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1
무패 신화를 써 내려간 전승공은 뛰어난 전략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KO패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내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어찌 저항할 수 있을까· 전승공이 저 말을 꺼낼 정도로 행실이 개판이었던 내 잘못이지·
“사실 칼 군을 처음 봤을 때는 많이 놀랐다네· 분명 닮은 외모는 아닌데 이상하게 닮았어· 아마 분위기 때문이겠지·”
외모까지 닮았다면 양자로 삼았을지도 모르겠어 라고 덧붙이며 웃는 전승공의 말에 더욱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시선이 갔었네· 자네는 자네고 그 아이는 그 아이인데 자꾸 그 아이를 겹쳐서 보고 있었지· 그건 자네에게도 그 아이에게도 못할 짓인데·”
대토벌 전쟁 당시 전승공은 처음 본 일개 팀장에게 과분할 정도의 관심을 줬었다· 덕분에 제국군 소속이 아닌 재무성 소속이라 붕 뜬 입장이 될 수 있었던 감찰부 4과는 무난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그리고 그 이유를 듣고 얼마나 안타깝던지· 나를 죽은 아들과 겹쳐 보면서 속이 타들어갔을 텐데 정작 외면하기에는 그 아들과 닮아서 이런저런 배려를 해줬다· 제국의 명운을 짊어진 자가 속조차 편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아차 싶더군· 자네를 그 아이와 닮았다는 편견에 가둬서 온전한 자네를 보지 못했네· 과거도 털지 못했고·”
이 역시 3년 전에 들은 얘기다· 잊을 수는 없지만 털어야 할 아들과의 이별· 아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을 온전히 바라봐야 하는 것· 전승공의 발목에는 두 족쇄가 걸려있었다·
“그래서 결국 자네에게 말했지· 계속 품고 있어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았거든· 자네에게도 그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까마득한 상급자의 갑작스러운 호출 갑작스러운 과거 고백· 하지만 그날 전승공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분명 웃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어떤 때보다도·
뭐라고 했더라 눈을 가린 안대를 이제야 벗은 것 같다고 했었나? 그제서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내가 한 선택 중 그날의 선택만큼 자랑스러웠던 것은 없었네· 덕분에 이리 훌륭한 사내와 친우가 되지 않았나?”
“과분한 말씀입니다·”
들지 못하고 있던 고개를 조금 더 숙였고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 전승공이 친히 내 머리를 잡아올렸다· 이게 분명 배려 같기는 한데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적장 모가지를 베려고 머리채를 잡는 느낌이야·
아무튼 전승공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 아이를 떠나보내고 자네에게 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 영원히 털지 못할 것 같던 일도 결국 시간이 흐르니 해결할 수 있었어·”
“다행인 일입니다·”
“그래 다행이지·”
고개를 끄덕인 전승공은 조용히 찻잔을 매만졌다·
“시간 결국 시간이 문제지· 어쩌면 칼 군 자네도 시간이 더 지나면 괜찮아질 수도 있네·”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하다가 겨우 참았다· 이런 분위기에 동조하는 건 눈치를 말아먹은 놈이지·
“하지만 그 시간 동안 힘들어 할 것이 뻔한데 어찌 가만히 있겠나· 이미 2년이나 그랬는데·”
장관과 전승공은 2년 동안이나 나를 믿고 가만히 뒀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 이 이상 방치하기에는 곤란하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이미 나는 칼 군의 고통을 겪어봤네· 그 고통을 해결하려면 어떤 방법이 맞는지도 알고 있고·”
그리고 전승공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마치 그동안 고생했다는 듯이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런데 어째서 칼 군이 나와 같은 시간을 들여야 하나· 젊은이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길을 안내하는 것이 나처럼 늙은 사람의 역할이 아닌가?”
순간 아무 말도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내가 너의 고통을 알기에 그 영겁의 시간을 겪어봤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너는 나처럼 몇 년이나 더 고생할 필요가 없다· 전승공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홀로 감당할 수 없으면 누군가에게 털어놓게· 그게 미련한 내가 5년이나 걸려서 찾은 정답일세· 칼 군이라면 2년으로 충분하지 않겠나·”
“···오히려 넘쳤을지도 모릅니다·”
“잘 알아서 더 괘씸하군· 알면서 왜 그랬는가?”
