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46
국경 지대에 위치한 귀족들이 투항한 덕분에 제국군은 아무 피해 없이 레온 왕국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무려 변경백에다 후작 하나 백작 둘이 합류했으니 국경이 국경 노릇을 할 수 있겠나· 자동문 수준을 넘어 그냥 문이 사라져버렸다·
“아르메인도 국경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비슷한 속도로군· 서두를 필요는 없겠어·”
그리고 제국군이 달리하텐 변경백령에서 회의를 진행하는 사이 아르메인도 유유히 레온 왕국에 발을 디뎠다·
‘대단하네·’
국경이라는 개념이 아무런 위력도 발휘하지 않는 기적의 상황에 감탄이 나왔다· 모든 국가의 경계가 약화되고 하나로 뭉쳐가는 것을 세계화라고 하던데 레온 왕국은 세계화를 상징하는 증거가 아닐까?
물론 우리는 국경을 열 생각이 없다· 나라 망할 일 있나·
“그래도 아르메인보다 굼뜰 수는 없으니 3시간 후에 다시 움직이도록 하지·”
“목적지는 어디로 정하시겠습니까?”
“리잔슈타트·”
6군단장의 지시에 참모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잔슈타트· 제국 국경과 인접한 레온 서부의 요충지이자 한때 레온 유일의 공작령이었던 곳·
그러나 지금은 정당한 주인이 없어 왕실 직할령─ 이라는 이름의 도시 연합체가 되어버린 기괴한 곳·
‘거기만 장악해도 절반은 끝난 거지·’
막말로 새로운 레온 왕가가 반제국 친아르메인 성향이라 할지라도 리잔슈타트가 제국의 영향력에 놓인다면 제국 본토는 레온의 위협에 노출되지 않는다· 도리어 레온 왕국이 유일 공작령의 이탈에 골골거릴 터·
‘괜찮은 놈을 찾아야 하는데·’
품속에 있는 리잔슈타트 공작의 인장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후작으로 적당한 유목민을 찾는 것도 힘들었는데 공작은 얼마나 머리를 쥐어짜야 적임자를 찾을 수 있을까· 상상도 하기 싫다·
마음 같아서는 항복한 순서대로 정하거나 가장 작위가 높은 놈한테 던져주고 싶으나 공작을 그딴 식으로 정하기에는 후폭풍이 두렵다· 당장 첫째 장인어른부터가 믿고 맡긴 물건을 신박하게 낭비했다며 격노하실걸·
“레온하고 직접 붙어보셨으니 거기 귀족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적당히 괜찮은 놈이 있다면 추천 좀···”
“내가 아는 놈은 다 죽여서 추천할 놈이 없다· 싹수가 보이는 적군을 살려둘 리가 있겠느냐·”
“····”
“왜 그렇게 보지?”
“아뇨 아무것도·”
솔직히 레온의 인재풀을 말려버린 것이 장인어른이라는 걸 생각하면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적당히 조지셨어야 내가 수월하게 일했을 텐데·
그래도 억울함은 어디까지나 억울함으로 끝냈다· 장인어른이 레온을 철저히 짓밟은 덕분에 30년 동안이나 동부 국경이 평온했던 것이니·
“저 각하·”
“왜 그러지?”
그렇게 이릉대전으로 폭망한 촉한을 보는 제갈량의 심정을 느끼려던 찰나 통신구를 만지작거리던 참모 하나가 급히 입을 열었다·
“달리하텐 변경백이 종군을 청했습니다·”
“종군?”
의외의 보고에 6군단장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나쁘지 않군· 허락하게·”
“예 각하·”
하지만 답변은 빨랐다· 변경백이 원정군에 합류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는지 6군단장은 변경백의 종군을 허락했다·
사실 원정군이 순도 100% 제국군이기보다는 레온 왕국군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새로운 왕가 옹립’이라는 명분에 더 알맞기는 하다· 게다가 아무리 항복했다지만 국경 책임자인 변경백이 후방에 남아있는 건 뒤통수가 가려운 일이기도 하고· 변경백이 미쳐서 국경을 닫아버리면 졸지에 포위되는 꼴이잖아·
그래서 6군단장은 변경백의 숭고한 선택에 찬사를 보낸다며 변경백이 회의실에 출입하는 걸 허락했고
“위대한 여정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어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변경백은 여전히 낮은 자세를 보이며 수뇌부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다만 딱 하나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눈 돌아가겠네·’
아까부터 변경백이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단순히 기분 탓으로 넘기기에는 너무 진한 시선이라 착각일 수가 없다·
‘누가 위인지 가늠하는 건가?’
