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107호, 관문의 방 – ‘퍼펙트 라이프’ (34) Fin
– 엘레나
정신없이 가인이의 손에 이끌려 불타는 극장을 가로질렀다.
두려움 속에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방에 비명 지르며 도망가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왜 하필 오늘?
끓어오르는 울화를 참으며 달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금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당연히 극장 입구로 나가서 거리로 가는 것 아니었어?
가인이가 날 끌고 간 장소는 극장 후문과 연결된 골목이었다.
“저기···. 가인아?”
“응?”
“여긴 어디야? 거리 쪽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어라? 정신없이 도망가다 보니 조금 이상한 곳으로 왔나 봐. 그렇지만 극장 쪽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이쪽으로 더 가야 하지 않을까?”
이해했다. 가인이도 무서워서 정신없이 뛰었을 테니까.
하지만 골목 쪽은 평소에 갈 일도 없고 치안도 안 좋은 지역이라 조금 불안했다.
— 또각.
아직은 초저녁. 어슴푸레 흔적이 남은 태양 빛이 있어서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 또각.
공연은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난데없이 화재에 휘말려서 도망이라니! 너무 운이 없는 것 아니야?
— 또각.
“엘레나.”
“응?”
“즐거워?”
“또 그 질문? 바보 아니야? 극장이 불타서 도망 나왔는데.”
“아쉽네.”
“… 그래도 지금은 그리 나쁘지 않아.”
“그래? 그런데 엘레나의 구두 사이즈가 좀 안 맞나봐. 구두 소리가 크네.”
“응? 내 신발은 맞춤형이라 그럴 일이 -”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아서 뒤로 돌아섰다.
골목길 끝자락. 석양을 등지고 선 이상한 복장의 사람이 보였다.
갑자기 사람의 손에서 빛나는 날붙이가 튀어나왔다.
“대 대체 무슨!”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인이가 내 손을 잡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오늘 대체 뭐냐고!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대체 어디로 가는 중이지? 전혀 모르겠다.
그냥 내 손을 잡고 이끄는 가인이만 따라갔다.
가인이도 이곳 지리는 잘 모르는 것 같았는데? 어떡해? 도와줄 사람은 없을까?
— 팅!
또다시 날카로운 무언가가 날아들어서 우릴 스치고 갔다.
가인이의 옷자락이 살짝 찢어지더니 몸에서 피가 났다.
그 순간 가인이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으윽! 이 거리에서 맞추다니 진짜 미쳤나?”
“가인아! 괜찮아?”
“빨리 달리자. 더 빨리!”
— 퉁!
갑자기 바닥에 숨겨져 있던 실이 팽팽해지며 날 넘어트렸다!
“아앗!”
화들짝 놀라며 일어서려는 순간 날카로운 칼날이 날 스쳤다.
순식간에 다리와 허벅지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화끈거리는 통증과 숨 막히는 두려움이 날 덮쳤다.
신기하게도 실을 피해낸 가인이가 바로 옷을 찢어서 내 상처를 감쌌다.
가인이는 어딘가 울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날 지키지 못해서? 너무 왕자병 같은 생각 아니야?
…
힘들어. 정말 너무 힘들다. 이상하다. 오늘은 분명히 행복한 하루가 되었어야 했는데···.
극장에선 불이 나고 골목에선 로브를 뒤집어쓴 채 칼을 던지는 미친 사람이 쫓아오고 덕택에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정신없이 뛰느라 숨이 멎을 것 같다.
결국 도저히 더 움직일 수 없어서 벽에 기댔다.
상대도 지친 걸까? 우릴 쫓아오던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헥··· 헤엑···. 괜찮아? 오늘은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난 괜찮아. 그보다 아리가 걱정인데.”
“무슨 말이야? 아리도 극장에 왔어?”
“아 왔지. 사실 아까도 봤어.”
“아까도 봤다고?”
“응. 어떤 높으신 분이 불러낸 경찰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아리를 잡아가더라고.”
“에? 높으신 분? 무슨 말이야?”
가인이는 그냥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학교에 거의 왔어. 조금만 더 걸으면 돼.”
“학교? 이쪽 길이 학교로 가는 길이었어?”
“응. 워낙 골목이라 학생들은 잘 쓰지 않는 길이라고 하더라고.”
우리는 말없이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새 해가 지고 기울어진 초승달이 밤하늘에 걸려있었다.
소음이 들려온다. 아주 요란하고 폭력적인 소음.
수많은 사람의 비명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도저히 발을 더 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멈추어 섰다. 여기서 왼쪽으로 쭉 가면 집이니까 –
— 탁.
“가인아?”
“학교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
“이상한 소리가 들려. 우리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학교엔 선생님들이 계시잖아? 학교로 가는 게 안전할 거야.”
