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1
샤론이 나한테 관심이 있다니.
너무 뜬금없는 얘기라 제대로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일단 혹시 모르니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어쩌면 정말로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진지한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역시 허무맹랑한 거짓이라는 확신뿐이었다.
일단 무엇보다 근거가 너무 부족하다.
그냥 나를 노려보고 지나간 게 전부인데 그걸로 질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니.
차라리 샤론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거나 그냥 아무 생각 없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그럴듯했다.
“아니. 네가 착각한 걸 거야.”
“어휴···. 그래. 네 마음대로 생각하렴. 어차피 내가 관여할 문제도 아니고.”
다리아는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 내게 경고했다.
“대신 안 받아줄 거면 확실하게 해. 괜히 여지만 줘서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당연하지. 내가 바보도 아니고.”
“···바보 맞는 거 같은데.”
허튼소리. 나는 흔한 하렘물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다르다.
일편단심 순애보인 만큼 괜히 연애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어 남한테 상처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다리아의 말은 조금도 공감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일단 기억해두기로 했다.
만에 하나 정말로 샤론이 내게 관심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하게 결정을 내려야 하니까.
그녀와의 얘기를 끝낸 뒤 나는 뒤이어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레이어드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아 크로인가.”
내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
대련 결과로 충격을 많이 받은 건가? 그런 것치곤 대답은 멀쩡하게 잘하는 거 같은데.
“대련은 어땠어?”
“깔끔하게 져버렸지.”
의외로 레이어드는 덤덤한 모습을 보였다. 분명 결과에 수긍하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일 줄 알면 나한테도 좀 그렇게 해주면 안 됐던 거야?
왜 나랑 했던 대련에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폭주했던 거냐고.
“얘기를 들어보니까 계속 주도하고 있었다면서? 어떻게 진 거야?”
“어떻게 졌냐고 물어도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눈 떠보니 진 느낌이랄까.”
잠깐만. 아니면 설마 마음이 완전히 꺾여버린 건 아니겠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격차를 느끼고 포기해버린 건가?
아니 주인공이 그럴 성격은 아닌데.
“그래. 딱 너랑 싸웠을 때의 느낌이었어.”
“응? 나랑?”
“너도 처음 대련 때 갑자기 내 뒤에 나타났잖아. 그 뒤엔 네가 봐줘서 흐지부지 끝났지만.”
아니 봐준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대체 몇 번을 해명해야 내 진심을 이해해줄까. 이대로라면 아마 몇십 년이 지나도 계속 우려먹을 느낌이었다.
아무튼 녀석의 말 대로라면 내가 예상했던 내용과 거의 일치한 듯했다. 다만 원래 목표였던 샤론의 개성에 관해서는 딱히 얻은 수확이 없단 사실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만약 다시 싸운다면 어떨 거 같아?”
그냥 호기심에 던져본 마지막 질문에 레이어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다음엔 내가 이겨. 무조건.”
자신감이 넘치는 걸 보면 단순한 허풍은 아닌 것 같은데.
샤론의 마법을 파훼할 방법이라도 알아낸 건가?
“나 버리고 가버리더니 여기서 뭐 하냐?”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뾰로통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눈을 가늘게 뜬 채 이쪽을 노려보는 레이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곧이어 나와 옆에 있던 레이어드를 번갈아 바라보는 언짢음이 가득한 눈초리.
어째서일까? 바로 직전에 똑같은 일을 겪은 것만 같은 데자뷰가 든다.
“너희 게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깜짝 놀라서 소리치자 레이첼은 시끄럽다는 듯 귀를 후비며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아니. 남정네 둘이서 하하 호호 떠들고 있길래 혹시나 했지.”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마.”
“흥. 그거야 내 마음이거든? 너나 멋대로 참견하지 말란 말이야.”
이게 무슨 궤변일까.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어서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역으로 참견하지 말란 대답이 돌아오다니.
갑자기 훅 들어오는 그녀의 신경질에 괜히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나빠지려 한다.
그리곤 뒤도 안 돌아보고 휙 떠나버리는 레이첼.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혼란스럽던 와중 옆에 있던 레이어드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꽤 힘들겠구나. 그래도 저런 어리광 정도는 받아주라고.”
“어리광?”
“네가 관심을 안 주니까 삐진 거잖아.”
“···무슨 새끼 고양이도 아니고 그게 말이 돼?”
도저히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런 반응에 레이어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상당히 둔감한 녀석이구나.”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 그런 얘기를 듣고 싶진 않거든.”
내가 설마 이런 얘기를 이 녀석한테 들을 줄은 몰랐다.
