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
“으으아아아아악!!!!”
파랑이 괴성을 지르며 티탄에게 돌격했다.
1km의 신장을 가진 적에게 파랑은 먼지만도 못한 존재임이 분명하지만 이상하게도 티탄은 땅바닥을 뒹굴던 와중에도 고개를 홱 꺾어 파랑을 정확히 노려보았다.
그녀가 ‘위험 요소’임을 파악한 것이다.
푸른 보석이 박혀 표현된 티탄의 눈동자가 파랑을 매섭게 노려보며 빛을 뿜었다.
파랑은 저항이 없는 이가 저 빛을 쬐었을 때 어찌 되는지 안다.
즉시 멈추어 스스로 숨을 참아 자결하겠지.
[ 스킬 ‘워터프루프 새니티’ 가 발동 중입니다. ]
[ 스킬 ‘불침함(不沈艦)’이 발동 중입니다. ]
하지만 파랑은 멈추지도 않았으며 자결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티탄을 바라보고 돌진할 뿐.
그리고 그녀의 동공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사납게 불타오르는 파란색 안광이 피어올랐다.
티탄이 그녀를 막아내보기 위해 갖가지 수를 마구마구 써댔다.
입을 벌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토해낸다거나 몸에서 어마어마한 열기를 뿜어낸다거나 땅을 내리쳐 지면을 솟아오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랑은 아랑곳않고 그 모든 공격을 정면으로 주파했다.
거세게 뿜어져오는 물줄기도 끓어오르는 열기도 솟아오른 지면도.
그냥 뚫어냈다.
[ 바닷속의 모든 생물을 상대로 압도적 우위를 점합니다. ]
파랑의 퍼스널 스킬 ‘크라켄의 딸’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지켜지는 절대적인 규칙이 바로 <상태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원작 최후반부 하늘이 무너지며 온갖 천사와 악마들이 내려오던 때에도 상태창은 건재했다.
최종보스였던 신조차 상태창을 건드린다는 행위는 하지 못했으니.
설명이 애매모호하고 알아먹기 힘들지언정 거기에 적힌 내용이 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파랑은 바닷속에서 모든 생물을 상대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지 않은가.
그 사실은 앞으로 영원토록 변치 않을 것이다.
파랑도 이 사실 하나에만은 그 어떤 의심도 갖지 않는다.
일종의 ‘진리’인 셈이다.
목숨을 건 전투가 일상인 삶 속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 자기 곁에 있다는 것.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다 보니 헌터들 중에는 상태창을 숭배하는 이들도 소수 있다.
이미 ‘상태창 과의존증’이라는 정신질환까지 학회에서 심도있게 연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파랑도 ‘상태창’이라는 진실만큼은 절대 자신을 배반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끝나더라도 파랑은 바닷속에서 모든 생물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이 세계는 그런 그녀의 뒤통수를 한 대 거하게 때리고야 말았다.
생명체가 아닌 괴물을 그녀 앞에 등장시킴으로써 말이다.
크라켄은 티탄을 상대하던 파랑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티탄을 집어삼키기는커녕 휘감아 움직임을 봉하는 것조차도.
못 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 안 한 것이겠지.
크라켄이 티탄 따위의 움직임도 막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다.
파랑이 크라켄을 과신하지 않는 이유다.
처음으로 티탄을 마주하고 앨리스를 빼앗겼던 날 파랑이 느꼈을 충격이 상상을 초월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절망에 빠져 폐인이 되어버리거나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았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일어서서 싸우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두려움은 남아있다.
가끔은 숨은 채로 무서워 떨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돌덩이에 주먹을 휘둘렀다.
바위를 향해 작살을 던졌다.
산에 몸을 들이박았다.
그럴 때마다 몸에는 상처가 늘어났으며 멍이 들었고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로 그녀는 이 세계도 크라켄도 맹신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대신 다른 믿을 것을 찾기로 했다.
자기 자신이다.
상태창이 파랑을 ‘생명체를 상대로 강한 헌터’라고 규정했던가.
파랑은 그것을 거부하기로 했다.
생명체는 물론이고 티탄 같은 비생명체까지.
무엇이 되었든 그녀 앞을 감히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분쇄할 수 있는 존재가 되리라.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조차 모른다.
당연히 그 길은 멀고 험하다. 아직도 파랑은 단신으로 티탄을 해치우지 못하니까.
그러나 아무리 길고 험한 길이라고 해도 걸어나갈 수는 있는 법이다.
[ 스킬 ‘제트스트림’을 습득했습니다. ]
[ 스킬 ‘불침함(不沈艦)’을 습득했습니다. ]
[ 스킬. ‘블루 밤’을 습득했습니다. ]
…
…
파랑은 자신을 서서히 정의해 나갔다.
‘크라켄의 딸’이 아니라 ‘유파랑’으로 남기 위해서.
뒤로 뻗은 그녀의 주먹에 푸른 물살이 휘감겼다.
이대로 방울을 만들어 터트리는 것이 바로 [블루 밤]. 파랑이 애용하는 물폭탄 스킬이다.
