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 202호, 저주의 방 – ‘인어공주’ (4)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100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2 202호 – 저주의 방 ‘인어공주’
현자의 조언 : 2]
– 한가인
성녀와의 면담 후 시나리오가 갱신되며 해신 섬에서 성녀와 관련한 소문을 모아보라는 힌트가 나왔다. 하지만 이 힌트는 생각보다 실천하기 까다로운 내용이었다. 섬의 주민들이 우리가 나가기만 해도 경계심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런 상황에서도 문제없이 정보를 모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마도서의 힘으로 어인족의 몸을 빌릴 수 있는 나다.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관공서에 일을 보러 온 어인 청년의 몸을 잠시 ‘대여’하기로 했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지나가던 청년을 덮쳐서 순식간에 기절시켜 소리 없이 리무진으로 끌고 왔다.
할아버지가 납치해온 어인 청년을 관찰하던 의사 선생님이 의견을 냈다.
“잠깐 관찰 좀 해도 괜찮겠습니까?”
“무슨 관찰이요?”
“아까부터 ‘어인’이라는 종족을 계속 관찰해왔는데 좀 이상해서 말입니다. 몸의 구조를 조금 자세히 보고 싶습니다.”
“상현 씨 이 남자가 사라지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 난리가 날 거야. 그 전에 가인이가 이 사람 몸을 빌려서 정보를 모아야 해. 시간이 많지 않아.”
“10분이면 충분합니다. 저는 이 관찰이 이 방의 진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우리는 의사 선생님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잠시 기절한 청년을 심해의 성녀 혹은 도지사가 내어준 손님 방의 침대에 눕혀서 의사 선생님이 어인족의 몸을 관찰할 수 있게 했다.
“이해하기 어렵군요. 정말 이상합니다.”
“뭐가 말이죠?”
갸웃거리던 선생님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너무 ‘인간’ 같습니다.”
“네?”
“어인족에 대한 자료를 은솔 양께 받아서 읽어봤는데 이 세계관 내에선 바다의 신이 해신 섬을 일으키며 본디 바닷속에 살던 심해의 일족을 육지로 끌어올렸다고 하더군요.”
“그렇죠. 자기들 나름대로는 인간보다도 지성체로서의 역사가 길다고 하던데.”
“한마디로 인간과 전혀 다른 진화를 거쳐온 생물이라는 이야긴데 그런 것 치고는 너무나 인간과 닮지 않았습니까?”
“어···. 그 부분에 대한 설명도 있지 않았나요? 어인들의 태고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지만 이미 지상에 적응한 지성체인 인간의 모습을 닮도록 신이 변형시켰다고 하던데. 신이 인간과 닮게 재창조한 셈이니 닮은 게 당연하죠.”
“그걸로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
“잠까안! 상현 씨? 시간이 없다고 했지?”
“죄송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물러나고 나는 즉시 슬슬 깨어나려던 청년의 몸을 ‘빌려서’ 관공서를 나섰다.
막상 청년의 몸을 빌려 시내로 나오자 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나 의사 선생님이 술집이나 음식점 등 장소를 제시해주긴 했지만 인간과 문화가 다른 어인족도 술집 같은 장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낼지 모르겠다.
[58:17]
이 잠깐 사이에 2분이 지났네. 아무래도 아껴둔 힘을 또 하나 써야 할 모양이다.
[조언 : 2 -> 1]
‘대체 어디로 가야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
[종일 혼자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누군가 차에 탈 때마다 수다를 떠는 직업병이 있다.]
종일 혼자 차를 운전하는 직업 이 때문에 손님이 탈 때마다 이런저런 말을 거는 것으로 유명한 직업. 택시 기사다.
*
택시를 타고 타고 또 탔다. 대충 아무 지역이나 말하며 가자고 한 후 택시 기사에게 살짝 성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서 반응을 살폈다. 별말 없이 운전에 집중하는 사람이면 바로 내렸다. 이렇게 택시 기사 고르기만 40분 가까이 반복한 후에야 드디어 말이 많은 택시 기사를 찾아냈다.
“기사님 해신 항 맞은편 은행으로 가주세요.”
“네에~”
이제 나도 요령이 붙었다. 다짜고짜 성녀의 이야기를 꺼내기보다 성녀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주제를 꺼내야 한다.
