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28
나도 모르는 사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고작 명예 교사 명예 졸업 따위가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아니 이제는 나한테 솔직해지자· 이건 고작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일이다· 농담으로 사용할 만큼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옛날에는 대학원 문턱에서 탭댄스도 췄었는데·’
슬며시 입술을 깨물며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둔 설움과 마주했다·
사람은 처음부터 없던 것보다 가졌다가 잃었을 때 더욱 절망하는 법· 이 세계에 오기 전의 나는 제법 유명한 대학에서 4년의 학업 기간을 가지고 잡음 없이 학사 학위를 받은 인텔리였다· 비록 학업 기간이 4년으로 끝나지 않고 플러스 알파가 추가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아무튼 대학 졸업장이 있는 지식인이다·
그런 내가 이 세계에 오고 나서는 미취학 성인 졸업장 없는 공무원 무식해도 출세할 수 있다는 상징이 되어버렸다· 조별 과제와 졸업 논문으로 고통받은 과거를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저 나이 스물이 넘은 현직 공무원이 뒤늦게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는 없어서 포기하고 있었을 뿐·
‘가질 수 있다면 가지는 게 맞지·’
허나 교장의 입에서 희망적인 발언이 나왔다· 내 인생 유일한 오점을 지울 수 있는 페디에게 ‘아빠도 아카데미 졸업 안 했으니 나도 공부 안 해도 돼?’ 라는 말이 나오는 걸 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장관에게 명예 교사 학위가 주어질 예정입니다·”
‘좋아·’
괜히 빙빙 돌려 말하지 않는 직설적인 정보 전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 아카데미의 명예 교사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과분한 이름이군요·”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졸업증이 아닌 교사증이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지식의 여부와 아카데미와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거라면 졸업이나 교사나 거기서 거기─
“장관께 드리는 건 교사증이 아니라 교사 학위입니다·”
···?
교장의 정정에 멀뚱히 교장을 바라봤다· 둘 다 같은 거 아닌가? 교사증이나 교사 학위나 거기서 거기 같은데·
‘다른 건가?’
당연히 다른 거니 교장이 정정한 거겠지만 교육 쪽과 연관이 없다 보니 차이를 모르겠다·
망할· 그런데 이러니까 진짜 미취학인 게 티가 나네·
사람이 공부를 해야 할 때 다른 걸 하면 이렇게 망가지는구나·
***
눈을 깜빡이는 장관을 보자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치 내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으니·
물론 당연한 반응이다· 장관은 관료 경력이 10년도 되지 않았으며 그 경력마저 전부 감찰 쪽에 쏠려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담당이 아닌 다른 분야에 능통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교사 학위라·’
잠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장관이 내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여 혼란스러워하는 만큼 나도 나름의 이유로 혼란스러웠다·
‘교육성에서 큰 것을 줬군·’
아카데미 명예 교사증 아카데미 명예 졸업증은 아카데미가 귀빈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아카데미의 권위를 통하여 상대를 치장하는 장식품이나 다름없다·
허나 명예 교사 학위는 명예 교사증이나 졸업증과는 차원이 다른 선물이다· 고작 아카데미의 권위가 아닌 제국의 권위를 빌려 대륙 전체에 과시할 수 있는 명예다·
명예 교사는 말 그대로 아카데미의 명예 교사에 불과하지만 제국이 보증하는 교사 학위는 대륙 학계 전체에 통용되는 것이니까·
“게르하르트 선생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장관의 혼란을 풀어주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이건 장관에게 있어 득이 되면 되었지 실이 되지 않는 소식이니 상세히 알려줄 필요가 있다·
“장관의 도움 덕분에 북방 연구에 큰 진척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는 대륙 역사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이니 교육성에서는 장관이 명예 교사 학위를 받는 게 마땅하다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 습니까?”
내 말에 장관은 다소 얼떨떨한 반응을 보였으나
“엄청난 걸 받았군요·”
이윽고 교사증과 교사 학위의 차이를 눈치챘는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관의 말처럼 이건 엄청난 선물이다· 물질적 재화를 제외한다면 제국 아카데미와 교육성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학문에 뜻을 품은 자들이 도전하는 견습 교사의 길· 그 길을 걷는 자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고 그중에서 노력과 재능 천운을 갖춘 자들만이 정식 교사 학위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장관은 그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에 도달했다· 제국이 보증하고 대륙이 인정하는 명예를 가지게 되었다·
‘미취학 명예 교사·’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장관은 아카데미에서 터득해야 할 지식이 부족한 것이지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아카데미 졸업 여부와 관계없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교육기관에 다닌 적 없는 사람이 명예 교사 학위를 가지다니· 세상을 오래 살다 보니 신기한 광경을 다 본다·
“정식으로 학위가 수여되는 것은 졸업식 때가 될 테니 미리 축하드립니다· 이제 대륙을 대표하는 학자가 되셨군요·”
“부끄러운 말씀입니다· 작은 도움을 높게 평가받아 과분한 명예를 받은 것인데 학자라니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장관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3년간 처절할 정도로 고생한 장관에게 만족스러운 선물이 된 것 같아 다행이다·
***
교육성의 빛나는 결단을 들은 이후로 세상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역시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는 교육성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어찌 이렇게 현명하고도 합리적인 결단을 빠르게 내릴 수 있을까· 제국 행정부서 서열 8위라는 이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눈 부시네·’
그러다 우연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말았다·
눈이 멀 것 같다· 저 거울에는 무려 제국이 보증하고 대륙이 인정하는 위대한 학자가 비치고 있으니까· 일개 인간의 눈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찬란한 존재다·
“내가 누구?”
