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91
후우우우웅-!!
쳐놓은 기막이 거세게 흔들린다·
기운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생기는 문제기도 했으나 노인의 말이 가히 충격적인 게 이유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잔뜩 찌푸린 눈으로 노인을 쳐다봤다·
시간을 거슬렀느냐· 노인은 분명 내게 그리 물었다·
‘뭐지·’
차게 식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그걸 어찌 알고 내게 묻는 걸까·
설마·
‘···저 노인도 회귀자인가?’
이미 나 말고 또 다른 회귀자가 있었음을 인지하고 있다·
그 정의가 시간을 거스른것인지 아니면 다른 세상으로 온 것인지는 모를지언정·
앞서 또 다른 인물이 있다고 한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만큼 잔뜩 경계심을 취한 채 노인을 쳐다봤다·
정녕 백화상단의 초대 단주는 회귀자인 걸까·
온갖 생각을 떠올리며 쳐다보고 있을 즈음·
달깍-·
노인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더니 직후 말을 이어냈다·
“오가다 들었는데· 일공자가 해낸 일들이 나이에 비해 워낙 거대한지라 혹 그렇지 않을까 하여 뱉어본 말이오만·”
“···”
“일공자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내 농이 너무 과했나 보오· 사죄드리겠소·”
“···농···이셨군요·”
“음?”
노인이 묘한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까딱인다·
“하면 진짜 시간을 거스르기라도 했다는 거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절대 그럴 리 없지요·”
하하하·
애써 손까지 저어가며 웃으며 말했다·
“너무 황당한 말이라 잠시 당황했을 뿐입니다· 시간을 거스르다니요···· 말도 안 되는 말이지 않습니까·”
당황을 숨긴 채 말하니 노인은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의심하는 건가?’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뭔가 알고 있어 떠보는 건지 아니면 내 반응이 이상해서 의심하는 건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빌어먹을·’
이럴 때만 노야나 주변에서 연기 더럽게 못 한다고 했던 게 떠오른다·
미리 알고 반응했으면 모를까· 갑자기 회귀에 관련된 말이 튀어나오니 머리가 하얗게 질려버렸다·
아무리 시치미를 떼려 한들 늦은 것 같다·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 생각지는 않소·”
“예?”
노인은 날 보며 덤덤히 말한다·
“일공자· 상인으로 살다 보면 말이오· 아주 많은 이들을 보게 되오·”
경청하는 척 여전히 머리를 굴렸다·
“본인이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말하거나· 이 몸은 내 몸이 아니라며 실은 전대 천하제일인이었다는 인물도 있었고· 별의별 인물을 다 마주하게 되지·”
“그건 그냥 미친놈들 아닙니까?”
다른 세상이니 내 몸이 아니라느니 뭔 미친 소린지 모르겠다·
‘제정신들이 아닌 것 같은데?’
어처구니없는 말들이었다·
“그걸 믿으십니까···?”
“믿지 않소·”
“한데·”
“하나 전부 거짓이라 생각지도 않소·”
“예?”
“세상엔 그것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득하며· 확신을 갖기엔 나는 완전하지 않으니· 전부 아니라 할 수는 없는 일이오·”
“···”
덤덤히 내뱉는 말 속에 알 수 없는 가시가 있었다·
“일공자·”
“···예·”
“농으로 시작하긴 했으나· 그대의 사정은 내게 그리 중요치는 않소·”
“···”
식은땀이 흐른다·
이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춥지 않으나 어디선가 냉기가 몰아치는 기분· 사방에서 날카로운 비수 수천 개가 날 겨냥하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함·
다 알고 있다·
저 노인은 내 모든 걸 알고 있다·
그런 느낌이 정수리를 꿰뚫는 감각이었다·
‘쓰읍····’
묵연과 대면했을 때도 이런 느낌이 있었는데· 심하기는 이쪽이 더 심한 것 같다·
어떻게 할까·
고민이 스치나 어차피 방법은 많이 없었다·
“무슨 사정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하여 절 부른 연유가 무엇인지요·”
그딴 거 모르겠고· 날 부른 이유가 무엇이냐·
이럴 땐 그냥 막무가내로 가는 게 중요했다·
시치미를 제대로 떼기엔 자신이 없고· 애당초 합리적인 의심 또한 아니었으니까·
하여 눈을 살짝 좁힌 채 말했다· 그걸 가만히 보던 노인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반응하는데·
“아참· 연유· 그렇지···· 연유·”
노인은 잠깐 깜빡했었다는 듯 몇 번 고개를 끄덕인다·
“미안하오· 나이를 먹으니 자꾸 깜빡깜빡하는 버릇이 생겨서 말이오·”
“···”
“그렇지···· 내가 일공자를 불렀었지·”
뭐지· 노망이라도 난 건가·
대화가 자꾸 어딘가로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왜 불렀더라?”
