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07
죽어가는 좀비들에게 포상금을 뿌린 날부터 지금까지 어지간하면 차장실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아마 마지막 날까지도 그럴 것 같다·
그야 상황의 마지막 인사이동 명령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몸과 영혼을 실시간으로 갈고 있는데 괜히 상사가 기웃거리면 수명이 빠르게 깎여나가지 않겠나· 그 느낌은 나도 잘 안다·
만약 내가 사무 처리의 스페셜리스트라면 저 가련한 좀비들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노력이라도 하겠다만 솔직히 차장이 주도하는 상황에 내가 개입하면 방해밖에 되지 않는다· 도움이 되지 못하면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현명한 말이다· 유능하고 성실한 상사가 되지 못한다면 무능하고 조용한 상사가 되는 것이 낫다·
–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니에요?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전부 태워 먹는 것보다는 좋지 않냐?”
그 말에 에르제베트도 반박할 수 없는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사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 얼마나 귀찮은지는 전대 감찰부장이 증명했다· 무능한 새끼는 아니지만 유능한 개새끼여서 아주 지랄맞았지· 에르제베트도 전대 감찰부장 얘기를 하면 질색을 할 정도니 당시 감찰부 소속 공무원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미친 새끼였지·’
개인적인 감정을 미뤄두더라도 그 새끼는 미친 새끼가 맞다· 막 감찰부장 자리에 오른 직후 전대 감찰부장이 남긴 자료를 보면 헛웃음만 나왔을 정도였다·
‘반역자 하나 찾겠다고 마을 하나를 밀어버리는 새끼가 어딨어·’
심지어 반역자가 그 마을에 있다고 확정된 것도 아닌데 그냥 밀어버리더라·
물론 감찰부장의 권한 중에는 지역 단위의 처형권이 있기는 한데 역대 부장들은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쓰지 않았다· 나도 지금까지 쓴 적은 없고·
그런데 그걸 밥 먹듯이 사용한 새끼는 그 새끼가 유일했을 거다· 오죽하면 2황자파가 실각했을 때 그 새끼는 가문까지 멸문 당했을까·
– 상사는 재미가 없으면 조용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요·
에르제베트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재미라는 말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맞는 말이다· 상사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최고다· 황제도 그걸 깨달았으면 좋─
– 아 정보부장도 조용한 사람이죠?
“어·”
상념을 끊는 에르제베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심문을 담당하는 1과와 정보를 담당하는 2과가 정보부로 갈 예정이라는 건 진작에 말해줬다· 이제 에르제베트의 직속 상관은 정보부장이다·
다행히 정보부장은 조용한 것을 넘어 존재감이 희미한 편에 속한다· 집무실 지박령이라 먼저 찾아가는 게 아닌 이상 보기 힘든 전설의 포켓몬· 적어도 부하를 귀찮게 할 성격은 아니다·
아니긴 한데···
“정보차장이 2과장이야·”
– 넹?
“감찰성 창립되면 2과장이 네 상사라고·”
애석하게도 지박령 부장을 대신해 과장들을 통솔할 차장이 2과장이다· 가슴 옹졸해지는 라인업이지·
– 저 퇴직해도 돼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에르제베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얘도 2과장이 동료가 아닌 상사가 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한 모양·
하긴· 어쩌면 상사인 나보다 2과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 에르제베트일 수도 있다· 같은 직급이니 붙어있을 때도 잦았고 비슷한 계통의 업무를 보니 협업을 할 때도 많았고·
“되겠냐?”
그러나 나는 에르제베트가 원하는 답을 돌려줄 수 없다· 휴가도 주지 못하는 나약한 부장이 어찌 과장의 퇴직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퇴직이 가능했다면 나부터 했다· 아무리 연인이라도 퇴직은 양보 못 해·
– 퇴직이 안 되면 이직은요? 아리아 선배도 황후궁으로 갔으니 시녀가 더 필요할 텐데 저 거기로 보내주면 안 돼요?
