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2
뭔가 이상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풍경.
으리으리한 대저택이나 고급스러운 별장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집은 그런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소담한 주택일 뿐이었다.
그래도 심각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당장 내가 사는 집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주택이니까. 본가에서 나와 학업에 열중하는 동안 혼자 살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수준이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이상함을 느낀 이유는 그레이스라는 이름값 때문이다.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힘센 귀족 가문.
특히 율리아는 상속권이 없을 뿐 직계와도 매우 가까운 중요 혈통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보다 더 좋은 취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치곤 지금 눈앞의 주택은 너무나 평범하게 보였다.
무엇보다 내 기억 속 원작에 등장했던 율리아의 집이 이보다 더 좋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물론 내 기억이 왜곡된 걸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집이 어땠었냐고 물어본다면 딱히 대답할 자신도 없으니까. 다만 왠지 모를 찜찜함이라고 할까. 이런 집은 아니었다는 느낌만 어렴풋이 맴돌았다.
“생각보다 평범하네.”
레이첼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는지 집의 외형을 둘러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집이 어떠냐는 딱히 중요한 게 아니긴 했다.
막말로 율리아의 집이 으리으리하다 해봤자 우리가 콩고물을 받는 것도 아니고.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굳이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정말 내 생각대로 원작과 달라진 거라면 내 영향 때문인 걸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 정도? 하지만 나 때문에 집이 달라질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으므로 그냥 착각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여기 계속 서 있지 말고 불러보자.”
한동안 집 앞에서 뻘쭘하게 서 있던 우리는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율리아? 안에 있어?”
만약 그녀가 정말로 몸이 안 좋아서 아카데미에 나오지 않은 거라면 당연히 집안에서 쉬고 있을 것이다.
즉 반대로 율리아가 나오지 않는다면 몸이 아프다는 건 핑계에 불과하며 다른 이유가 있을 확률이 올라가는 거겠지.
“···안 나오나?”
“좀 기다려. 자고 있던 걸지도 모르잖아.”
그 말대로 일단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하며 문을 조금 더 크게 두드렸다.
“율리아! 걱정돼서 다 같이 병문안 왔어!”
그리고 잠시 후.
안에서 질질 끄는 발소리와 함께 축 처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로···?”
“안에 있었구나. 몸은 좀 괜찮아? 레이첼이랑 샤론도 같이 왔어.”
“아 셋 다 와줬구나···.”
이거 진짜 몸이 안 좋은가 본데?
솔직히 나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목소리만 들어봐도 평소의 율리아가 아님은 확실해 보였다.
곧이어 문이 천천히 열리며 율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자마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그녀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반겼다.
“고마워. 안에 들어와.”
집 내부는 그녀의 성격을 대변하듯 잘 정돈되어 깔끔하면서도 아늑함을 주었다.
게다가 따스한 색채에서 은은히 느껴지는 그녀의 향기가 기분 좋게 풍겼다.
자연스레 우리를 테이블로 데려온 율리아는 차를 끓여 대접해주려 했다.
“그냥 쉬어도 되는데···.”
“아니야. 모처럼 와줬는데 차 한잔은 줘야지.”
괜히 걱정되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하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입꼬리는 화사하게 올리고 있지만 막상 눈 밑에는 거뭇한 다크서클이 뚜렷하게 보였다.
게다가 움직임도 평소처럼 통통 튀는 느낌이 아니라 질질 바닥을 끌며 힘겨워하는 게 대놓고 보인달까.
누가 보더라도 컨디션이 상당히 좋지 않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결국 우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는 모두에게 차와 간식거리를 대접해주었다.
“많이 안 좋아?”
“음. 그냥 몸살이 난 거 같아. 하루만 푹 쉬면 괜찮아질 거야.”
“어제는 멀쩡하더니 갑자기 왜 그랬대?”
레이첼의 질문에 그녀는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글쎄. 밤에 창문을 열고 잤었나?”
“병원에 가보지 않아도 괜찮아?”
심지어 거의 말수가 없는 샤론도 걱정을 드러냈다.
아마 그만큼 율리아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는 뜻이겠지.
“괜찮대도. 이렇게 일어나서 너희랑 얘기하니까 벌써 다 나은 느낌인데?”
“율리아.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침대에 누워있어. 우리는 괜찮으니까.”
“너희 셋 다 사람 말을 안 듣는구나?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하니.”
아무튼 직접 찾아와서 확인하니 정말로 몸이 안 좋아서 결석한 게 맞는 모양이다.
내가 너무 지나치게 생각했나?