“···”
진짜 노망난 거 맞는 것 같은데?
잠시 허공을 보며 멍하니 노인이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커진다·
“아· 기억났소····”
“···아 예· 다행입니다·”
“그렇군· 무얼 좀 물어보려고 했었소·”
“예···· 경청 하겠습니다·”
이번엔 뭘 물어보려고 하는 걸까·
아까와 달리 긴장감을 품은 채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다름이 아니라· 일 공자·”
“예· 어르신·”
“그대는 가주가 될 생각이오?”
“···”
이번에도 노인은 예상치 못한 물음을 건네왔다·
“···갑자기 말입니까?”
“그렇소·”
“너무 생뚱맞은데요·”
가주가 될 생각이냐·
그걸 묻는 말에 내 고개가 절로 까딱여진다·
“그걸 왜 궁금해하시는 겁니까?”
말투가 절로 삐딱하게 나간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게 담겨 있었다·
구태여 불러와선 묻는 말이 저것인가·
아까부터 뜬금없는 얘기만 흘러나오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어르신께서 여쭤보시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그것도 굳이 기막까지 펼쳐달라 청해놓고는 이제 와 묻는 말이 고작 저것인가·
“가주· 글쎄요·”
구가의 가주가 될 것이냐·
딱히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건 제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선택은 가주님께서 하시는 거지요·”
정확히는 아버지와 장로들의 입김이겠으나·
죽어라 하기 싫어도· 그건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하기 싫다고 해도· 혹은 다른 누이들이 이를 하고 싶다고 해도·
이에 관한 선택은 가주인 아버지가 내릴 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할 수 있는 건 튀는 거 정도려나·’
하기 싫다고 집안을 뛰쳐나가는 것·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실제로도 그럴 의도로 전생에 한 짓이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저는 이를 왜 어르신께서 궁금해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부분을 왜 이 노인이 궁금해하는 걸까·
그것도 전생에 본 적도 없는 양반이 말이다·
‘혹 진짜 손녀들 때문에 그러는 건가·’
소가주 자리가 확실시된 놈·
그놈이 점점 영향력까지 펼치게 됐으니 그게 거슬려 이리 행차한 걸까·
이유로는 가장 신빙성이 높아 보이기는 했다·
마음에 안 들겠지·
제 씨도 아닌 첩의 새끼가 본처의 자식들을 이기고 가주에 오른다니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왔다고 한다면 나도 딱히 할 말은 없다·
“제가 가주가 되는 것이 어르신에게 무슨 영향이 있는 건지요·”
“영향이라···· 퍽 없지는 않지· 아무래도 우리 딸아이가 연관되어 있으니까·”
역시나·
정말 미 부인과 구희비 구연서 때문이라는 건가·
“그게 문제라면 제가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듯····”
“하면 가주를 시킨다면 받아들일 의향은 있다는 거요·”
“···”
가주를 시킨다면 할 것이냐·
그 물음에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글쎄요·”
소가주 자리까진 이어받아야 할 시점인이긴 한데· 가주라····
“그 또한 제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요· 원한다고 쉬이 얻을 수 있는 자리도· 하고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
대답이 되었을까·
속내를 숨기며 뱉는 말에 노인은 여전한 시선이다·
원하는 답변이 아니었다는 건가·
“일공자·”
“예· 어르신·”
“일공자께선 구가의 가주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계시오?”
“···예?”
“그 이전에 공자께선· 구가(俱家)가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계시냐는 물음이오·”
“뭐 적당히 함께하는 집구석·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다른 곳도 그렇듯 집안의 뜻이 뭐 대단한 게 있겠는가·
남궁도 그렇고 모용이나 어느 집안들이 그렇다· 뜻에 유별나게 집착하진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뭐 중요한 부분입니까?”
“공자의 반응을 보니 모르는 듯하여 여쭤봤소·”
“모른다구요?”
구가의 뜻과 가주의 의미·
그걸 내가 모른다고?
