에 길버트와 저녁을 먹으면서 들었던 말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스테판이었나?
잠시 뜬금없는 잡념에 잠겨있던 와중 레이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야. 지금 날 앞에 두고 멍때리는 거냐? 좀 기분 나쁜데.”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별거 아니었어.”
“됐고. 너 나랑 대련이나 하자.”
대련? 레이첼이 나랑?
이건 또 처음 듣는 제안이라 잠시 당황해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엔 맨날 그 재수 없는 놈이 선수 가로챘잖아. 오늘은 걔도 너한테 관심 없어 보이니까 나랑 하자고.”
확실히 그 말대로 대련 시간 때마다 레이어드는 무조건 나만 지목했었지.
덕분에 거의 전담 마크하는 수준으로 주인공과 일대일 대련을 마구 해버렸었다.
“음···.”
살짝 고민했다. 일단 제안 자체는 나쁜 게 아니었다.
중간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선 당연히 실전 역시 단련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레이첼 역시 주인공 못지않게 도움을 주기에 충분한 실력이기도 하고.
다만 문제가 있다면 레이어드와 샤론의 대련을 못 본다는 거다.
내 대련에 신경 쓰기도 벅찬데 그런 가운데서 상대의 대련까지 지켜본다는 건 불가능했다.
“오케이 한 거다?”
“어? 아니 나 아직 아무 말도···.”
“그럼 시작!”
막무가내로 나를 붙잡고서 대련 시작을 외쳐버린 레이첼.
나는 한숨을 쉬며 대련을 준비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최대한 빨리 대련을 끝내고서 둘의 대련을 보러 가는 것.
그래. 차라리 마침 잘 됐다.
최근에 보석을 흡수하면서 급격히 성장한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확인해보고 싶던 참이니까.
아무리 못해도 반에서 최소 세 손가락 안에는 들 레이첼.
그런 그녀를 꺾을 수 있다면 지금의 나는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자신감을 가져도 괜찮을 것이다.
당연히 쉽지는 않겠지만.
“솔직히 좀 궁금했거든. 네가 얼마나 잘 싸우면 그 칼쟁이가 너한테 그렇게까지 집착하는지.”
“그건 나도 궁금한데.”
대체 레이어드는 무슨 이유로 그딴 착각에 빠져 나한테 집착하는 걸까.
오히려 내가 제일 궁금하고 알고 싶은 심정이다.
“흥. 잘난 체하시겠다? 아무리 너라도 대련 때는 안 봐줘.”
대체 어떻게 해석하면 이걸 잘난 척으로 알아듣는 건데.
뭐라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전에 그녀의 선공으로 본격적인 대련이 시작되었다.
화르륵! 쾅!!
손에서 생겨난 불덩이가 허공을 날아 내게로 쏘아졌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가까스로 공격을 피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첼이 쏜 불덩이는 일반적인 화염 마법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그녀의 개성이 바로 화염 마법이니까. 모든 마법사가 기본 소양으로 사용하는 일반 마법과는 아예 격이 다른 수준이었다.
“제법이네? 그럼 어디 이것도 피해 봐!”
방금의 선공은 장난이었다는 듯 똑같은 화염 구체 5개가 동시에 생겨났다.
저건 단순히 몸을 움직여서 피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차례로 하나씩 날아드는 구체를 정확히 응시하며 마법을 사용했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채찍을 휘두르자 반으로 갈라져 곤두박질치는 화염 덩어리.
공격을 완벽히 방어해낸 다음에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기세를 몰아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내 적극적인 공세는 예측하지 못했던 건지 살짝 당황한 눈치의 레이첼.
역시 아직은 아카데미의 학생일 뿐이라 전투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찰싹!!
채찍은 그대로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응?”
눈을 질끈 감았던 레이첼이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였다.
예상했던 데미지가 전혀 들어오지 않은 탓이리라.
미안하게도 이 채찍은 생물에겐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한다. 내가 괜히 마술이 전투에선 꽝이라고 말한 게 아니다. 애초에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망설임 없이 휘둘렀을 리가.
나는 그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미녀한테는 봐주니까.”
“···뭐래! 이 미친 변태가!!”
아 순간 흥에 취해서 괴도처럼 말해버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씩씩대던 레이첼은 손을 내밀고는 화염 방사를 뿜었다.
윽. 이건 채찍으로 갈라낼 수도 없는데.
압도적인 화력 앞에 차마 반격할 생각도 못 하고 우선 몸을 뒤로 내뺐다.
그야말로 폭발한 화산처럼 불을 미친 듯이 내뿜는 레이첼.
저 거센 불길을 뚫고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이대로 계속 전투 구도를 질질 끌어봤자 내게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상대는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화력을 때려 부어 주변을 모두 태워버리는 화끈한 스타일이니까.
게다가 최대한 빨리 끝내야 내가 목표로 했던 둘의 전투를 지켜볼 수 있다.
“지금부턴 빠르게 갈게.”
“어디 한번 뚫고 와보시던지!”
더 세지는 불길.
이 정도 수준이면 선생님이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단순 대련치고는 너무 위험한 거 같은데.
살짝 옆을 보니 선생님은 말리긴커녕 오히려 이쪽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며 이번 승부를 결정지을 비장의 수를 준비했다.
좋아. 그럼 가볼까.
정면을 노려본 채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글거리는 화마 속으로 주저 없이 몸을 내던지고서.
온몸에 느껴지는 작열의 열기. 그렇지만 견딜만한 걸 보면 레이첼도 대련임을 잊지 않고 적당히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야 고맙지. 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선 누구도 내 모습을 볼 수 없다.
심지어 화염의 주인인 레이첼조차도.
따라서 나는 화염을 연막 삼아 아무도 모르게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내 승리네.”
“···뭐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어안이 벙벙해진 그녀.
분명 정면으로 달려오던 내가 왜 자신의 뒤쪽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건 레이첼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전투를 지켜보던 선생님조차 내 마법을 완전히 간파하지 못한 듯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텔레포트? 아니 그건···.”
학생의 수준에서 사용할 수 없는 최고위 마법.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금의 내가 사용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만 당장 방금의 대련에선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상당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뭔데!? 어떻게 한 거야!”
“네. 비밀이랍니다.”
허무하게 패배한 것이 상당히 분했는지 씩씩대던 그녀를 대충 달래주고서 곧바로 둘에게로 향했다.
아직 늦지 않았겠지?
하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겨나가고 말았다.
정확히 내가 온 타이밍에 맞춰서 전투의 승패가 갈려 있었으니.
“···졌다. 내 패배야.”
레이어드의 짓씹으며 내뱉은 패배 선언에 샤론은 덤덤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니 샤론이 이겼다고?
어떻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좋은 하루에용!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