그렇게 거울을 보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제국 명예 교사 학위 소유자·”
하·
듣기만 해도 짜릿한 이름이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행히 근처에 아무도 없어서 이렇게 자문자답을 해도 이상하게 볼 사람이 없다·
‘최고야·’
물론 조금만 이성을 되찾아도 많이 부끄러울 언행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 행복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
그야 명예 교사 학위라고 하지 않나· 이 세상의 교사 학위는 이전 세계의 박사 학위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다· 심지어 일개 교육 기관에서 인정한 학위가 아닌 국가 단위─ 그것도 제국이 인정한 학위다·
앞에 명예라는 단어가 붙기는 했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건 학위 그 자체니까·
‘이젠 미취학이 아니야·’
너무 감동스러운 일이라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이게 진짜 졸업증보다 대단한 물건이다·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엘리트 중에서도 교사 학위에 도달하는 사람은 극소수잖아·
이제 페디가 ‘아빠는 공부 잘 했어?’ 라는 말을 할 때마다 명예 교사 학위증을 보여주면 된다· 이 아빠는 무예도 뛰어나지만 학문에도 뛰어난 문 무 겸 비 라고 가르칠 수 있다·
‘새해에 선물이라도 보내야지·’
결심했다· 내년 새해에는 교육성 장관에게 진심 선물을 보낸다· 내 유일한 오점을 지우는 것을 넘어 영광스러운 이름을 준 사람인데 그 정도쯤이야 당연히 해야 할 도리다·
“주인님 식사하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너머에서 유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저녁은 평소보다 더 맛있을 것 같다·
다음날 점심· 어김없이 장관의 도발 연락이 날아왔다·
– 너 표정이 왜 그러냐?
그것도 난데없는 매도와 함께·
허나 동요하지 않았다· 과거의 무학력자 칼이었다면 저급한 도발에도 발끈하는 품위 없는 반응을 보였겠으나 대륙을 대표하는 지성의 별인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은 보다 여유롭고 품격 있는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전 원래 이 표정이었습니다· 이상하게 보인다면 각하의 마음이 평소와 다른 거겠죠·”
지극히 논리적인 말에 장관이 무어라 입을 열려다 참는 것이 보였다·
그래 이것이 지성의 힘이다· 고삐 풀린 짐승 같던 장관조차 무엇보다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논리에 굴복하지 않았는가·
‘격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이게 일반 졸업생 나부랭이와 교사 학위자의 격차다· 일개 졸업생 따위는 백 년을 발버둥 쳐도 좁힐 수 없는 격차지·
***
칼의 표정과 말투를 보며 깨달았다·
‘단단히 돌아버렸군·’
그것도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버렸다· 평소에는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와 기습적인 사고로 인해 현실을 도피했다면 지금은 과도한 행복으로 인해 어딘가 비틀어진 상태다·
‘이 정도로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심히 거슬린다· 미취학인 것을 놀리는 걸 포기하면서까지 교육성 장관의 의견에 동의한 거였는데 열등감의 깊이가 이 정도일 줄 알았다면 두고두고 놀렸을 거다· 이런 귀중한 놀림거리를 포기하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지나간 일이거늘·
“감찰성 장관이 3년이나 고생한 것도 있고 북방 문화 연구에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죠· 그러니 명예 교사 학위를 보답으로 주려고 합니다·”
“흠 감찰성 장관의 공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미취학자가 교사 학위를 가져도 괜찮습니까? 명예 졸업증 정도면 충분할 듯한데요·”
“고아도 장관을 하는데 미취학자가 교사 학위를 가진 게 대수입니까? 그냥 주시죠·”
게다가 구휼성 장관의 발언 때문에 그 자리에서 입을 여는 것도 힘들었다· 비겁하게 거기서 본인의 출신을 언급하면 어떻게 반대하라고·
– 이러다 페디가 아빠처럼 훌륭한 교사가 되겠다고 하면 어쩝니까? 우리 페디는 쉬운 길만 갔으면 좋겠는데·
‘미친놈·’
아무튼 여전히 망언을 쏟아내는 칼을 보다가 조용히 책상 위에 두었던 물컵을 입에 댔다·
훌륭한 교사는 무슨· 권력으로 학위를 강탈한 약탈자겠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고아가 장관을 하고 미취학자가 박사(교사) 학위를 따는 제국·
능력만 있다면 한계가 없다·
이번 회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세_154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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