“안 돼·”
눈을 깜빡이며 불쌍한 표정을 짓는 노력이 가상하지만 그건 더욱 안 된다·
‘황후는 무슨 죄야·’
도대체 황후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에르제베트를 시녀로 달고 살아야 하는가· 둘이 의외로 친한 사이라는 건 알지만 친한 것과 시녀로 고용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게다가 황후는 얼마 전에 출산을 한 입장이라 안정을 취해야 하고 황후라는 고귀한 자리에 올라 황실과 제국을 보듬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황후 옆에 에르제베트가 있다? 에르제베트의 보필을 받는 게 아니라 에르제베트의 기행을 수습하느라 화병이 올 수도 있다·
연인에게 너무 가혹한 평가지만 연인이라 솔직하게 내릴 수 있는 평가다· 에르제베트를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더 큰 광기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는데 나도 못한 걸 황후가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양심 없는 생각이다·
“때가 되면 승진시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렇기에 애써 다른 방향을 제시하며 달랬지만
– 제가 승진하면 2과장도 승진하겠죠! 그럼 의미가 없잖아요!
논리적으로 완벽한 말이 날아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다 2과장 때문이다···
***
최고의 나날이다· 내 인생이 요즘만 같으면 신분이 평민으로 내려가도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복덩어리·’
요람에서 곤히 자고 있는 사랑스러운 아들 줄리안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몇 번을 봐도 나와 크리스티나를 쏙 빼닮았다· 솜털처럼 난 남색의 머리카락은 크리스티나를 닮아 아름다웠고 지금은 자고 있어 보이지 않는 푸른 눈은 나를 닮아 반짝였다·
벌써부터 사교계를 빛낼 미래의 레이디들에게 미안해진다· 우리 줄리안 때문에 그 레이디들이 상사병에 걸릴 걸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아비도 인생의 짝을 만나기 전에는 여러 레이디들을 울리고 다녔었지·
‘그것도 다 경험이겠지만·’
무슨 꿈을 꾸는지 꼼지락거리는 손을 보며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만약 내 아들이 레이디들을 등쳐먹으면 내가 앞장서 혼낼 테지만 단순히 연애 경험이 많은 건 흠이 되지 않을 터·
인기가 많은 것과 인성이 쓰레기인 건 별개의 문제다· 아무렴·
“라파예트·”
“아 크리스티나·”
하염없이 줄리안의 모습을 보는 사이 뒤에서 들리는 크리스티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배시시 웃으며 다가와 안기는 크리스티나· 그런 크리스티나를 마주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최고의 나날이 맞다·
“역시 아침부터 당신이 있는 걸 보니 좋네요·”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 말에 본능적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인생의 짝과 지내는 것도 사랑의 결실이 생긴 것도 행복한 일이나 그 덕분에 휴가를 쟁취했다는 것도 기쁜 일이다· 이렇게 아침부터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지 않나·
신혼 휴가에 양육 휴가 관료를 가혹하게 굴리는 행정부여도 결코 건드리지 않는 휴가를 연이어 얻게 되었다· 덕분에 감찰부가 감찰성 창립으로 분주한 와중에도 나는 평온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심지어 줄리안이 생길 때만 해도 감찰부가 성이 될 것이라는 건 예상도 못한 일이었다· 어쩌면 줄리안은 그동안 고생한 나를 위해 에넨이 내린 선물이 아닐까?
‘휴가가 끝날 즈음이면 창립도 마무리 단계겠지·’
뻔하다· 부장님을 대신해서 차장님이 일을 추진 중이겠고 차장님이 추진한 일을 부장님이 엎을 리는 없다· 그나마 변수가 있다면 정보부장인데 정보부장도 기존 정보부 업무로 죽어나가는 사람이라 굳이 차장님과 신경전을 벌일 사람이 아니다·
즉 감찰성 창립은 내가 끼어들 여지 없이 진행 중이라는 것·
‘완벽해·’
그러니 나는 모든 게 끝났을 감찰성에 유유히 출근만 하면 된─
‘응?’