‘어이가 없군·’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감히 무얼 안다고·
아무것도 겪어보지 못했을 노인네가 감히 무얼 안다고·
“그럼 어르신께선 알고 계십니까? 저희 집안의 의미를 말입니다·”
“적어도 일공자보다는 알고 있소·”
“하면 말씀해 보십시오· 어르신께선 대체 무얼 알고 계시다는 겁니까·”
도대체 무얼 알고 있기에 이리 오만하게 구는가·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다·
하여 어디 한 번 내뱉어 보시라· 그리 판을 깔아드리는데·
“음· 구가는 말이오·”
콰앙-!
노인이 말을 뱉으려던 찰나·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거친 소리와 함께 들어온 이는 바로 미 부인이었다·
‘이런·’
설마 누가 들어올까 싶어 기막만 펼쳤지 막아놓진 않았는데·
그게 아무래도 문제가 된 것 같았다·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미 부인이 들어와 기막 안으로 발을 내디딘다·
“미 부···?”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무슨 일이냐 묻기도 전에 미 부인은 노인에게 다가가 서늘한 목소리를 꺼내 든다·
그 목소리에 노인 또한 시선을 옮겨 미 부인을 쳐다봤다·
“단주· 단주야 말로 이게 무슨 짓이오? 얘기 중에 함부로 끼어들다니 말이오· 이는 한참이나 선을 넘은 행위 같소만·”
“저기 잠깐····”
“선을 넘으려 한 건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
입이 절로 닫힌다·
미 부인의 목소리에서 저리 큰 분노가 느껴진 적이 또 있을까·
아마 처음 보는 일이리라·
“주제넘은 행위라는 걸 모르시는 겁니까?”
“모르는 것을 알려주려 한 게 잘못이라는 거요?”
“지금 알 필요 없는 걸 알려주려 한 게 잘못이라는 겁니다·”
“틀렸소· 잘못이란 알고 있어야 할 일을 모르고 있는 것이고· 이 상황을 만든 이들이 죄인이겠지·”
“그 잘못에 관해 판단할 수 있는 건 당신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오지랖일 뿐입니다·”
순식간에 시작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말싸움·
부녀간의 대화라 보기엔 너무나 살벌했다·
그렇게 몇 번의 얘기가 더 오가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단주· 나는 아직 일공자와 얘기중이오· 하니 나가주시겠소?”
노인이 미 부인에게 얘기하자 그 즉시 미 부인이 날 쳐다봤다·
“일공자·”
“예? 예····”
“미안하구나· 오늘 찾아와주어 고맙지만 다음에 봐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자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말이다·”
“아니···· 저 아무래도 저건 저도 들어야 할 듯싶은-·”
“부탁한단다·”
“옙····”
뒤도 안 돌아보고 걸음을 옮겼다·
부탁이라서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미 부인의 눈빛이 정중한 태도와 달리 격하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더 듣고 싶어도 아마 듣지 못할 상황인 듯 보였다·
‘···’
구가가 왜 구가라 불리는지·
그리고· 가주가 지닌 위치란 무엇인지·
저 노인이 정녕 이에 관해 알고 있는지· 의문이 솟으나 지금은 듣지 못할 것이다·
‘···쯧·’
그냥 엉덩이 무겁게 앉아 있을까 싶다가도·
후욱-!
주변에 있던 기운을 회수한 다음 미 부인을 뒤로한 채 걸어갔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찝찝한 감상을 숨긴 채 문을 잡았고·
드르륵 탁-!
그대로 문이 닫힌다·
그렇게 구양천이 나간 직후·
“무진·”
미효란은 나직히 누군가를 부른다·
그 순간 방을 중심으로 기운이 퍼져나갔다·
후욱-!
기막이 또 다시 펼쳐진 것이다·
내기로 이루어진 바람이 미 부인을 스친다·
깔끔히 관리된 머리칼이 흔들리고 그 속에 만들어진 냉기 스민 눈동자가 노인을 향했다·
“뭐 하는 짓입니까·”
“방금까지 했던 말을 또 다시 하길 원하오?”
