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
“자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을게요. 저한테 뭐 할 말 없어요?”
“…죄송합니다.”
세뇌가 풀리자 정부 년 아니 이젠 년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지. 황다혜는 완벽히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로지 자오에게만 홀려 있었다는 소리.
아무리 세뇌가 풀렸다곤 하지만 그래도 정부 측에 서 있었던 사람이 그렇게 쉽게 사일로로 전향할까- 하고 걱정했는데
“그 개…같은 새끼들이!!!”
자신의 약혼자에 대한 기억으로 정부가 장난질을 쳤다는 걸 확인시켜주자 곧바로 정부에 대한 증오를 드러냈다. 파랑에게는 잘 된 일.
“자 그럼. 다시 얘기해 보죠. 먼저 저를 데려다가 고문하려던 이유는 뭐예요?”
“당연히 상부의 명령이었죠. B급 헌터 하나가 그 쪽으로 갈테니 고문해서 세계정부 측으로 전향시키고 안 되면 죽여버리라고.”
옆에서는 사일로 특제 거짓말 탐지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띠링 진실.
파랑이 제일 궁금했던 질문부터 던졌다.
“왜 하필 고문이었던 거죠? 사람을 전향시키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을 텐데. 당장 당신 상관인 자오 양이 나섰을 수도 있는 일 아니예요?”
“일반적인 회유로는 유파랑 헌터가 협력할 리 없다고 했습니다. 잠수를 막으려 하는 의지가 확고하다면서요. 그리고 자오는 단 하나의 위험이라도 존재한다면 어딘가에 나서지 않으려 해요. 주변에 자신 편이 없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죠.”
일단 진실. 자오에 대한 설명도 파랑이 아는 원작의 묘사와 일치한다.
아니 그러면 회유는 시도해보지도 않고 ‘회유 안 될 것 같으니 고문하자.’라고 결론을 내렸단 말인가?
미친 새끼들인가?
고문해서 정신을 파괴하고 전향시킨다니 뭐 성공률은 일반적 회유보다 높기야 하겠지만…. 그건 일반적 회유를 시도해본 뒤에 실행해도 늦지 않은 계획이지 않은가.
“그때 저한테는 고문 후 처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정확히는 고문 후에도 협력하지 않을 경우 처형이었습니다.”
어이가 없는 부분이다.
“왜 당신에게 그 일을 맡긴 거죠? 세뇌까지 해 가면서.”
“그걸 제가 알 방법은 없지만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아마 제 능력이 유파랑 헌터와 상성에 있다고 생각한 거겠죠.”
“세뇌당했을 당시의 기억은 있나요?”
“네. 선명하게요. 처음에 자오 그 인간에게 B급 헌터를 고문하라는 말을 듣고 명령에 거역했습니다. 언제부터 우리 특작과가 고문이나 하는 부서였냐면서. 징계 먹을 각오도 했죠.”
“그런 과 아니었어요?”
“당연하죠. 저희의 주 업무는 전투란 말입니다. 사일로나 협회를 상대로 한.”
하긴 그게 특수작전과의 이름에 더 어울리기는 하지.
“그러면 고문이나 심문을 전담하는 부서에 맡겨도 되지 않나요? 왜 특작과에 그런 걸 시킨 거죠?”
“제가 알기로 세계정부에는 그런 걸 담당하는 부서가 없습니다.”
“없다고요??”
“네. 저희에게 그런 일이 내려온 걸 보면 거의 확실시해도 되겠죠.”
이건 정말 의외인데. 거짓말 탐지기는 여전히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 왜요?”
“2대 대통령이었던 클로버필드의 방침입니다. 고문 금지.”
그런 방침도 정했었나.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는 원작에도 안 나왔으니.
그런 방침이 있었다면 고문 부서가 없을만도 하다.
슬레이어즈 소속 전 대통령이 ‘고문하지 말라’고 정해놨는데 무슨 명분으로 “저희 고문 다시 할게요.”라고 한단 말인가.
