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6
‘제발 아무 일 없이 지나가게 해주세요···!’
율리아의 그런 바람은 무참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아무도 자수하지 않을 때부터 불안함은 찾아왔다.
그럼에도 애써 속으로 이건 자신과 관련 없는 문제니 괜찮을 거라 되뇌며 이 시간이 그냥 넘어가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 가주의 고개는 곧장 그녀에게로 향했다.
고요한 식당에서 울려 퍼지는 나지막한 부름.
“내 유일한 조카여.”
그레이스를 이끄는 삼형제.
그중 막내인 길버트는 군인 출신으로서 미혼 즉 자식이 없는 홀몸이다.
반면 둘째인 헨리에겐 한 명의 외동딸이 있었다.
이름은 율리아 그레이스.
즉 첫째이자 가주인 리처드에게 조카는 율리아가 유일했다.
따라서 지금 그가 부르는 사람이 그녀 자신이라는 것도 이견의 여지가 없는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율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 백부님.”
“오랜만에 보니 참 어엿하게 컸구나.”
“···감사합니다.”
차갑던 식당의 분위기가 살짝 포근하게 풀어졌다.
갑자기 조카와 안부를 묻고 답하는 모습이 문제는 나중에 따로 해결하고 지금은 일단 회포를 풀며 식사를 이어나가겠다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예측은 바로 다음 이어진 가주의 말에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율리아. 설마 네가 한 짓은 아니겠지?”
“······.”
모두가 경악할 만큼 너무나 직설적인 물음.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행동이다. 그가 직접 몇 번이나 강조한 대로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피가 이어진 한 가족이다. 즉 누가 뭐래도 같이 힘을 합쳐야 하는 든든한 아군이었다.
저런 질문 방식은 아군이 아닌 적군. 더 쉽게 말해 원수지간에서나 볼 법한 구도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상대를 범죄자로 낙인찍는 모양새다.
심지어 먼 방계 일원도 아닌 본인이 스스로 말했듯 자신의 유일한 조카에게 그런 것이다.
소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으며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버지는 무표정 속에서도 감정의 동요를 살짝씩 드러냈다.
당장 그가 일어나 불쾌함을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은 흐름.
하물며 헨리 백작은 누구보다 뒤에서 가주를 물심양면 도와주던 오른팔 같은 존재임에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의 금쪽과도 같은 딸을 모욕했으니.
애초에 지금 상황은 일반적인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전개였다.
그럼에도 가주가 이렇게 당당히 조카를 의심한다는 건 하나의 가능성만을 알려주었다.
바로 그렇게 대놓고 의심할 만한 근거가 있다는 것.
아마 헨리 역시 그 사실을 짐작했기에 굳이 나서지 않고 지켜보는 거리라.
지금 섣부른 행동은 오히려 딸을 더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기에.
가주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율리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분명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제가 하지 않았어요.”
“흠. 그렇단 말이지?”
우선 그녀의 대답은 부정이었다.
그것도 전혀 망설이지 않고 내뱉은 단호한 부정.
그렇지만 리처드의 시선은 여전히 변함없이 율리아를 향하고 있었다.
“의심해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내가 이번 사건을 조사하다 우연히 듣게 된 소식이 있어서 말이다.”
“······.”
소녀는 주먹을 꽉 쥐고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쿵쾅대는 심장 박동이 터질 듯이 빨라졌다.
제발 들키지 않기를 바랐건만.
자신의 백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율리아. 하나만 물어보마. 괴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건···.”
숨이 막혀버릴 듯한 분위기.
보다 못한 길버트가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형님. 아직 어린 조카인데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닙니까?”
“조용히 해라. 길버트. 지금은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쯧! 작은형님. 어서 뭐라고 좀 해보시오. 형님의 딸이 저런 대접을 받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요?”
동생의 성화에 아버지는 짓씹듯 작게 대답했다.
“내 딸은 아이가 아니다. 본인의 행동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그게 형님이 할 말이오···!?”
“대신. 만에 하나 내 딸이 잘못한 게 아니라면. 그땐 나 역시도 참지 않을 거다.”
그의 핏발선 눈빛을 확인한 길버트는 그제야 입을 다물고 다시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가주의 얘기를 들은 율리아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는 듯한 모습. 심지어 몇몇은 섣불리 그녀가 범인이라 지레짐작하며 혀를 차기까지 했다.
