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8
솔직히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율리아가 괴도 추종자라니.
본인 스스로 그렇게 인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기 쉽다.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괴도 추종자’는 단순한 팬클럽이 아니다.
물론 괴도를 좋아한다는 명분 아래 모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괴도를 좋아하는 걸 넘어 부자와 귀족을 혐오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시민들에게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류층을 향한 적대감을 대놓고 드러내며 심지어 왕실 폐지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급변하는 시대적 배경과 어우러져 누구보다 극단적인 사상을 지닌 아나키스트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괴도 추종자 사이에서도 의견은 분분히 갈리며 체계적인 조직 시스템도 없으므로 그냥 스스로 자신은 괴도 추종자라 자칭하는 게 전부니까.
하지만 언론에선 이미 그들을 반정부주의에 범죄를 옹호하는 쓰레기 집단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런 문제가 많은 조직을 유력 공작가의 영애가 들어갔다?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녀가 세상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레이스 공작이 하나뿐인 조카를 의심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괴도 추종자로 활동할 정도면 가문을 배신하고 괴도의 편에 붙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뜻밖의 고백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다.
이미 밑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었기에 시간도 거의 없었다.
“이유를 알려줄 수 있나요?”
“제가 똑같이 물을 땐 끝까지 대답 안 해주셨으면서.”
아 그랬었지. 하지만 왜 도와줬냐고 물으면 같은 반 친구라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잖아.
율리아는 복잡미묘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냥 이유 없이 좋아하면 안 되나요?”
“안 될 거야 없죠. 원래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거니까요.”
여중생이 아이돌에 환장해 덕질을 하는 데 굳이 이유가 필요할까?
그냥 좋으니까 하는 거겠지. 아무리 어른스러운 율리아라 해도 결국 학생에 불과하니까.
이제 정말로 시간이 됐다. 나는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조처는 대충 취해놨어요.”
“네?”
“아마 그레이스 양의 비밀이 밝혀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게 무슨···.”
쾅!!
“율리아!!”
때마침 타이밍 좋게 나타난 헨리 백작. 얼마나 다급히 뛰어왔는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럼 이만. 언젠가 또 만나길.”
“잠깐···!”
나를 붙잡으려던 그녀의 손길을 피해 그대로 창문 너머로 도약했다.
처음 생각했던 시나리오와는 살짝 달라졌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무사히 율리아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라면 그녀의 비밀이 내 예상을 넘어선 사이즈란 것이다.
비록 지금은 무사히 넘어갔어도 언젠가는 이 문제가 다시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당장이라도 그만두도록 말려야 하겠지만.
율리아가 스스로 내린 선택을 무시하고 강요한다면 가주가 했던 짓과 다를 바 없는 게 아닐까.
“괴도 추종자인가···.”
여태까진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사실 일부러 외면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리라.
내 팬을 자처하지만 막상 그중 대부분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내 이름을 앞세울 뿐이었으니.
하지만 이제 율리아가 그 집단과 연관되어 있단 걸 알았으니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확인해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달이 참 밝네요.”
[갑자기 고백하는 거냐?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만.]
“······.”
[후후 농담이란다.]
***
“다친 데는 없니? 몸은?”
“···아. 괜찮아요.”
아버지의 걱정에 그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녀석이 무슨 해코지를 하진 않았고?”
“네. 그냥 이 방으로 와서···.”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나름대로 꿈꿔왔던 소망이었는데. 막상 실제로 겪으니 상상했던 것과는 꽤 달랐다.
전혀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질 만큼 편했다.
마치 친한 친구와 잡담을 떠드는 것처럼.
돌이켜 보면 대화의 내용도 딱히 영양가 있다고 보기 힘들었다.
용기를 내서 추종자라 고백했는데도 막상 그는 생각처럼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 지었던 표정은 마치.
‘걱정하는 느낌이었어···.’
어쩌면 괴도는 자신의 추종자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를 괴롭히던 지난 며칠간의 고민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딸의 표정을 확인하고 백작은 더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 네가 다치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많이 놀랐을 텐데 방에서 좀 쉬려무나. 뒷정리는 어른들이 알아서 할 테니.”
“···네 감사해요.”
아버지의 배려를 사양하지 않고 율리아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온 익숙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방에서 나가려던 백작을 불러세우는 목소리.
“아빠.”
“그래. 무슨 일이니?”
“범인은 찾았어? 나중에 다시 모여야 해···?”
그것만은 싫다. 레이븐이 등장해준 덕분에 가까스로 벗어났는데 결국 또다시 그런 일을 겪어야 한다니.