“그러면 거역한 다음에는 어떻게 됐나요?”
“제가 거역하자 자오가 비디오를 하나 보여줬습니다. 유파랑 헌터가 제 약혼자를 죽이는 걸 촬영한 비디오였죠. 그걸 보자마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당신을 미친 듯이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고문한 뒤에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요.”
이 시점에서 세뇌가 이루어졌던 모양. 아마 그 비디오라는 것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 기억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종합해보면 세계정부의 유파랑 고문 트라이의 진상은 이렇다.
유파랑을 살해하는 데 실패한 세계정부. 그녀를 어떻게든 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 전향을 시키든 죽여버리든 하기로 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회유로 전향을 시키자니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고문으로 노선을 변경.
이번엔 고문할 사람이 없으니 고위직의 강자를 한 명 세뇌해 일을 맡겼다. 라는 얘기.
‘병신들인가?’
이 새끼들에게는 간을 본다는 개념이 없는 것인가?
물론 어중간한 범죄 조직이나 마피아가 이런 계획을 세웠다면 그랬구나 했을 터다.
용케 머리 굴렸다고 칭찬까지 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정부가?
세계를 통치하는 정부치고는 너무 무모하고 과격하고 급진적인 계획이다.
원작에서 슬레이어즈 인원들이 최고 결정권자를 맡았을 때에는 굉장히 유능한 조직이었는데.
그때 세계정부가 보였던 초인적인 행정력과 정치력은 정말 압권이었다.
세계를 하나로 묶어 통치하겠다는 조직이 나타났는데 “살기만 좋으면 됐지 뭐.”라며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생겨날 정도였으니까.
당장 파랑도 1대 세계정부 대통령 강유리가 취임하자마자 살기 확 편해진 것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이 꼬라지는 정말 무언가에 홀렸다고밖에 볼 수 없는 광경 아닌가.
파랑이 황다혜에게 이 부분을 물어보았다.
“그러면 당신을 세뇌할 시점에 자오의 행동은 어땠나요? 어딘가 비이성적이라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였었나요?”
“아 네. 예전엔 안 그랬던 사람이 며칠 전부터 수상할 정도로 감정적이고 다혈질적인 면모를 자주 보였어요. 원래는 굉장히 냉철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는데.”
자오 양은 원작에서도 지능형 캐릭터로 등장한다. 사람들을 교묘하게 세뇌하고 그들을 절묘하게 사용해가며 한시우 일행의 추적망을 계속해서 따돌렸으니.
그런 그가 감정적이고 다혈질적인 면모를 보이다니.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현상.
“그 외에 다른 수상한 점은 없었나요?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한다거나.”
“아 갑자기 ‘바다와 물’에 애착을 가졌어요. 평소엔 쳐다도 보지 않던 어항을 사무실에 들이더니 나중엔 제가 들어갈 때마다 바다나 물에 관련된 그림이 늘어 있더라고요. 거기에 감정적인 행동까지 더해지니 정말 미친 사람 같았어요. 느닷없이 청사 내에 수족관을 만들려고 한다던가 소리를 지르면서 복도에 물을 뿌린다던가.”
“!!!”
느낌표!
바다에 수상할 정도로 애착을 가지는 세계정부의 고위 간부라.
“그게 언제부터죠?”
“한…일주일 전부터요.”
파랑이 아까부터 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사일로 인원에게 질문했다.
“세계정부에 자오를 세뇌할 만한 인물이 있나요?”
“아뇨.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없습니다.”
그러면 확실하다. 자오 양은 바다에 있는 무언가에게 홀렸거나 아니면 그 무언가에게 홀린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았다.
이성을 유지하면서 감정적으로 변하고 바다에 애착을 보이는 수준이니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현재 세계정부 대통령인 유성준이 멀쩡하다면 이 따위 사태가 터졌을 리 없으니 그가 최초의 원인제공자이거나 적어도 피해자인 것은 확실하다.