“됐으니까 나중에 먼저 말 걸면 받아줄걸.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그래. 일단 알겠어.”
역시 데자뷰는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방금 펼쳐졌던 다리아-샤론 구도에서 인물만 바뀌고 완전히 똑같은 구도잖아.
샤론이랑 레이첼이면 성격이 전혀 다른데 어떻게 짜고 맞춘 것처럼 비슷한 반응이 나오지?
설마 누구라 할 것 없이 여자는 모두 똑같은 건가?
어찌어찌 대련 시간이 끝난 뒤에 다시 반으로 복귀했다.
문득 눈에 들어온 여전히 비어있는 율리아의 자리. 몸이 아프다고 했었지.
지금까지 안 온 걸 보면 오늘 하루는 아예 결석인 거 같은데 생각보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아니면 몸이 안 좋다는 건 그냥 핑계이고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걸지도.
만약 그런 거라면 분명히 어제의 고민과 연관이 있는 거겠지.
나는 바로 옆에 새침하게 앉아있던 레이첼에게 말을 걸었다.
“수업 끝나고 율리아 병문안이나 갈래?”
“···그러던지.”
확실히 말을 거니까 대답이 돌아오긴 하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샤론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얘기를 꺼내 보았다.
“샤론. 혹시 시간 괜찮으면 수업 마치고 율리아 병문안이나 갈래?”
“···응. 알았어.”
음. 사실 샤론은 평소랑 똑같아서 딱히 달라진 점을 모르겠다.
원래도 저렇게 무뚝뚝한 느낌으로 대답하는 타입이니까.
어쨌든 둘의 반응을 보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가벼운 해프닝에 불과했다는걸.
다리아나 레이어드의 말처럼 정말 두 사람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거라면 이렇게나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않은가.
아마도 대련을 막 끝내서 감정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던가 아니면 그냥 기분이 싱숭생숭했던 걸지도 모르지.
두 사람의 평소 행동으로 미루어 봤을 때 나한테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차라리 항상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와서 말을 거는 율리아라면 몰라도.
[쯧. 바보 같은 녀석.]
이젠 여신님의 리액션에도 대꾸해주지 않을 거다.
자꾸 내가 반응해주니 괜히 더 신나서 하렘을 외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니까.
“그런데 걔 집 주소는 아냐?”
“그거야 당연히 그레이스 저택이겠지.”
“확실해? 본가에서 독립했을 수도 있잖아.”
“음···.”
잠시 원작의 내용을 돌이켜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그 말대로 율리아는 작중에서 혼자 사는 것으로 등장한다. 문제는 그 내용이 중반부 이후라 지금 시점에선 정확하게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다는 것.
애초에 따로 나와서 살고 있다면 구체적인 집 주소가 어디인지를 알 방법이 있나? 원작에서 그런 정보가 상세하게 나오지도 않을 테고 설령 나왔다고 해봤자 내가 기억하고 있을 리도 없을 텐데.
그때 샤론이 조용하게 말했다.
“선생님께 물어보면 되잖아.”
“아. 그렇네.”
“어휴. 어떻게 그걸 생각을 못 하냐?”
“너도 못 했으면서.”
“왜 이렇게 오늘따라 얄밉지? 응?”
내 옆구리를 꼬집으며 눈을 부라리는 레이첼.
상상 이상의 고통에 나는 열렬히 저항했고 그런 우리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샤론까지.
평소 중재자 역할을 맡던 율리아가 사라지니 더 개판이 된 환상의 3인조.
아무튼 선생님께 사실대로 병문안을 위해서 주소를 알려달라고 말하면 될 것 같다.
우리는 결정을 내리자마자 즉시 교무실로 가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응? 율리아의 집?”
“네. 몸이 안 좋다길래 걱정돼서 병문안이나 가보려고요.”
“그건 알겠는데···. 너희끼리 그렇게 갈 생각이니?”
그 영문 모를 질문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물음표를 띄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 너희가 율리아랑 친했던 줄은 몰랐네.”
“······.”
뭔가 되게 안 좋은 의미로 들리는 건 어째서일까. 특히 선생님의 시선 중앙에 내가 떡하니 있는 건 단지 기분 탓에 불과한 걸까?
그래. 우리 셋은 아싸고 율리아는 인싸라 이거지?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한없이 슬플 뿐이다.
“알겠어. 마침 선생님도 걱정됐는데 너희가 가서 어떤지 좀 보고 오렴.”
다행히 선생님은 흔쾌히 율리아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지금 당장 출발하면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쪽지에 적혀있는 주소로 곧장 걸음을 옮겼다.
“여기···. 맞지?”
뭔가 이상한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뭐가 이상한 걸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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