애초에 가만 생각하면 그녀가 거짓말을 서슴없이 할 성격이 아닌데.
율리아가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집중해버려서 시야가 좁아졌던 모양이다.
이래서 탐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건가.
열심히 추리해봤자 결국 증거가 없으면 나 혼자의 망상으로 끝나버리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이 집은 처음 와보네.”
“집 청소를 못 해서···. 좀 더럽지?”
“이게 더러운 거면 우리 집은···. 어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레이첼.
내가 봤을 땐 그 집도 딱히 더러운 것은 아니다. 단지 그녀의 언니가 어수선하고 덤벙대는 성격이다 보니 괜히 주변 공간도 비슷하게 느껴질 뿐.
“모처럼 왔는데 집 구경 좀 해봐도 돼?”
“응···? 조금 부끄러운데···.”
뺨을 긁적이며 낯간지러워하는 율리아.
원래 같았으면 집주인의 마음을 존중해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겠지만 사실 이미 나는 물론 레이첼도 전부 똑같이 당한 전적이 있었다.
심지어 그때 주도했던 사람이 바로 그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본인도 똑같이 당하는 것쯤은 감수했다는 의미겠지. 그게 아니어도 구경할 생각이지만.
“그냥 깔끔하고 좋네.”
그 외의 딱히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 관심 분야가 음악이라서 그런지 악기가 곳곳에 있다는 걸 빼면 이렇다 할 게 전혀 없는 수준.
그래도 사생활 보호를 위해 안방은 빼고서 집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단출한 베란다에 떨어진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어? 여기 편지가 있네.”
실수로 떨어트리고 발견 못 한 건가? 율리아에게 알려주기 위해 편지를 집어 들면서 뜻하지 않게 겉봉에 적힌 날짜와 발신인을 확인하게 되었다.
날짜는 바로 어제.
그리고 발신인은 리처드 그레이스.
“······.”
리처드 그레이스.
이 이름을 설마 여기서 맞닥뜨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내용이지? 이 녀석이 무슨 이유로 율리아에게 편지를?
같은 가문 출신이니 연관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 어쩌면 특별한 내용이 담기지 않은 단순 안부 인사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넘기기엔 거슬리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율리아는 어제 이 편지를 받고서 오늘 아카데미를 나오지 않았다. 본인은 몸살이라 했고 실제로도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그 원인이 이 편지가 아니라고 안심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특히 타이밍이 너무 신경 쓰였다. 특종 기사가 나온 당일 그녀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일파만파 퍼져 대응하기도 바쁠 상황에서 갑자기 친족 손아랫사람에게 편지를?
나는 잠시 편지를 손에 쥐고서 엄청난 갈등에 휩싸였다.
이 편지의 내용을 읽어야 하나?
율리아를 도와주기 위해선 그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런 식의 도움을 과연 그녀가 기뻐할지 의문이 들었다.
이건 편지의 내용이 어떠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본인이 부탁하지도 않은 문제를 도와주겠답시고 허락하지도 않은 편지를 멋대로 읽어본다?
그 순간 이미 별개의 문제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다.
믿음과 신뢰가 깨져버려 최악의 경우엔 관계 자체도 무너질지 모른다.
당연히 율리아와 관계가 깨지는 건 원하지 않는다.
그건 원작의 내용 같은 것과 관계없이 이미 진심으로 좋아하는 친한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율리아가 녀석에게 이용당하거나 다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이유는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이유 속에서 나는 전혀 다른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사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쉬운 문제였다.
편지를 읽는다. 그리고 그녀를 구한다.
결국 내가 고민하던 내용도 편지를 읽었단 사실을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 없다.
여태 해왔던 것처럼 괴도나 뤼팽으로서 해결하면 된다. 율리아의 같은 반 친구인 크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면 그만이다.
떳떳하지 않은 일이란 건 나도 안다. 그래도 이렇게 해서 율리아를 도와줄 수 있다면 굳이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나는 정의의 히어로가 아니라 괴도니까.
밝은 빛 보단 어두운 그림자에 가까운 존재니까.
결론을 내렸으니 더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편지의 내용을 읽어내렸다.
‘친애하는 조카에게.’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집을 떠나 홀로 생활하며 학업에 충실히 임하는 귀여운 조카가 부디 잘 지내고 있는지 염려스럽구나.
네 아비에게 간간이 너의 소식을 듣지만 이렇게 편지로 직접 너에게 안부를 묻는 건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구나. 오늘 내가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때였다.
“거기서 뭐 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황급히 편지에서 눈을 뗐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샤론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들켜버렸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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