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7
괜히 겁먹을 필요 없다.
결국 상대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일반인.
제아무리 뛰어난 군인이라 할지라도 내 상대가 될 수는 없다.
철컥.
“좋은 말로 할 때 거기서 내려와라.”
음. 그런데 총은 좀 반칙이지 않나?
사람은 총에 맞으면 죽는다.
그건 마법사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도 고작 권총 한 자루에 겁먹고 항복할 거라면 처음부터 괴도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이 정도는 진작 예상했던 상황이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군요.”
먼저 푸른 불꽃을 꺼트려 다시금 공간을 암흑으로 물들였다.
결국 총도 보고 쏴야 의미가 있는 것.
조준할 수도 없는 어둠 속에선 오히려 애먼 사람을 쏴버릴 수도 있으니 상대도 망설일 수밖에 없다.
“쳇. 야비한 녀석 같으니라고.”
혀를 차며 나를 비난하는 길버트.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극찬으로 들릴 뿐이었다.
“당장 문을 열고 바깥으로 대피해라! 경찰에게 이 소식을 알려!”
“이런. 아직 공연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나가시면 안 되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어두컴컴한 세상.
이곳에선 오로지 여신의 축복을 받은 나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즉 오로지 나를 위해 만들어진 무대와도 같았다.
당연히 이런 구도를 쉽게 포기할 리 없잖아?
아무도 여기서 나가지 못하도록 이미 문은 단단히 잠가놓았다. 상대로선 패닉에 빠진 사람들 사이에 숨어있는 나를 잡을 방법이 없었다.
즉 빛을 통제하는 이상 나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 어떤 백전노장이라도 이 상황에서 이기기란 불가능하다.
만약 내가 진심으로 상대를 쓰러트릴 의지만 있었다면 지금까지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내 마술이 아무리 비살상 모드라곤 하지만 기본적인 기초 마법만으로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물론 길버트를 해코지할 생각은 없다. 비록 지금은 이런 관계로 마주쳤다지만 그는 뤼팽의 주요한 사업 파트너니까.
내가 이 타이밍에 등장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판을 깨트리고 망가트리기 위해서일 뿐이다. 전부 율리아를 도와주기 위한 특별 출연에 불과했다. 물론 상대가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적당히 연기를 가미하였지만.
“제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좀도둑 나부랭이가 달리 이유가 있겠나? 이번 목표를 우리 가문으로 잡은 것뿐이겠지!”
길버트의 대답에 여유로운 웃음으로 화답해주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나야 고맙지.
“그런데 함께 모여서 재밌는 주제로 얘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네 만행을 세상에 알린 보복인 거냐?”
“흠. 그건 아닙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오히려 여러분께 고마워하고 있으니까요.”
일반적인 범죄자라면 당연히 자신의 범죄가 세상에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겠지만 나는 평범한 범죄자가 아니라 낭만을 좇는 괴도니까.
“길버트. 굳이 말을 섞지 마라.”
“쯧. 나도 그러려던 건 아니었소. 저 자식은 사람을 열받게 하는 재주가 있군.”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헨리 백작. 오히려 꼿꼿한 자세로 작은 흔들림 하나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물론 시선은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무리 내 목소리를 쫓아봐도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부러 마법을 통해 사방에 울리도록 세팅해놨으니.
쿠우우웅···.
음산하게 깔리는 정체 모를 효과음.
사실 별건 아니고 그냥 분위기를 잡기 위한 겁주기용에 불과하다.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사람들이 혼란에 빠진 상태가 훨씬 나으니까.
효과는 상당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불길한 소리까지 들려오니 누구라도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을 테니.
“으아악!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패닉에 빠져 울부짖는 사람들. 아비규환의 공간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백작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레이스 경이었다. 심지어 그는 동생과 달리 아예 시선도 한곳에 고정한 채 조각상처럼 멈춰 섰다.
뭐지? 설마 너무 무서워서 몸이 굳어버린 건가?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와중.
가만히 있던 공작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율리아. 마법으로 빛을 밝혀라.”
‘이런···!’
속으로 당황하며 눈을 찌푸렸다.
확실히 상대로서 지금 상황을 뒤집을 유일한 방법은 다름 아닌 율리아였다.