노인이 대답하며 주변을 살핀다·
“청어석(聽漁石)을 설치해 둔 모양이군·”
청어석·
방 안에 설치해 두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을 수 있게끔 해주는 귀물이었다·
범위는 좁고 도청을 시도하기에도 한계 거리가 턱 없이 낮은데다 귀물을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 굳이 쓰진 않는 귀물이었다·
“예· 어떤 당신께서 어떤 허튼 말을 할지 모르니까요·”
“단주께선 못 본 사이 이런 수작질까지 늘어난 모양이오· 아니면·”
노인의 무색의 눈이 미효란을 향한다·
“그만큼 저 아이가 네게 귀해진 모양이지?”
“···”
말투가 바뀌고· 이를 들은 미 부인의 미간에 금이 간다·
“십수 년 만에 만난 아비를 이리 매몰차게 대할 만큼 말이다·”
아비라는 단어를 내뱉자 미효란의 미간이 더 없이 구겨진다·
“이제 와 아비 노릇이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기엔 참으로 늦으셨습니다·”
얼굴에 스민 분노가 선명했다·
그걸 본 노인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감긴다·
“오랜만에 네가 화내는 모습을 보는구나·”
“말 돌리지 마십시오·”
“그 아이에게 진실을 알게 하는 게 그토록 두렵더냐? 언젠가 알게 될 일이라는 걸 너 또한 알 터인데·”
자신과 잠시 대면한 청년· 구가의 핏줄이자 가주의 유일한 아들·
근래 중원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구양천이란 놈을 떠올린다·
“쓸데없는 짓이다·”
“하여 그걸 구태여 말씀하시고자 이리 등판하셨습니까· 수십년 만에 나타나 한다는 게· 이런것이냐는 말입니다·”
“겸사겸사였지· 이러지 않으면 네가 나와 얘기를 해주지 않으니 말이다·”
“핑계 대지 마십시오· 대화를 거부하고 멋대로 떠난 건 제가 아닙니다·”
대답을 듣고 미효란의 목소리가 커진다·
“여전히 제멋대로십니다· 어찌 감히 가주도 아닌 당신이 그 일을 입에 담으려 하셨습니까·”
콰앙-!
미효란의 얇은 손이 나무 탁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주르륵·
잔이 엎어지며 찻물이 바닥에 흐른다·
흐르는 찻물은 이내 지면에 떨어지고 바닥에 깔린 천을 적셨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노인의 태도는 여전했다·
“제멋대로인 건 태생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느냐·”
“그걸 말이라고···!”
“하니 너 또한 그러했지· 아비인 나를 무시한 채 구가의 돌 같은 놈을 택하지 않았더냐·”
“···”
구가의 돌 같은 놈·
그 단어가 나오자 이번에는 미효란의 입이 막힌다·
“분명 말했었다· 놈은 폭풍이라고· 누구도 고개를 숙이게 할 수 없고 가진바 업을 이루기 위해 결국 너 또한 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이야· 그건 그놈 옆에 있는 계집의 탈을 쓴 괴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면에 닿아 있는 미효란의 팔이 일순 떨린다·
“나의 뛰어난 딸아· 그때 너는 말했었지· 그라면 끝내 모든 걸 이겨낼 것이라고·”
“···그건·”
“이제 와서 보니 어떻더냐· 그놈은 네 바람처럼 모든 걸 이겨냈더냐?”