그 모든 환경과 분위기가 소녀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되어 돌아왔다.
너무나 무거워 그대로 짓뭉개져 압사할 것만 같은 느낌.
어느새 율리아는 본인이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젠 뭐든 상관없으니 차라리 얼른 끝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해진다.
아니면 그냥 이대로 세상이 무너져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오늘을 기준으로 자신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고 말 것이다.
모범적인 엘리트 귀족 영애에서 한순간에 문제아 사고뭉치로 전락하겠지.
자신을 향하는 시선 속에는 혐오와 경멸이 담겨있을 테고.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해주는 부모님마저 곁에서 멀어질지 모른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지금 얘기를 꺼내려는 백부님?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인 가문 내의 누군가?
아니면 괴도 레이븐?
아니 이건 전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 책임져야 할 문제였다.
‘전부 내 탓이야···.’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다만 왜 갑자기 이 순간에 같은 반 친구인 소년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때 고민을 털어놓기라도 할걸.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위태롭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런 변명이나 해명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율리아.
그런 조카의 모습을 감흥 없는 무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던 가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율리아 그레이스. 너는 괴도를···.”
그가 모두의 앞에서 소녀의 잘못을 밝히려던 찰나.
갑자기 저택 내의 모든 불이 꺼지며 암흑이 도래했다.
“뭐지···?”
“정전인가?”
“어서 불을 켜라!”
웅성대는 사람들 가운데서 시선을 사로잡는 푸른 빛이 허공에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식당에 가득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목소리.
“기사는 잘 읽었습니다. 위대한 영웅 그레이스 경.”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오히려 정체 모를 괴한을 다그치는 리처드.
하지만 이미 주도권은 상대에게 완전히 넘어간 지 오래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기에 충분했으니까.
“제 활약상을 모두에게 알려주시다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몰라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활약상···? 네놈은 설마···!”
“그렇습니다.”
천장의 샹들리에에서 푸른 불꽃이 하나둘씩 켜지며 마침내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정장과 실크햇 모노클과 지팡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동자까지.
“괴도 레이븐!!”
그 외침에 율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관종한테 이보다 좋은 순간이 또 있을까?
[너는 관종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더냐?]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괴도를 계속하다 보니 변해가는 느낌이랄까요.’
마치 내면에 잠들어있던 또 다른 인격을 깨운 느낌으로 말이다.
아무튼 계획했던 타이밍보다 조금 일찍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사실 원래는 이 정도로 요란하게 등장할 생각도 없었다.
갑자기 계획을 수정한 이유는 오로지 율리아를 위해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 소문이 뭔지 너무 궁금했지만 그 얘기가 나온 뒤부터 율리아의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아마 내가 중간에 개입해 막아내지 않았다면 그대로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비밀이야 언제든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으면 된다.
지금은 그것보단 원래의 목적이었던 율리아를 구하는 데 집중해야겠지.
역시 편지를 읽어보길 잘했어.
그 덕분에 이렇게 등장할 수 있었으니까. 비록 백마 탄 왕자님은 아니더라도 샹들리에를 탄 괴도 역시 상당히 낭만 넘치지 않는가?
“괴 괴도!?”
“저 도둑놈이 이곳엔 왜···!”
“당장 집행자를 불러! 저놈을 잡으라고 해!”
내가 등장하고 정체까지 밝혀지면서 식당은 난리가 났다.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겨주니 괜히 쑥스럽네.
하긴 아비규환이 펼쳐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당장 오늘 그레이스 가문이 모인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등장 퍼포먼스까지 역대급이었으니 저렇게 감동할 수밖에.
이곳은 아주 완벽한 무대였다.
이번 모임은 보안을 철저히 한 덕분에 그 어떤 외부인도 없었다. 즉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오로지 귀족들 뿐이며 내게 위협이 될 만한 경찰이나 집행자가 없다는 뜻이다.
그들이 출동할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테니 그전까지는 내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생각이 오산이었다는 건 금방 깨닫게 되었지만.
“나 참···. 완전 개판이 나버렸군.”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구의 사내.
우람한 몸집에서 들려오는 뼈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형님. 일단 얘기는 저놈을 잡고 난 뒤에 마저 하시오.”
“그래. 그래야겠군.”
길버트가 여유롭게 이쪽으로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어라? 뭔가 좀 불안한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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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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