하지만 그녀는 물을 모으는 대신 그것을 팔에 휘감은 채 회전시켰다.
점점 더 많은 물을 점점 더 빠르게.
이윽고 그녀의 팔을 중심으로 거대한 소용돌이가 형성되었다.
파랑이 팔을 앞으로 뻗었다.
마치 악을 향해 비행하는 히어로처럼.
콰르르르르르르-
소용돌이는 작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커져만 간다.
팔에만 위치하던 것이 전신으로 퍼져 이제 파랑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드릴이 된 것만 같다.
속도도 어마어마하게 빠름은 말할 것도 없다.
콰르르르르르르르-!!
그녀가 그대로 티탄의 미간을 관통했다.
마치 하나의 총알이 된 것처럼.
미간부터 뒤통수까지에 이르는 두께를 그대로 뚫고 나온 것이다.
파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느질하듯 티탄의 머리를 약 스무 번 정도 더 관통했으며 그 과정에서 여덟 개의 코어를 박살냈다.
그리곤 탈진.
힘이 빠져 추욱 물 속에서 가라앉는 파랑을 러셀이 부축해 전투에서 이탈했다.
약 30분가량이 지나 파랑이 눈을 떴고 그녀는 온 몸의 코어를 격파당해 빛이 되어 사라지는 티탄을 볼 수 있었다.
남은 것은 눈 역할을 하던 집채만한 노란색 보석 하나와 반지름 약 50m의 마석.
당연하게도 앨리스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티탄 토벌 완료.
수천 구는 되어보이는 뼈 인형들이 나타나 마석을 수거해 갔다.
바다 깊은 곳에 있는 공간에 박아둘 것이다.
땅 위로 들고 올라가보았자 혼란만 가중시킬 테니.
돈? 언제부터 그딴 걸 신경 썼다고.
보석은…특별히 둘 곳이 있었다.
“디에고 부탁할게.”
거대화한 디에고가 보석을 한 손에 쥐고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나머지 오케아노스도 차례로 해산.
집으로 돌아갔다.
#
파랑의 집 침실 수조.
그곳에 누운 파랑의 눈이 말똥말똥하다.
오늘 잠을 자기는 글렀다.
티탄을 잡는 날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고민거리 때문이다.
크라켄과 크라켄의 딸이라는 자신의 스킬.
그녀는 처음에 크라켄의 딸이 비유적 표현인 줄로만 알았다.
크라켄은 그냥 관념적 비유일 뿐이라고.
실제로도 원작 소설에서는 ‘하데스의 딸’이나 ‘현무의 제자’ 같은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연관된 퍼스널 스킬들이 마구 등장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도 이제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크라켄이라는 것은 정말로 존재하고 자신은 그것과 어떤 식으로든 ‘진짜로’ 연관되어 있다고.
근거 따위는 없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그럴 것 같다.’라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가설의 가장 강력한 근거이다.
어떠한 외부적 요인 없이 파랑의 안쪽 어딘가에서 기인한 이른바 본능이라는 뜻이니까.
정말 전생의 인터넷에서 보았던 크툴루인가 뭔가 하는 외신이라도 되는 것일까.
파랑의 머릿속에서 무수한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그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조각상이 토벌되고 나흘 뒤 남태평양.
남위 48도 서경 123도.
전문 용어로는 해양도달불능점 세간에서 이르기를 ‘포인트 니모(point nemo)’.
가장 외로운 바다 가장 고립된 바다 가장 조용한 바다.
지구상의 어떤 땅 위에서도 가장 먼 바다.
디에고가 보석을 들고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앞에는 특이한 구조물이 하나 있었는데 집채만한 푸른 보석이 마치 스톤헨지처럼 둥글게 땅에 박혀 있는 모습이었다.
그 수가 여덟.
디에고가 들고 온 보석을 땅에 박아 아홉 개를 만들고는 위치를 조금씩 조정했다.
그리고는 축소.
둥글게 땅에 박힌 보석들 가운데로 그가 걸어갔다.
바닥에는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산호들이 깔려 있었는데 보석에 굴절되어 빛이 사방팔방 퍼져나가는 것이 퍽 아름다웠다.
저벅 저벅 우뚝.
그가 원의 정가운데에 멈춰서서 그곳에 위치한 석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미 파랑을 포함한 다른 이들이 다녀갔는지 주변이 깔끔했다.
석판 옆에는 새것 같은 유리구슬이 하나.
앨리스가 사용했던 무기다.
마지막으로 다녀간 파랑이 정성스레 닦아 둔 것이다.
앨리스 멜빌 1999. 3. 5. –
사망 일자가 적히지 않은 비석.
아래에는 묘비명 대신 한자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落月屋梁
낙월옥량.
떨어지는 달빛이 처마에 들다.
소중한 친구를 향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디에고가 빛나는 산호를 꺼내어 묘비 주변에 뿌렸다.
심해. 햇빛조차 들지 않는 깊은 곳에서 조용히 달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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