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3
침착하자.
전혀 허둥댈 필요 없다.
뒤돌아 등지고 있는 상태니 샤론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내 손에 편지가 들려있다는 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즉 내가 침착하게 대응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이 넘길 수 있다.
우선 편지를 숨겨야 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품속에 넣어 감춘 다음 뒤돌아 샤론을 마주 보았다.
“그냥 베란다 구경 중이었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반응.
지금 믿을 거라곤 여태까지의 변장으로 단련된 내 연기력뿐이었다.
샤론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읽기 힘든 오묘한 무표정.
그렇게 숨 막히는 침묵 속 대치가 이어지던 와중 그녀가 먼저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율리아가 직접 빵을 구웠다고 먹으러 오래.”
“빵을···?”
그 짧은 시간에 아픈 몸을 이끌고 빵을 만들었다고?
아니면 내가 그만큼 오래 고민했던 건가?
어쨌든 다행히 샤론은 별다른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한 느낌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바로 갈게.”
일단 어쩔 수 없다. 여기서 괜히 기다려달라며 시간을 끌었다간 더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편지를 읽는 건 나중으로 미루는 수밖에.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읽으면 되겠지.
그런데 먼저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계속 나를 쳐다보는 샤론.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자리를 피하려던 순간.
“집주인의 사생활은 지켜줘야 해.”
“······.”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단순히 집구경에 너무 몰두하지 말라는 가벼운 충고 같기도 했지만 동시에 율리아의 편지를 멋대로 읽으려던 내게 경고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으니까.
눈치를 챈 건가? 아니면 내가 너무 과민 반응하는 건가?
잠시 고민하다 똑같은 방법으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친구끼리 이 정도는 가능하잖아.”
“친구가 기분 나빠해도?”
“그러지 않을 거라 믿어. 친구를 위해서니까.”
만에 하나 율리아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도 내 선택은 똑같을 것이다.
그레이스 경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잘 알기 때문에.
그녀가 괜히 나 때문에 이번 사건에 휩쓸려 위험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럴 바엔 차라리 미움을 받는 편이 낫다.
어차피 원래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으니까.
어쩌다 가까워진 사이가 다시 원래의 흐름대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내 망설임 없는 대답에 샤론은 뻔뻔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집구경이 친구를 위한 거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얄밉네. 누가 보더라도 편지를 주제로 얘기한 건데 듣고 싶은 내용이 다 나왔다고 지금 와서 시치미를 떼겠다는 건가?
설마 이랬는데 진짜 순수하게 몰랐던 것뿐이고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건 아니겠지?
아무튼 우리는 잠깐의 대화를 어영부영 마무리 짓고 다시 율리아가 있던 거실 테이블로 돌아갔다.
“정말. 뭘 그렇게 열심히 구경하길래 이리 늦어?”
“하하. 그냥 어쩌다 보니?”
“우리 집에 볼 게 뭐 있다고. 부끄럽게···.”
율리아는 편지가 거기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아예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걸 언제 다시 읽어야 할까?
샤론이 눈치챘다고 가정하니 타이밍을 잡는 게 쉽지 않았다.
사실 아까 읽은 내용을 돌이켜보면 특별한 건 없었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친척 간의 안부 인사가 담겨있었을 뿐이었다. 그 뒤에 내가 염려한 주제가 나올 가능성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그대로 시답잖은 내용만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와 냄새 미쳤네.”
“조금만 기다려 줘. 거의 다 구웠으니까.”
오븐에서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빵 냄새.
나도 순간 복잡한 고민을 싹 잊고 맛있겠다는 생각만 가득해질 만큼 향기로웠다.
잠시 후 완성되어 테이블 위에 올려지는 노릇노릇 갓구운 빵.
“괜히 우리가 찾아와서 쉬지도 못하고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이 정도로 무리는 무슨. 오히려 찾아와줘서 고마운걸.”
사람이 이렇게까지 착할 수가 있나. 심지어 성격만 좋은 게 아니라 외모 성적 집안 등등까지 완벽하니. 그녀에게 부족한 걸 찾는 게 더 빠를 지경이다.
“이거 진짜 맛있다.”
“혹시 우리 언니한테 요리 좀 가르쳐줄래? 진짜 좀 배워야 해.”
“히히. 나중에 그렇게 하는 것도 재밌겠다.”
빵은 예상했던 대로 매우 맛있었다. 우리는 접시 위가 깨끗해질 때까지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다.