“아~ 이놈의 항구는 개축공사 한다더니 대체 언제 공사 끝나는지 모르겠네!”
“손님 그거는 잘못 생각하시고 있는 겁니다.”
“예?”
이걸 시작으로 기사는 마치 물정 모르는 젊은 청년을 훈계하듯이 항구에 얽힌 청성 그룹의 사악한 음모와 이걸 막기 위한 성녀의 탁월한 판단력을 한참 동안 숭배하듯이 떠들어댔다.
…
[09:24]
10분도 남지 않았다.
잘못 골랐나? 내가 알아내야 하는 건 성녀에 대한 ‘불온한 소문’인데 이 인간 아니 이 어인 택시 기사는 말이 많은 것까지는 좋은데 성녀 지지파인 듯하다. 조금 떡밥을 더 던지자.
“아니~! 기사님 말도 알겠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요즘 성녀님은 무리수를 많이 던지시지 않았습니까?”
“젊은 친구 말조심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호칭이 ‘손님’에서 ‘젊은 친구’로 바뀌었다. 조금 더 건드려보자.
“아무리 그래도 청성 그룹 후계자라는 사람을 덜컥 죽이신 것은 -”
— 끼익!
차가 도로 한복판에서 멈추더니 갑자기 옆 골목으로 방향을 튼 후 멈췄다.
“…”
“…”
“자네 내 직업을 떠나서 인생 선배로서 딱 한 마디 하지.”
“…”
“그 입! 그 주둥이! 그 붕어 같은 주둥아리를 조심하지 않으면 자네 삶에 아주 애로사항이 많을 것이여! 알겠어?”
“뭐 제가 말실수라도 했습니까?”
“해신께서는 세 명의 딸을 두셨지.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따님은 세레나데님 뿐이시네. 다른 두 분이 어디로 가셨다고 생각하나? 성녀님은 자네 생각보다 무서운 분일세. 자네가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필터를 거치지 않고 쏟아내서는 안 되는 이유지! 내가 독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면 자네는 내일 싱싱한 횟감이 됐을 것이여.”
기사는 나에게 돈을 받지 않을 테니 그냥 내리라고 했다. 물론 나는 마음속 깊이 치솟는 기쁨 덕분에 기꺼이 돈을 내고 내렸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지만!
성녀 세레나데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해신의 딸을 숙청하고 권좌에 앉았다. 이게 우리가 진행 중인 시나리오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
“이상이 제가 알아낸 정보입니다. 참고로 빌렸던 몸은 관공서 근처에 올 때쯤 빙의 시간제한이 끝나서 풀어줬습니다. 혹시 문제 될 일은 없을까요?”
할아버지가 문제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뒤에서 덮쳐서 즉시 기절시켰으니 그놈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잘 모를 게다. 아마 날씨가 더워서 기억 착란이라도 겪었나 하겠지. 설령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에 당했다는 걸 알아도 우리가 범인이라는 건 모를 테니 문제없다.”
은솔 누나가 내 정보를 듣고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세레나데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두 딸을 숙청하고 섬의 권좌에 앉았다. 이게 그녀가 숨긴 비밀일까? 이 정보와 지금 우리가 풀어야 하는 살인사건의 비밀이 무슨 관련이 있지?”
의사 선생님도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나름대로 세워본 가설이 있긴 합니다만.”
“말해봐.”
“이 섬의 상황을 보시죠. 초자연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상식선에서 보면 의외로 흔한 구도 아닙니까? ‘육지’의 침략자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육지와의 교류에 의존하는 현대의 많은 섬과 닮았습니다.”
“육지와의 교류에 의존한다라···.”
“섬에 도착하고 아까 관공서를 보면서 다들 무슨 생각 하셨습니까? 생각보다 너무 현대적이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래. 그냥 21세기 제주도 같아.”
“아마 이 섬엔 두 가지 세력이 형성되었을 겁니다. 육지와의 교류를 강화하려는 집단과 육지를 배척하려는 집단 말이죠. 흔한 일입니다.”
파편화되었던 정보가 하나로 모여들며 하나의 거대한 가설이 만들어졌다.