짧은 고민 끝에 그럴 듯한 가설을 떠올렸다·
투항자 입장에서는 원정군의 정확한 서열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혼신을 다하여 사령관에게 청탁을 넣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사령관보다 위라면 변경백은 헛고생을 한 꼴이 되니까·
“변경백이 원정군에 합류한 것은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뜻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나 사령관 각하께서 황제 폐하의 뜻을 훌륭히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폐하께서 각하에게 중임을 맡긴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입을 연 내가 민망할 정도로 6군단장에게 찬사를 보냈다· 앞으로 투항자들은 물론 변경백처럼 종군하는 사람도 늘어날 텐데 그때마다 원정군 서열을 파악하겠답시고 눈치를 살피면 서로 귀찮은 일이지 않나· 어차피 원정군의 지휘권은 6군단장이 쥔 것이 맞으니 지금은 숙이는 게 맞다·
“부끄러운 말이군요· 폐하의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극찬에 움찔한 6군단장은 금방 표정을 가다듬고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투박한 군인이라도 군단장까지 오른 인물인 만큼 최소한의 눈치는 있다· 6군단장도 변경백이 눈치를 살피는 걸 알기에 내 행동에 맞춰주는 거겠지·
‘좋아·’
민망한 연극이었지만 이걸로 위계 질서가 확실해졌다·
***
원정군 사령관인 6군단장과 감찰관이라는 타일글레헨 백작의 대화를 듣고 확신했다·
‘백작이 위다·’
이 원정군의 실세는 백작이다· 아까까지는 긴가민가했지만 이제는 백작이 부정해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그야 다른 참모들과 고위 지휘관들이 정자세로 6군단장에게 보고하는 와중에 오직 백작만이 팔짱을 끼며 의자에 눕다시피 몸을 기대고 있었다· 철저한 위계 질서로 유명한 제국의 관료가 저런 모습을 보일 리가 없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변명의 여지가 있다· 백작은 제국의 장관인 만큼 원정이 끝나면 군단장보다 위지 않나· 원정군이라는 특이 상황 속에서 군단장과 동급이거나 아래 취급을 받는 것이 불쾌해 침묵의 항의를 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변경백이 원정군에 합류한 것은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뜻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나 사령관 각하께서 황제 폐하의 뜻을 훌륭히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폐하께서 각하에게 중임을 맡긴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말이군요· 폐하의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물론 방금 대화 덕분에 그 희미한 가능성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침묵을 지키던 백작의 덤덤한 치하 군단장의 정중한 대답· 누가 봐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다른 회의 참석자들도 백작의 치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만약 저 발언이 동급이거나 아랫사람인 주제에 나온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놀라운 일이다· 제국의 관료제가 맛이 갔다는 의미니·
‘백작의 심기만 거스르지 않으면 된다·’
투항자처럼 입지가 위태로운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이었다가 아군이 된 자를 온전히 믿을 사람은 한 번 국가를 배신한 자가 두 번은 하지 않을 거라 낙관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나는 꾸준히 의심과 견제의 눈빛을 받을 것이다·
그 눈빛을 극복하기 위해 종군을 청한 것이다· 나는 원정군의 뒤에서 수작을 부릴 생각이 없다는 것을 레온 왕국인들 앞에서 제국의 앞잡이라는 낙인을 자처할 것이라는 걸 선언했다·
그리고 앞잡이를 자처함과 동시에 실세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영지와 영민의 안전은 보장할 수 있다· 훗날 제국군이 물러나 달리하텐 변경백령이 조국의 증오와 원망을 받더라도 내 독단이었다며 홀로 짊어지고 갈 수 있다·
‘···이 선택이 틀리지 않기를·’
선택 하나하나에 나 하나가 아닌 모두의 목숨이 걸렸다 생각하니 미칠 노릇이다·