버릇처럼 품 속에 넣고 다니던 통신구가 빛을 뿜었다·
아침부터 누구지? 아버지나 어머니? 아니면 장인어른이나 장모님이신가?
“라파예트 바론입니다·”
혹시 대화 소리에 줄리안이 깰 수도 있으니 일단 거리를 벌리고 통신구를 꺼냈다·
– 나다·
“부장님?”
그리고 예상 못한 인물의 등장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설마 부장님일 줄은 몰랐는데·
“아니 휴가 중인 사람한테 연락하기 있습니까?”
너무 예상 외의 연락이다· 휴가 중인 인물은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건드리지 않는 것이 감찰부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만일 부장님께서 과장들이 휴가 중일 때 업무적 연락을 하면 과장들도 부장님의 휴가를 화려하게 만드니까·
서로 죽지 않기 위한 최후의 배려· 그것이 감찰부의 휴가였거늘 부장님이 그 선을 넘어버렸다· 안타까울 노릇이다·
– 미안하다· 당장 전해야 할 말이 생겨서·
물론 부장님이 선을 넘었을 확률보다 위급한 상황이 터졌을 확률이 더 높다·
‘망했네·’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장님이 암묵적 규칙까지 무시하며 연락을 걸 정도의 상황이면 대체 무슨 상황이 터진 건가· 차라리 선을 넘은 거면 좋았을 텐데·
– 너 지금 어디냐?
“···일단 제도에 있기는 한데요·”
– 잘 됐네·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장 튀어올 수 있는 거리라 다행이라는 말이잖아·
– 어제 감찰성 간부 명단을 임시로 작성해서 폐하께 올렸는데 대상자 전원을 소집하셨다· 아무래도 가안대로 임명하실 예정인 것 같다·
무심코 침을 삼키고 말았다·
“저 부장님? 그걸 왜 저한테···”
짐작가는 내용은 있지만 애써 부정하며 입을 열었다· 방금 부장님이 한 말이 ‘그래서 대타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기를 바라며· 그런 말이라면 기꺼이 투덜거리며 도와줄 수 있다고 다짐하며 물었다·
허나 현실은 언제나 잔혹했다·
– 정보차장으로 네 이름 올렸어·
“····”
최고의 나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무성 청사로 이동하다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개 같네·’
개 같을 정도로 맑다· 내 속도 모르고 하늘은 그저 맑기만 하다·
“차장이요? 그럼 승진한 거죠? 축하해요! 정말 잘 됐어요!”
서글프다· 내 고통을 위로해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휴가 중에 출근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울상을 짓던 크리스티나마저 내 승진 소식에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라는 건 안다· 젊은 나이에 간부라는 자리에 오르고 간부가 되자마자 개처럼 굴렀던 감찰부 간부들이 특이한 거지─ 보통 승진은 관료 인생을 걸며 도전해야 하는 목표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감찰부다· 승진할수록 고통스럽다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본 증인이다· 그런 우리에게 있어 승진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마땅한 독이다·
‘차장?’
게다가 차장님이 서류에 파묻혀 사는 걸 본 입장에서 차장이라는 말처럼 끔찍한 단어는 없다·
미치겠다· 20대 과장도 분수에 넘치는데 20대 차장? 이게 말이 되는 건가?
– 3과장은 집행부장이다· 그냥 알아두라고·
하지만 차장을 넘어 부장에 오른 3과장을 떠올리니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래 내가 걔보다는 낫지·
그리고 20대 장관보다는 20대 차장이 훨씬 낫지·
‘하·’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휴가를 명분으로 배째기 vs 눈물을 머금고 승진 확정 받기
이것이··· 가장의 무게···
이번 회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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