그 말과 함께 가인이가 다시 내 손을 잡고 학교로 이끌었다.
원래 이렇게 적극적인 성격이었나? 오늘의 가인이는 정말 이상하다.
*
거의 끝나간다. 엘레나의 표정에 우울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최대한 조심해서 짠 계획이었지만 위기의 순간은 많았다.
나름대로 우리 정체를 숨겨가면서 엘레나의 꿈을 망쳤음에도 변수가 끝없이 발생했다.
극장에선 갑자기 사냥꾼들이 나타나서 페로가 황급히 도망가야 했다.
골목에선 뜬금없이 경찰이 나와서 로브를 쓴 아리를 잡아갔다.
우리 중 최고의 ‘방화 전문가’ 아리의 이탈은 꽤 큰 타격이다.
관리국에서 방화하는 기술만 전문적으로 배운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아리가 아니었다면 애들 셋이서 건물들을 연달아 태워 먹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이 모든 과정은 빌드업에 불과하다.
결국 결정타는 내가 먹일 테니까.
*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전체에서 솟아오르는 불길이 너무나 거대해서 그냥 넋을 놓고 바라보게 만들었다.
귓가를 찌를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사방에 가득하다.
열기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뜨겁다.
연기는 머리를 아프게 할 정도로 독하다.
오늘은 대체 왜 이럴까? 단지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학교에서 즐겁게 지내고 좋아하던 사람과 극장에서 공연도 보고!
그냥 영원히 반복될 행복한 하루가 있길 바랐을 뿐인데.
넋이 나가 있던 내게 가인이가 또 이상한 질문을 했다.
“엘레나.”
“응?”
“즐거워?”
“… 지금 나 놀려? 이젠 조금 화가 나려고 해.”
“미안해. 여러모로 미안해. 하지만 이제 곧 끝날 거야.”
끝난다니? 대체 뭐가 끝난다는 이야기일까? 그리고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이해하기 어렵다. 가인이는 뭔가 마음을 굳히기라도 한 듯 내 앞으로 움직였다.
대체 뭘 하려는 거야?
— 피요오오오!
천지를 뒤흔드는 엄청난 충격파.
그야말로 살갗이 흔들린다고 느껴질 정도의 굉음과 함께 담벼락을 무너트리고 괴물 새가 나타났다.
압도적인 위압감 앞에 내가 당황하는 순간 –
날 밀치고 가인이가 앞으로 나섰다.
가인이는 침착하게 새를 바라보았다.
새는 이상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인이를 직시했다.
“가 가인아 도망쳐! 도망쳐어어!”
*
계획의 끝이 다가왔다. 그로테스크에게 손짓했다.
이 녀석 평소엔 날 엄청나게 싫어하지 않았나?
그런 주제에 막상 제대로 갚아줄 수 있는 기회가 오자 페로는 주춤거렸다.
쓸데없이 중요한 순간에 마음이 약해지는구나.
페로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다시 한번 손짓했다.
결국 페로도 결정을 내렸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발톱이 달린 거대한 발이 거칠게 움직이며 내 배를 걷어찼다.
…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온몸에 번개가 내리치는 고통이 나를 마비시켰다.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충격 속에서 덜덜 떨면서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엘레나는 하염없이 울면서 기어 오듯이 내게 다가왔다.
울고 있는 그녀를 보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한때는 이 모든 인형극을 엘레나의 죽음으로 끝내는 게 어떨까 생각했지.
하지만 의미 없다. 그 누구보다도 꿈에 깊이 파고든 그녀는 누구보다도 전능한 힘을 얻었다.
설령 죽더라도 다시금 주제만 바꾼 다른 꿈으로 도피하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그녀에게 ‘피할 수 없는 슬픔’을 안겨야 했다.
이 무대에서 전능에 가까운 힘을 얻은 소녀가 그 전능한 힘으로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경험하게 만들어야 했다.
“가인아! 가인아! 조금만 조금만 참아. 곧 의사들이 올 거야.”
그렇겠지. 엘레나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어디에선가 의사를 불러내서 이런 부상을 입은 날 살릴 수 있겠지.
그래서 나는 얼떨결에 신이 된 소녀의 힘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한 번의 클릭을 했다.
/탈출하시겠습니까? (Y/N)/
Y
서서히 내 몸이 흐릿해진다.
내가 사라짐을 느낀 엘레나가 넋이 나가는 광경을 보며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엘레나 오늘은 미안했어. 우리 나가서 봐.”
의식이 흐릿해진다.
*
– 엘레나
천천히 가인이 사라졌다.
천천히 페로가 사라졌다.
아마도 어딘가에 있었을 아리와 송이도 사라졌겠지.
…
부유하는 정신이 서서히 떠오른다.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켜 세워서 주변을 돌아봤다.
불타는 학교 불타는 극장 수없이 많은 인명 피해.