꽤 시간이 흘렀다. 이제 슬슬 율리아가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줘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편지를 읽어야 했다. 이걸 그대로 들고 가버릴 수는 없으니까.
더는 미뤄선 안 된다는 판단하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아 저기로 가면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로 향해 문을 잠갔다.
“후우···.”
이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 문을 잠가놨으니 샤론이 들어올 일도 없다.
그러니 아까 못다 읽은 편지의 이후 내용을 확인할 시간이다.
‘친애하는 조카에게.’
[오늘 내가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래. 여기서부터다.
본격적인 내용이 나올 타이밍. 단 한 글자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뜬 채로 집중하며 뒤의 부분을 읽어내렸다.
[오늘 특종 기사 하나가 전국적으로 뿌려졌단다. 너도 이미 신문을 읽었겠지만 괴도가 궁을 습격해 공주와 마주치고 왕가의 보물을 훔쳤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역시 이 편지는 단순한 안부 인사 따위가 아니었다.
예상했던 내용이 정확히 나왔음에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결국 내가 걱정했던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 셈이니까.
일단 계속 읽어나갔다.
[문제는 그 소식의 출처가 바로 우리 가문이라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사실에 굉장한 유감을 표한단다. 이런 중요한 문제에 우리 가문의 이름이 섣불리 얽혀드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니까.]
상당히 완곡하게 표현되어있으나 저 말이 무슨 뜻인지야 분명했다.
이번 사건은 자신이 원하던 방식이 아니며 자신의 허락도 없이 독단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그레이스에게 유감을 표한다. 즉 이건 자신의 가솔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물론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다만 앞으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길 원하진 않는단다. 가주도 모르게 가문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남용한다면 그건 매우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방식이지 않겠니.]
이 부분 역시 결국 위의 내용과 일맥상통했다. 앞의 칭찬은 그저 빈말일 뿐이며 본심은 뒤에 있는 내용일 것이다.
감히 자신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일을 저지른 가문 일원들을 향한 경고.
편지의 본론은 그 뒤에 나왔다.
[그러니 질서를 위해 정확한 보고 체계를 바로잡고 겸사겸사 우리 가문의 소속원이 다 함께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를 만들려 한단다. 돌아오는 토요일 저녁에 본가로 내려오면 되니 부디 시간을 맞춰 꼭 참석해줬으면 좋겠구나.]
“······.”
설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가문 일원을 모두 소집해 누구의 짓인지 범인을 색출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만약 범인으로 지목된다면 그 이후엔? 정확히는 몰라도 그 독사 같은 녀석이 가만히 넘어갈 리는 만무하다. 분명 자신에게 치욕을 준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겠지.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딱히 범인이랄 사람이 없다는 것.
사실 길버트의 도움을 살짝 받긴 했지만 기사에 찍힌 인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절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 인장은 어디까지나 위조자에게 부탁해 만들어낸 정교한 가짜에 불과하니까.
제아무리 영웅이라 칭송받는 그레이스 경이라 해도 위조자의 거짓말은 분간해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
다행인 점이 있었다.
바로 내가 이 사실을 미리 알아냈다는 것.
몰랐다면 방법이 없겠지만 사실을 파악했으니 그에 맞는 대책을 세우면 된다.
대책이라 해봤자 딱히 거창한 목표는 없다. 단지 율리아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도와줄 생각이다.
이번 주 토요일 저녁 그레이스 본가.
확실히 기억해둔 다음 편지를 다시 원래 상태로 돌려놓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뭐 하느라 이리 늦게 나오냐? 설마 변비?”
“시끄러워.”
“흥. 무서워서 농담도 못 하겠네.”
레이첼의 말에 적당히 대꾸해주며 다시 자리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잡담을 떠들었다.
맞은편에서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는 샤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역시 나는 편지를 훔쳐본 선택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가 만에 하나 율리아가 위험해진다면? 전부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책하고 후회했을 것이다.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마워.”
“아니야. 그래도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응. 내일은 나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율리아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평범한 주택을 떠났다.
“······.”
다만 이 순간까지 여전히 남아있는 의문점이 하나 있었다.
율리아는 어제 아카데미에서부터 고민에 잠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특종 기사와 편지는 전부 저녁이 되어서야 등장한 것들이다.
즉 그녀가 원래 품었던 고민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게다가 주말에 본가로 내려오라는 편지 하나만으로 몸살이 나버리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뭔가 그녀에게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자는 비밀이 많은 법이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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