육지에서 건너와 섬을 현대화하고 그 과정에서 창출될 막대한 이윤을 얻고자 한 청성 그룹. 청성 그룹을 배척하려 했던 세력과 청성 그룹과 함께 섬의 현대화를 가속하고자 했던 세력. 어쩌면 숙청되었다는 다른 두 명의 해신의 딸들은 뭍에서 온 기업을 이용해서 섬을 개발하자는 입장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세레나데는 육지를 배척하기 위해서 다른 두 딸을 숙청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자 우리가 품었던 한 가지 의문의 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세레나데는 본인이 청성 그룹의 장남을 해칠 이유가 없다고 했죠?”
“죽여봐야 항구와 관련한 소송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의미가 있냐고 따졌지.”
“그 말은 솔직히 맞는 말입니다. 항구의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인데 회장 아들 하나 죽었다고 소송이 끝나겠어요? 사실 세레나데에겐 전혀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몰라요.”
“이수호는 섬 내 개혁 세력과 육지를 연결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청성 그룹을 노린 행위가 아니었던 게지. 물론 그 목적도 없진 않았겠지만 더 큰 목표는 섬 내부의 반발 세력을 억누르는 공포 정치의 수단이었다고 보면 이해가 간다.”
“할아버지 세레나데가 이수호를 죽였다면 그 목적은 섬 내의 개혁 세력에 공포심을 주려고 한 걸까요?”
“그렇게 해석하면 여태 모은 정보들이 나름대로 멋들어지게 맞아떨어진다. 가인이 네게 정보를 알려준 택시 기사의 태도를 돌이켜봐라. 마치 독재자를 두려워하며 입을 조심하는 사람 같지 않냐?”
“확실히 그런 느낌이죠.”
이수호를 죽인다 해도 청성 그룹을 억누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들은 민간 기업인 만큼 관리국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리국이라는 든든한 뒷배경이 있는 한 청성 그룹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섬 내의 반발 세력은 다르다. 그들에겐 그 어떤 뒷배경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대표였던 다른 해신의 딸이 사라지고 자신들과 육지를 이어주던 사람은 암살당한 상황. 그들이 더 이상 세레나데에게 저항할 수 있을까?
조금씩 모두의 머릿속에서 독재자 성녀가 세웠던 계략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내일 있을 면담을 대비한 논리를 짜내기 시작했다.
*
– 박승엽
절체절명의 순간 영화에선 생명의 위기에 처한 주인공이 인생 전체를 파노라마처럼 보곤 하던데···. 나 또한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대체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을까! 설마 나보다 고생하고 있진 않겠지?
— 고오오오!
천지를 뒤흔드는 대 괴수 갯지렁이의 울음 비명 지를 힘조차 잃은 채 무너져서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는 무고한 시민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게 깃든 대우주 파천황의 기운!
“지금이다아아앗!”
터미널 옥상에서 갯지렁이를 향해 뛰었다. 허공을 향해 내 몸이 날아드는 순간 –
갯지렁이가 ‘우연히’ 그 타이밍에 토해낸 혀인지 촉수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연스럽게’ 내 발밑을 스쳐 지나갔다!
대체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하자! 붉은 살덩이를 밟고 달리고 또 달렸다.
— 꿈틀!
촉수가 허공으로 강하게 꿈틀댄다 싶더니 내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부유하는 내 몸 모든 것이 멈춰선 듯한 찰나의 순간. 나는 갯지렁이의 머리 위에 알 수 없는 작은 형체가 있음을 깨달았다.
저건 누구지? 갯지렁이를 조종하는 사악한 주술사일까? 뭔지 모르겠지만 저놈을 처치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나는 지금 허공인데?
삽시간에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내 몸은 허공에 붕 떠 있고 갯지렁이의 머리까진 아직도 많은 공간이 –
— 휘이잉!
‘우연히’ 강력한 난기류가 발생해서 내 몸을 허공에서 밀쳤다. 나는 자연스럽게 180도로 회전한 후 당연하다는 듯 갯지렁이의 머리 위에 착지했다.
와! 미쳤다 미쳤어! 이건 내가 생각해도 미쳤다! 영화 주인공 아니냐? 톰 크x즈도 놀랄 장면 아니야?
나 자신의 폭풍과도 같은 ‘멋’에 순간적으로 취해버린 그 순간 건너편의 ‘소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허공답보(虛空踏步 : 허공을 밟듯이 달리는 경지)? 어기충소(御氣衝溯 : 기를 다루어 하늘로 치솟는 경지)?”
… 뭐라는 거야 쟤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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