나와 똑같은 마법사인 그녀가 빛을 밝혀버리면 그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렇지만 방금 직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압박하며 몰아세우더니 위기가 닥치니 태도를 싹 바꿔 뻔뻔하게 명령을 내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율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그녀가 가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까? 바로 직전까지 그런 대접을 받았는데도?
“······.”
내 생각대로였다.
가주의 명령에도 율리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멍하니 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율리아 그레이스!!”
리처드의 노호가 식당을 가득 뒤덮었다.
순간이나마 모두가 패닉에서 빠져나와 멍하니 가주 쪽을 바라볼 만큼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존재감이 뿜어져 나왔다.
저게 아무 능력도 없는 일반인이라고?
어지간한 마법사도 저 정도의 장악력을 보여주진 않을 텐데.
“그레이스의 이름에 걸맞게 행동해라.”
심지어 그 말에 율리아마저 고개를 돌려 가주를 바라보았다.
물론 나도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가만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상황 아닌가. 아무리 카리스마를 뽐낸다 해도 결국 그는 본인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해 조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문의 이름을 강요하기만 하면 전부인가? 그게 정말로 올바른 충성이라고 할 수 있나?
아니. 저건 맹목적인 복종에 불과하다.
율리아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나는 땅으로 살포시 내려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내 기척을 느낀 건지 깜짝 놀란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는 율리아.
“쉿.”
그녀의 입가에 부드럽게 손가락을 가져다 댄 후 리처드에게 대신 대답을 돌려주었다.
“안타깝게도 당신의 조카는 현재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자식이!!”
어우 깜짝이야.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움찔 놀라 확인하니 길버트가 아니라 헨리의 목소리였다.
저 아저씨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딸바보였잖아?
“아까 제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대답을 드리지 못했었죠.”
나는 피식 웃으면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분명히 말했다.
“은혜를 갚으려고 왔습니다. 그레이스 영애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주는 걸로요.”
“허튼소리 하지 말고 당장 내 딸에게서 떨어져!!”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아리따운 아가씨를 괴롭히는 취향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오로지 율리아만 들을 수 있도록 그녀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함께 도망가죠. 율리아.”
“···저는.”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가 마침내 대답했다.
***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그녀의 방 안이었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
여전히 어두운 저택이었지만 희미한 달빛은 창가로 내려앉아 조명이 되어주었다.
율리아는 처음으로 괴도의 모습을 분명하게 바라보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저를 도와주신 건가요?”
“제가 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이라도 해코지를 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지 않을 거잖아요.”
확신에 찬 말투에 괴도는 살짝 멈칫했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를 잘 아시나 보군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럴 거라고 믿어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네요. 설마 그레이스 양이 저 같은 괴도를 믿어주실 줄이야.”
끼익. 괴도의 손길에 스르르 열리는 창가.
시원한 밤바람이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식당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마법이 풀리면서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까요.”
“왜 저를 도와주신 거죠?”
다시 한번 던져진 질문.
“아까 방에서의 시선. 그것도 당신이었던 거죠?”
“···이런. 설마 그것까지 눈치채셨을 줄이야. 역시 괜히 마법 아카데미 우등생이 아니군요.”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주세요. 왜 도와주신 거예요?”
난감하다는 듯 뺨을 긁적이던 괴도가 뻔뻔한 미소로 대답했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거든요.”
“···대답해줄 마음이 없다는 거네요.”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때로는 밝혀지지 않아야 아름다운 비밀도 있는 법이니까요.”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기척.
마법이 풀리며 사라진 괴도와 소녀를 찾기 시작한 듯했다. 이대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까지 들이닥칠 것이다.
슬슬 시간이 되었다는 판단하에 괴도는 창문의 난간을 밟고 올라섰다.
그러자 율리아는 결심을 세운 표정으로 그를 불러세웠다.
“괴도 레이븐.”
“네. 말씀하시죠. 그레이스 양.”
“밝혀지지 않아야 아름다운 비밀이 있다고 했죠? 그럼 식당에서 백부님이 말하려던 제 비밀이 뭔지 알고 계세요?”
“아니요. 모릅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비밀인 거죠.”
“알려드릴게요. 제 비밀이 뭔지.”
갑작스러운 고백 선언에 레이븐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마치 사랑을 속삭이는 수줍은 소녀처럼 뺨을 붉게 물들인 채 얘기했다.
“저는 괴도 추종자예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상상도 못한 정체! ㄴㅇ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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