“···”
“우습잖다· 녀석은 아무것도 이겨내지 못했다· 되레 자신 같은 폭풍을 담을 그릇 하나를 내어놓았지· 참으로 대단하더구나· 자신의 뒤를 이어 업을 짓게 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렇다면····”
“입 조심하세요·”
짓눌린 음색에 이번엔 노인의 눈썹이 요동쳤다·
“내 앞에서 그 사람과 그 아이를 욕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없습니다·”
슥· 탁상에 있던 미효란의 손이 떨어진다·
뚝-! 찻물이 흐르는 지면 위로 무언가 방울져 떨어졌다·
미효란의 손에서 떨어진 핏방울이다·
탁상을 어지간히 강하게 쳤는지 그녀의 손엔 상처가 나 있었지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야·”
미효란은 고통 따윈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목소리에 송곳니를 담아낸다·
“···하하·”
그 모습에 노인은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미련 속에 있구나·”
찰나에 머금던 웃음은 금세 사라진다·
“자신이라면 놈의 옆에 있을 수 있다는 미련· 그 미련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어·”
“···”
“왜 아직도 모르는 게냐· 나의 딸아· 그건 우리 같은 이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다·”
꾸우욱·
미효란이 상처 난 손을 꽉 말아쥐었다·
그럴수록 핏물은 더 없이 짙어진다·
“떠나겠다면 적어도 그 속내는 버리라 말했거늘 너는 여전히 이를 버리지 못했어·”
“할 수 없다는 생각 단 한 번도 한 적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그 시간이라는 게 얼마나 남았더냐·”
“···”
노인의 말에 말을 뱉던 미효란의 숨이 턱 막혔다·
“시간이라는 게 남아 있으리라 보느냐·”
“···당신·”
“장성한 놈의 자식을 보니 알겠더구나·”
제 아비를 닮아 이미 감출 수 없게 커져 버린 존재감·
많은 이들은 그걸 보며 불합리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저 나이에 어찌 저런 힘을 담았을까·
어떻게 저곳까지 닿을 수 있었는가·
수두룩한 이들이 이를 궁금해할 터나· 노인은 그런 걸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때는 얼마 남지 않았다·”
업을 잇기 위해선 놈들은 불합리한 존재로 태어나야 했고·
“그걸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대대로 구가의 태생이란 그러한 존재들이었다·
“간신히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그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업을 위해 뜻을 잇겠지· 제 자식이 준비됐다면 필연적으로 이어질 일이다·”
구가의 가주·
그것이 지닌 의미·
“그릇이 되어 죄를 받아들이는 것· 하여 인간의 감정을 버리고 오로지 법칙을 지킨다는 신념만이 남는 것·”
그렇게 되면·
“딸아· 그리되면 놈은 여전히 네가 곁에 있고 싶어 하던 이로 남아 있을 것 같더냐·”
“···”
미효란은 노인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바람을 두지 말라· 그때가 되면 이미 네가 알던 이가 아닐 것이다· 아니 애당초 인간이라 볼 수도 없겠지·”
그릇만이 남았을 뿐·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으리라 보는가·
“그건 저 아이가 준비될수록 시기가 빨라질 것이고···· 아니 어쩌면·”
노인은 이내 구양천이 나간 방문을 보며 나직이 내뱉었다·
“···이미 준비가 됐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눈엔 어째서인지 죄책감이 스며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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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으으으·
바람이 스며드는 동굴의 한복판·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공간은 어둡기만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 공간 속·
철컹·
철컹·
고요함을 없애려는 듯 짤막하게 소리가 섞여 든다·
공간 내부 아주 깊은 곳·
이건 그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도대체 무얼 위한 소리일까· 의문은 그리 길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는 중심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지독한 어둠 속 이변이 나타난다·
화르륵-!!
불씨가 터졌다·
찰나에 터진 불씨는 작았지만 그 작은 불씨는 절대 약하지 않다는 듯 순식간에 사방에 빛을 터트린다·
주변이 밝아지며 안에 있던 모습이 드러났다·
그제야 소리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간 한 편에 어마어마한 문이 있다·
크기를 재기도 힘들 만큼 거대한 문·
저런 문이 어찌 이런 공간 안에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런 거대한 문 사이 문의 크기에 비례하듯 커다란 쇠사슬이 문짝을 두르고 있다·
철컹-!
이 소리는 사슬에서 나는 소리였다·
사슬이 흔들리며 나는 소리· 어떻게든 벌어지려는 사슬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다·
굳게 닫힌 문을 막아내고 있는 사슬과 당장이라도 열리고 싶어 바들바들 떠는 문· 그리고·
쿠구구구구구-!
그런 사슬과 문을 붙잡은 채 땀을 흘리는 인물이 있었다·
인간치고는 상당히 큰 몸·
온몸엔 근육이 그득했고 들어찬 근육만큼 몸에는 빼곡한 흉터가 가득하다·
인간으로 치면 태산과 같은 거한이나 잡고 있는 쇠사슬에 비하면 너무나 작아 보였다·
그런 존재가 한껏 사슬을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잡는 게 어지간히 힘든지 땀이 뚝뚝 흐른다·
팔은 바들바들 떨리고 눈은 붉게 충혈됐지만 사내는 침음 하나 흘리지 않는다·
“···”
그저 잡고 있는 사슬에 힘을 더 줄 뿐·
절대 놓지 않겠다는 굳건한 태도다· 그렇게 사내가 사슬을 꽉 움켜잡고 있을 즈음·
화르르륵—!!!