***
자신의 국적을 스스로 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만일 있다면 정말 웅대한 야망을 가진 사람이라거나 옹졸한 양심을 가진 매국노 정도지 않을까?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태어나기를 쿼로노스 왕국에 태어난 거고 눈을 뜨니 쿼로노스 출신 부모님을 가지게 되었다· 에넨께서 새로운 생명을 대륙에 뿌리다보니 우연히 걸린 곳· 딱 그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쿼로노스 왕국이다·
그래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귀족으로 태어났으니 국적이야 중요한 게 아니고 쿼로노스 왕국이 빈곤하거나 약소한 국가도 아니었으니까· 모든 걸 가진 삶은 아닐지언정 부족한 삶도 아니었다· 그거면 충분하지·
그렇게 평범한 귀족 자제로 살다가 어쩌다 보니 군에 투신하였고 어쩌다 보니 적성에 맞았고 어쩌다 보니 출세에 성공했다· 쿼로노스 왕국 최연소 군단장이 되어 가문의 자랑이라는 조부님의 극찬도 받았으니 군인으로서 할 만큼은 했다·
그래서 그동안 누린 행복에 대한 벌을 받은 것 같다·
“이걸 막히네·”
실소가 멈추지를 않는다· 허약한 레온 왕국 따위 금방 대쿼로노스의 일부로 삼아주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나선 자칭 선배는 자신이 허약하다는 걸 증명하고 말았다·
“시발·”
“각하· 품위를 지켜주십시오·”
“대가리에 뇌 대신 밀가루가 차있을 새끼·”
부관의 지적에 구체적이고 확실한 욕설을 내뱉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적을 과소평가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으나 눈앞에 보이는 요새는 국경에 널리고 널린 작은 요새에 불과하다· 솔직히 요새라는 단어를 붙이기도 민망한 군단이 진군한다면 군홧발 소리로도 무너질 정도의 아담한 방어 시설이다·
그런데 그런 요새를 군단 하나가 점령하지 못하고 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지독한 농담으로 알았을 정도였지·
“부관·”
“예 각하·”
“항명해서 뒤지는 것보다는 싸우다 뒤지는 게 좋겠지?”
“적어도 싸우다 죽어야 유족 보상금이라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굉장히 설득력 넘치는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군인이 까라면 까야지· 어차피 뒤질 운명이면 항명으로 인한 사살이 아닌 전사여야 명예라도 챙기지·
‘이딴 군대로 무슨 전쟁을 하라고·’
하지만 뒤에서는 국왕 전하의 욕도 하는 법· 속으로 정신 나간 명령을 내린 군 참모부를 욕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다·
‘우리가 언제부터 강군이었는데·’
다시 한숨이 나왔다· 언제부터 우리 쿼로노스 왕국군이 강군이었고 레온 왕국군이 툭 치면 무너질 약골이었나· 오히려 반대면 반대지 절대 그건 아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오늘날 군과 행정부의 높으신 분들은 자국의 역량을 과대평가 중이다· 분명 나 같은 일개 군단장보다 더 왕국의 역량을 세세하게 파악 중일 사람들이 대체 왜·
물론 우리가 레온 왕국에 개입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레온의 왕가가 교체되면 기껏 동화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점령지가 다시 분쟁 지역이 될 수 있으니 개입 자체는 논할 가치도 없는 상수다·
그런데 그 개입도 우리의 특기인 외교로 인한 수습이지 다짜고짜 군대를 들이박는 건 시발 대체·
“늙은 새끼들이 젊은이들만 사지로 몰아넣고 있어·”
“각하·”
“왜· 누구라고는 안 했는데·”
누가 고발을 한다면 ‘레온의 늙은이 새끼들 말한 건데요?’ 라고 하면 그만이다· 최연소 군단장을 말 한마디 때문에 자르기라도 할 거야?
“국경에서도 막히는데 제국이랑 아르메인은 어떻게 상대하려고·”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탄식에 부관도 침묵을 지켰다·
모르겠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높으신 새끼들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일단 뚫고 생각해야겠지?”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뭐 그래라·”
딱 30분 후 군단 하나를 막고 있던 요새가 함락되었다·
이렇게 쉬운 거를 그 새끼는 시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국가를 잘못 만나 신혼 중에 타국에 온 장관·
국가를 잘못 만나 불명예를 감수하는 변경백·
국가를 잘못 만나 현장에서 구르는 군단장·
와! 대환장쇼!
이번 회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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