어차피 내 꿈이 빚어낸 무대라지만 정말이지 다들 화려하게 일을 저질렀구나.
이미 내가 ‘소환’해낸 의사들이 달려오는 광경이 보였다.
의미는 없다. 의사들이 치료할 사람은 이미 밖으로 나갔으니까.
아아···.
이제는 이제는 나도 더 이상 이 꿈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던 동료들이 전부 사라진 이 세계는 더 이상 ‘퍼펙트’하지 않았으니까.
눈앞에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한 번의 클릭과 함께 세상이 무너졌다.
*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72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1 107호(관문의 방)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눈앞에서 상태창이 깜빡거리며 정신이 들었다.
아니!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돌아온 상태창을 보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날짜도 엄청나게 많이 지나갔다.
분명 네 번째 시련까지만 해도 47일인가 48일인가 그 정도 아니었나?
마지막 시련에서만 3주를 넘게 썼다.
뒤늦게 주변을 돌아봤다. 기묘하게 새하얀 공간.
방에는 네 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이게 ‘퍼펙트 라이프’의 정체였어?
무슨 호텔이 만들어낸 아득한 초 마법이 어쩌고 –
아니었다.
천지창조의 위대한 힘의 편린을 필멸자에게 나눠서 어쩌고 –
아니었다.
퍼펙트 라이프의 실체는 그보다 훨씬 뻔하고 하찮았다.
우리 목 뒤에는 영화에서 종종 봤던 구멍 같은 게 뚫려 있었다. 구멍에는 케이블이 꽂혀 있었다.
— 픽!
또 한 명이 케이블을 풀어내며 일어났다.
아리는 황망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본 후 허탈한 반응을 보였다.
“그냥 가상 현실이었네. 난 또 진짜 세계라도 만든 줄 알았잖아.”
“케이블을 뽑아낸 구멍은 여기서 나가면 없애주겠지?”
“없애주지 않으면 앞으로 그 구멍으로 핸드폰이나 충전하면 되겠네.”
“…”
송이와 엘레나도 건너편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아리는 조금 불안해했다.
“마지막에 우리가 엘레나에겐 좀 심했던 것 같은데? 화내진 않겠지?”
“화내면 그냥 좀 듣자.”
우리는 그 상태로 벽에 기대서 멍하니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이와 엘레나도 깨어나서 우리 쪽에 다가왔다.
엘레나는 화내는 대신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마지막에 욕심을 부려서 다들 고생시키고 말았네요.”
“아니 아니에요! 엘레나 언니 잘못은 아니에요. 저도 머무르고 싶었는걸요.”
“이런 일로 매번 사과하고 그런 촌스러운 짓 하지 말자. 어차피 이 호텔에서 우린 수없이 실수하고 누군가의 손에 도움을 받을 테니까.”
나는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 하는 상황 아닌가 싶다가 그렇다고 사과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마지막 시련을 겪고 나자 엘레나 얼굴을 보기가 너무 어색했다. 엘레나도 날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우리가 다시 자연스럽게 대화하기까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던 중 허공에 홀로그램 창이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관문의 방이 준비한 다섯 시련을 모두 통과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기다려온 영웅의 풍모! 위대한 행보의 시작!
이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시련 ‘도플갱어 열차’는 여러분이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홀로 살아남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두 번째 시련 ‘마녀의 숲’은 다친 동료를 앞에 두고 냉정한 결단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세 번째 시련 ‘지킬 앤 하이드 게임’은 여러분의 순발력과 판단력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네 번째 시련 ‘에스퍼 호의 비밀’은 여러분이 배 속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고 올바르게 대응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다섯 번째 시련 ‘퍼펙트 라이프’는 여러분이 거짓된 환상을 이겨내고 가혹한 현실에 맞서기 위한 마음가짐을 갖췄는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그 모든 능력을 입증하셨지요.
곧 관문의 방이 종료됩니다./
기나긴 알림창을 보고야 깨달았다.
끝났다.
이 길고 길었던 관문의 방의 여정이 마침내 끝을 맞이했다.
그냥 미친 사람처럼 바닥에 드러누워서 한없이 웃었다.
날 보고 황당해하던 다른 사람들도 곧 근처에 누워서 같이 웃기 시작했다.
1층 107호. 관문의 방.
드디어 끝냈다!
서서히 공간이 무너져간다.
꽤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렸다.
진철 형 묵성 할아버지 승엽이 은솔 누나.
나가서 해줄 말이 아주 많다.
공간이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 알림이 떴다.
/시련을 이겨낸 이들에겐 보상이 필요한 법.
한 장의 티켓 한 벌의 옷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남은 여정에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또한 관문의 방에서 가장 큰 기여를 쌓은 분에게 특별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 또한 순리겠지요./
어깨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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