“죄송합니다···”
전승공의 웃음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
칼 군을 내보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등을 밀리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웃음이 새어 나올 뻔한 걸 참느라 힘들었다·
‘어리긴 어리군·’
하긴 막 스물이 넘었으면 어린 것이 맞지· 감찰부장이라는 책임에 눌린 것인지 딱딱한 모습만 보이다가 나이에 맞는 모습을 보인 것 같아 만족스럽기도 하다·
애초에 그 어린 녀석이 딱딱하게 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만· 북방에서는 귀족이 맞나 싶을 정도로 유쾌하고 가벼운 아이였는데·
“각하 부탁드립니다·”
“칼 군·”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헤카테 양이 그렇게 떠난 이후로 달라졌지·
내 입장에서도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친 일이었다· 비록 다섯이 쓰러졌지만 분명 칼 군과 헤카테 양은 살아남았다·
심지어 칼 군은 역천자에게 당한 상처로 누워있으면서도 나를 결혼식에 초대할 테니 꼭 자리를 빛내달라 말할 정도였다· 그러니 안심하고 넘겼다· 이 두 아이는 그래도 살았구나 하고·
그런데 제도로 돌아오니 고개를 숙이며 애원하는 칼 군만 남았다·
‘에넨께서도 너무하시지·’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끔찍한 재앙을 줬다· 하늘 위를 걷다가 나락에 떨어진 기분이겠지·
그렇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는 칼 군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우스운 말이다· 이미 헤카테 양은 죽었는데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건가· 고작 무덤 위치를 눈 감아주는 걸로 무슨 유세인가·
‘차라리 그때부터 달랬어야 했는데·’
알아서 잘 하는 아이니 믿고 맡겼다 괜히 건드렸다가 오히려 상처만 커질 것 같아 지켜봤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생각이다· 좋게 말해서 믿은 거지 객관적으로 말하면 방치였으니까·
미래를 약속하고 결실을 맺기 직전까지 간 여인을 떠나보낸 슬픔 심지어 그 여인의 마지막을 거짓으로 기록해야 하는 참담함을 어찌 열아홉의 아이가 홀로 감당할까· 말이 좋아 성인이지 열아홉이면 아카데미 학생에 불과하다·
‘근처 어른이 다 이 모양이니·’
나나 재무성 장관이나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에 너무 익숙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신이 없던 칼 군을 계승 분쟁과 내부 숙청 때문에 업무 문제로 만나는 일이 잦았지·
차갑게 식은 차를 들이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를 그렇게 방치했으면서 알아서 잘 하기를 바라는 건 양심이 없는 거다·
부디 지금부터라도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
얘기가 끝나자마자 전승공은 내 등을 떠밀며 저택으로 돌려보냈다·
“지금 감정이 식기 전에 어서 해결하게· 누구에게라도 좋네· 마르게타 가족 부하 사용인 아니면 자네에게 신세를 진 사람이나 자네가 조언을 준 사람도 괜찮지·”
“각하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2년도 갑작스럽다고 하나?”
정말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 같았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기며 저택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전승공이 상황을 알려줬는지 장관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 청사로 오면 업무와 결혼하겠다는 걸로 간주하고 황태자 전하께 직접 보고드린다·
딱 그 말만 하고 바로 끊더라· 그딴 말을 들으면 가려던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지긴 하겠다· 애초에 갈 생각도 없었지만·
그건 그렇고 해가 이렇게 높은 때 퇴근하는 건 오랜만인데· 그래도 딱히 기쁜 조기 퇴근은 아니다·
‘망할·’
막막하다· 장관과 전승공이 보다 못해 조언을 줬으니 그 조언대로 움직이는 것이 맞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열려고 하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한테 털어놓은 전승공이 대단한 거지·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마르게타에게 그동안 품었던 것을 말해야 한다· 오늘 안에 말하지 않으면 2황자 곁으로 가겠다는 다짐까지 했다·
동시에 마르게타의 반응을 상상하면 다시 망설여진다· 그동안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고 화를 낼까? 어떻게 혼자 참았냐고 눈물을 보일까? 지금이라도 말해줘서 고맙다고 위로해줄까? 아니면 그냥 안아줄까?
가능성을 하나 둘 떠올릴 수록 망설임도 늘어났다· 내가 이 정도로 우유부단했다고?
‘애새끼 맞네·’
난 애새끼가 맞았고 50 넘은 장관의 눈도 정확했다· 연륜은 무시 못하는구나·
망한 것 같다· 이러다가 2황자랑 강제 정모할 것 같은데·
‘이렇게 가까웠나·’
그 와중에 오늘따라 가까운 것 같은 저택에도 도착해버렸다· 환장하겠네·
괜히 정문 앞을 어슬렁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할 용기가 생기지 않은 상황에서 들어갔다가 마르게타를 만나면 아무 말도 못할 것 같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평상시처럼 지낼 것 같다·
그건 안되지· 지금까지 밀린 것도 답답한 상황인데 더 밀면─
“오라버니?”
“응?”
뒤를 돌아보니 무언가 품에 가득 안은 루이제가 있었다· 뭐야 밖에 나갔었네?
그런 내 의문을 읽었는지 루이제가 품에 안은 재료를 살짝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뭐라도 만들려고요· 재료 좀 사왔어요·”
확실히 언뜻 보이는 물건들은 거의 식재료였다·
“어지간한 건 주방에 있을 텐데·”
“제가 조금 특이한 재료를 쓰잖아요·”
확실히 제과 동아리에서도 루이제가 쓰는 재료는 평범하지 않았지· 헤헤 웃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용기 남에게 무언가를 털어놓을 용기·
겨우 한 학기 알고 지낸 나에게 과거를 말할 정도로 용기를 낸 루이제·
“루이제 혹시 시간 있어?”
먼저 용기를 낸 사람에게 상담이라도 받으면 조금 나아지려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주말 동안 집을 떠날 일이 생겨서 일요일 회차를 급하게 작성해 예약을 걸었습니다· 휴재를 피하기 위한 작가의 몸부림이니 부디 독자님들께서 24시간 후 공개를 보고 노여워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이번 회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율연님! DNKE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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