불꽃이 줄기를 만들어 터져 나오더니 사슬 쪽으로 파고들었다·
촤르륵·
줄기가 사슬에 들러붙더니 떨리는 사슬을 잡아 고정하기 시작했다·
떨리는 사슬이 문을 더 꽉 조인다·
그러자 흔들림이 멎고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그걸 보고서야 사내가 사슬에서 손을 놓는다·
잡고 있던 부분엔 핏물이 그득히 묻어 있었다·
사내의 손 또한 피부가 다 뜯겨 엉망이 되어 있다·
그 탓에 고통이 어마어마할 법한데 사내는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사내를 향해·
“대단하구나·”
붉은 눈을 띤 노인이 다가간다·
“정말 이를 버텨낼 줄이야·”
노인의 말에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굵직한 목소리와 무표정 속 피곤함이 가득 느껴진다·
“어때 해 볼 만하더냐·”
“···”
말을 듣고 사내가 다시 문을 쳐다본다·
방금까지 자신이 온 힘을 다해 붙잡고 있던 문은 불꽃에 휩싸여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아쉽게 보지 말거라· 솔직히 이만큼 버틸 줄 예상치 못했으니 말이야·”
“아쉽지 않습니다·”
“그럼 다행이지·”
끌끌·
노인이 웃음을 흘렸다·
웃음소리에 사내가 노인을 쳐다봤고· 시선은 얼굴이 아닌 팔 쪽으로 향한다·
헐렁이는 왼팔의 소매·
노인은 원래 있던 팔이 사라진 상태였다·
“아 이거·”
시선에 노인이 웃으며 말한다·
“일이 좀 있어 주고 왔다· 왜? 궁금하더냐·”
“궁금하지 않습니다·”
“매정하기는·”
“···”
노인의 반응을 뒤로하고 사내가 손을 옆으로 뻗어낸다·
후욱-!
바닥에 있던 무복이 들려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즉시 무복을 걸쳐 입는다· 너무나 무덤덤한 반응이다· 그걸 본 노인이 말했다·
“손주 녀석이 기개가 상당하더구나·”
마치 장난이나 쳐볼까 하는 음색이었다·
멈칫·
들려온 말에 사내의 고개가 움직인다·
시선을 확인한 노인은 살짝 놀란 듯 눈을 키웠다·
“예상보다 재미난 표정이군·”
“그 아이를 만나고 온 겁니까?”
“그리 무서운 표정 짓지 말거라· 조부가 되어 제 손주 놈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니까·”
쿠구구궁–!!!
노인의 말에도 동굴 내부가 크게 진동한다·
사내의 육신에서 퍼지는 투기가 원인이었다·
“무얼 하고 오셨소·”
“흐음·”
그런 반응이 재밌다는 듯 노인이 묘한 표정을 짓는다·
“뭔가 했다고 하면 어쩔 생각이더냐·”
쿠구구···구···
질문을 끝으로 진동이 멈춘다· 반응이 없는 걸까? 보기에는 그랬지만 이는 전조다·
재앙이 터지기 직전 느껴지는 전조·
“끌끌·”
그 모습에 노인이 손을 살짝 들었다·
“무섭구나· 그러다 이 아비조차 치겠어·”
“···”
“걱정 말거라· 네 자식이기 이전에 나의 귀한 손주인 만큼 별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 정말 얼굴만 보고 온 것뿐이니 그리 열을 내지 말거라·”
노인의 말에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사내는 이내 몸에 힘을 풀 듯 고개를 돌린다·
방금의 말이 아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저 고지식한 아이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을까?
노인은 일순 그게 궁금했지만 구태여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들아·”
노인이 말을 잇는다·
“잊지 말거라· 그 시간이 지나기 전에 아이를 소가주 자리에 올려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이 자리에 네가 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 인지 해야지·”
화르륵·
점차 사내 구철운의 몸에도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것이 우리의 업이니 말이야·”
“···”
대답은 내뱉지 않았다·
그저 불꽃에 몸을 맡겼다·
당장 자리에서 벗어나 향해야 할 곳이 있었다·
그렇게 구철운이 불꽃이 되어 자리에서 사그라들고·
아무도 남지 않은 공간·
그 속에서 노인은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위치는 문의 코앞·
천천히 다가가 문 앞에 선 노인이 말했다·
“참으로 구슬프구나·”
그리 말을 뱉는 노인의 표정은·
말과 달리 조금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_ _ )
다행히 조모님께선 금방 깨어나셨습니다· ( _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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