“범인은 찾았다. 괴도의 자작극이었다는군.”
“자작극···?”
“가문의 인장을 훔쳐 가짜와 바꿔치기했었다. 그걸 돌려놓기 위해 왔던 거라고 예고장에 적혀있더구나.”
뒤이어 헨리는 혀를 차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사건이 다 터진 후에 예고장이 발견되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러면···. 끝인 거야?”
“본인이 직접 인정했는데 어쩌겠나. 굳이 녀석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그 말을 곱씹어 되새겼다.
괴도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
자신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도록 조처를 취해놨다고 했었다.
즉 자신을 위해서 그는 모든 잘못을 덤터기쓴 것이다.
“더 궁금한 건 없니?”
“······.”
“쉬어라.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니 하룻밤 자고 가도 되니까.”
스르르 닫히는 문. 완전히 혼자 남게 된 방 안에서 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참 아이러니한 하루였다. 불과 바로 직전까지만 가장 불행한 날이었을 텐데 그가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마술처럼 뒤바뀌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정말로 괴도가 범인이고 인장을 돌려놓기 위해 왔던 거라면 왜 굳이 그 타이밍에 등장해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는 말인가.
만약 그가 조용히 인장만 돌려놓은 뒤 빠져나갔다면 완벽 범죄였을 것이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채 범인 색출은 계속되어 가문 일원 사이의 믿음은 삐걱거리게 되었겠지.
무엇보다 레이븐은 자신을 의도적으로 구해주었다. 처음 가주가 비밀을 밝히려던 때부터 암흑 속에서 자신이 곤경에 처했던 때와 마지막엔 모든 걸 뒤집어쓰고 사태를 마무리하기까지.
‘그리고···. 율리아라 불렀어.’
분명 똑똑히 들었다. 자신에게 도망치자 말할 때 그는 자신을 율리아라고 불렀다.
그 이후부터는 쭉 그레이스 양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솔직히 아직도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괴도를 만났다는 것과 그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사실까지.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이해하긴 힘들었다.
다만 오늘 하루의 사건들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뿐이다.
아주 정신없이 휘몰아 닥쳐서 허우적대다가 깨고 나서야 뒤늦게 현실이 아니었단 걸 깨닫는 그런 꿈 말이다.
“······.”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으니 천천히 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디 내일 깨고 나면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길 바랐다.
소집됐던 가문 일원들도 전부 떠나고 조용해진 저택이면 좋겠다.
그렇게 눈을 감고 서서히 숨을 고르게 쉴 때쯤.
똑똑.
잠기운을 몰아내게 만드는 노크 소리.
율리아는 잠시 멍한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다 나지막이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잠깐만 실례하지.”
그리고 방에 들어온 손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모든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오늘 모든 사건의 원흉이나 다름없던 가주 그레이스 경이 손수 행차하였으니까.
“여긴 왜···.”
“아무래도 얘기를 좀 나눠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내일. 내일 아침에 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좀 피곤해서···.”
완곡한 거절의 표현에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물론 이해한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진정이 필요할 테니. 하지만 나도 내일 아침 일찍 나가봐야 해서 말이야. 짧게라도 얘기 나눌 수 있겠나?”
“···네. 알겠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맙군.”
생각해보면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다른 가문 일원이 듣지 않고 넘어갔을 뿐 결국 가주는 여전히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모두에게 비밀을 까발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일단 먼저 사과부터 해야겠지. 정말로 미안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
“네가 괴도 추종자와 어울린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우연히 궁 습격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네가 내게 통보도 없이 이런 짓을 벌였다고 섣부르게 판단했지. 전부 변명할 거리도 없는 내 실책이다.”
그 말이 본심일지 아니면 단순히 꾸며낸 말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가주는 율리아가 범인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혹은 다른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모두의 앞에서 밝히려던 걸 수도 있다.
“이 못난 삼촌을 용서해주겠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율리아는 이내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싱긋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는 백부님을 이해해요.”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정말로 그것만이 용건의 전부라는 듯 가주는 망설임 없이 얘기를 끝내고 돌아섰다.
“피곤할 텐데 푹 쉬렴. 오늘 일은 악몽이라 생각하며 전부 잊고.”
“네. 백부님도 쉬세요.”
“그래.”
철컥. 문이 닫히자마자 율리아의 입가에서 미소가 깨끗이 사라졌다.
싸늘한 무표정으로 닫힌 문을 응시하는 그녀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잠을 자지 못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주인공은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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