세계정부의 제일 윗대가리가 통째로 정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면 황다혜나 자오 양은 잘려나간 꼬리의 절단면쯤 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방금 파랑은 세계정부가 무언가에 홀렸다는 것을 확정지은 셈이다.
그러면 여태까지 보였던 비이성적인 행보도 납득이 간다.
“…알겠습니다. 제가 할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 유파랑 헌터.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 뭐. 본인도 홀렸던 거고 처음에는 거역까지 했다고 하니까.
여기서 황다혜에게 더 화를 낼 필요는 없어 보였다.
“…됐어요.”
“…방송 잘 보고 있어요. 이건 진짜예요.”
“아 감사합니다.”
파랑이 문을 열고 방을 나서자 이번엔 사일로 측의 다른 사람이 자리를 교대했다. 그는 세계정부의 조직도라던가 구성원 그들의 능력 같은 것들을 물어보는 듯 했다.
뭐 그건 나중에 사일로에서 알아서 정리한 다음 파랑에게 보내주면 되는 일이니까.
파랑이 방을 나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또 뵙는군요.”
“아 안녕하세요.”
홍콩에서 만났던 그 남성이다. 높으신 분이라던 그때의 말은 가짜가 아니었는지 주변의 사람들이 그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얻어낸 정보가 만족스러우셨나 봅니다.”
“네. 꽤나 만족스러웠어요.”
잠깐의 대화가 오고 갔다.
“…유성준이라. 그 친구를 안 만난 지도 너무 오래되었군요.”
“사적으로 아는 사이인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공적인 자리에서 만날 기회가 꽤 잦았죠.”
세계정부의 대통령과 공적으로 자주 만나는 사일로 측 인물이라.
파랑의 생각보다도 훨씬 높은 사람이었다.
“그자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나요?”
“아는 것이야 많죠. 하지만 유파랑 헌터가 관심을 가질 만한 정보는 저조차 없습니다. 이를테면 퍼스널 스킬이라던가 보유하고 있는 스킬 목록 슬레이어즈 승천 이후 행적 같은 것들은요.”
“으음….”
“확실한 건 그가 멀쩡한 상태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일 리는 없다는 겁니다. 세계정부의 대통령 자리는 힘으로 꿰찰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가 무언가에 홀렸을 거라는 상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이렇게 결정적인 증거가 나와버리니. 저도 약간 기분이 묘하군요.”
“그렇군요.”
그럼 그렇지. 세계정부의 대통령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파랑보다는 지략에 능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자가 그런 병신같은 계획을 맨정신으로 시행했을 리는 없지.
“유성준의 소식이 끊긴 것은 슬레이어즈 승천 다음날부터입니다. 어찌저찌 세계가 굴러가는 건 아마 상부의 광기가 아래까지 전달되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이겠죠.”
이만하면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어낸 것 같았다.
세계정부의 최상층이 뭔가에 홀렸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리고 홀린 그들은 감정적이고 과격하며 바다에 집착한다.
이 정도만 되어도 훌륭한 정보다. 파랑이 일단은 자택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
다사다난했던 8월 4일의 마무리였다.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조직들 사이에서 구르려니 아주 죽을 맛.
그래도 한 고비 크게 넘겼으니.
내일은 사과 방송을 킨 뒤에 기자와 인터뷰인가.
파랑이 수조에 누워 도로롱 도로롱 잠에 들…려는 순간.
툭.
파랑의 발치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아 이거.’
서선우가 저번 만남에서 건네주었던 USB다.
<나츠코의 회유는 불가능합니다. 유파랑 헌터. 거기에 더해 그녀가 지금 바다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는 순간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할 겁니다.>
그 증거로 이 USB를 건네줬더랬지.
파랑이 숙면을 취하려던 몸을 일으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래도 이것 정도는 확인하고 자자는 마음으로.
그리고 잠시 뒤.
파랑은 컴퓨터 화면에 떠오른 무수한 자료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고 말았다.
“…미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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