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25)
– 박새롬
— 딩 동 댕 동!
“새롬아 유리 어디 갔어?”
“… 그러게.”
“아까 너랑 나간 것 아니야?”
자꾸 묻지 마. 나도 언니가 어디로 간 건지 모른다고.
…
벌써 7교시가 끝났네. 학교의 정규 수업 시간은 다 끝났으니 이제 자율학습 시간이다.
점심시간에 갑자기 비술에 문제가 생겼다며 운동장으로 나갔던 유리 언니는 그 후 한참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어.
물론 나나 언니나 사람이 아닌데 새삼스레 학교생활을 성실히 하지 않은 걸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학교는 생각보다 철저한 시스템이 있단 말씀!
학생이 마음대로 무단 조퇴하거나 결석할 경우 학교 선생님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언니의 생활기록부 등 관련 서류를 살펴볼 가능성이 크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우리가 다양한 수단으로 위장한 신분이 들킬 확률도 높아진다.
그러니까 구미호는 인간보다도 빈틈없이 생활해야 해. 주변에서 우릴 의심하지 않도록. 이 모든 사실을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해줬던 존재가 바로 유리 언니잖아? 대체 언니는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우선 내가 가서 핑계라도 만들어두자.
“유리가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고?”
“네. 아까 머리가 엄~청 아프다더니 휘청거리면서 학교 밖으로 나갔어요.”
“으음···. 선생님은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는데.”
“유리가 너무 아파서 미처 선생님을 뵐 시간이 없던 것 아닐까요?”
“그랬을지도 모르겠구나. 새롬아 알려줘서 고맙다.”
선생님에게 적당히 말해뒀다. 역시 유리 언니는 내가 없으면 큰일 난다니까!
*
— 딩 동 댕 동!
저녁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진짜 집에 완전히 가버린 것인지 유리 언니는 이 시간이 되도록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내가 매우 귀찮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 그 새롬아! 유 유 유 유.”
“유리. 한유리. 이름이나 똑바로 말해.”
“유리가 저 저녁 8시에 오 옥상으로 오라고 했는데···. 유 유리는 어딨어?”
나도 모른다고 이 멍청이들아! 언니는 집에 갈 거면서 8시에 보자는 소리는 왜 한 거야? 멍청한 애들이 자꾸 쉬는 시간마다 유리는 어딨느냐고 묻잖아!
…
이상하긴 이상해.
언니는 사라지기 전까지 꽤 여러 명의 남자애에게 저녁 8시에 학교에서 보자고 한 것 같다. 그 소문이 퍼졌는지 꽤 많은 애들이 이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벌써 몇몇 아이들은 유리가 남자애들을 모아놓고 한꺼번에 차는 거 아니냐고 추측 중이었다.
본래 이 고등학교는 야간 자율학습이 강제가 아니라서 이런 늦은 시간에는 남아있는 아이들도 몇 없고 선생님들도 상당수 퇴근한다. 한데 언니가 만들어낸 ‘빅 이벤트’ 덕에 평소보다 3배는 많은 학생이 구경한다고 이 시간까지 학교에 남았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설마 저녁에 학교로 돌아올 생각? 왜? 정말 남자애들을 모아놓고 한꺼번에 차려고? 그런 요란스러운 일을 해서 남는 게 뭔데?
우리는 인간의 간을 먹으면 먹을수록 정신적으로 인간에 가까워지지. 긴 세월 동안 수백의 사람을 먹으며 아홉 개의 꼬리를 모으고 구미호가 된 후로도 72명을 먹은 지금의 언니라면 정말이지 사람까지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어.
그래서 평소와 달라진 걸까?
“꺄아아악!”
밑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교실에서 꾸벅꾸벅 졸던 학생들이 놀라서 일어섰다.
“뭐야? 저 소리 대체 -”
“불이야!!!”
무언가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
정신없이 문을 열고 교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미 학교 여기저기서 불이 타올랐고 심지어 불길은 점점 거세졌다.
눈앞에서 통에 담은 기름을 끼얹으며 불을 붙이는 미친 새끼를 붙잡았다.
“너! 대체 무슨 -”
“불. 불. 불. 불을···. 피워야 해.”
눈동자만 봐도 알았다. 이 인간 제정신이 아니다. 이미 강력한 매혹에 휩쓸려 이지를 상실한 채 꼭두각시처럼 불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정신없이 복도를 달리자 상황이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 왔는지 모를 성인 남자 다수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학교에 방화 중이었다. 몇몇 학생과 교사들이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불길이 사방에서 일어났으니 늦어도 너무 늦었다.
“으아아앗!”
“불이야!!”
“저 정문으로 달려!”
“대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건데!”
… 사실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저녁에 남자애들을 한꺼번에 찬다는 소문을 퍼트린 사람.
학교를 이 시간까지 학생들로 북적이게 만든 사람.
다수의 사람을 홀려서 학교에 방화하게 만든 사람.
이 모든 게 가능한 존재를 난 안다. 단지 ‘왜’ 이 미친 짓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없을 뿐!
“… 언니.”
나의 단 하나뿐인 가족 사람이 되기까지 단 한 걸음만 남긴 위대한 구미호. 한유리는 불꽃과 함께 나타났다.
그녀의 양손과 입가는 이미 피로 물들어있었고 뒤편엔 말라비틀어진 시신 여럿이 바닥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미 여러 명을 잡아먹은 상태다.
언니는 얼굴에 기묘한 소용돌이를 둘러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볼 수 없게 한 상태였는데 겨우 그 정도를 꿰뚫어 보지 못할 내가 아니다.
“대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혼란에 빠진 내게 언니가 슬쩍 웃었다.
“새롬아 뭐하니?”
“그 그건 내가 물어볼 -”
“너도 먹어.”
“뭐? 미쳤어? 학교 학생들을 잡아먹으면 여론의 주목을 -”
“이 와중에 그걸 걱정해?”
… 그건 그렇네.
이미 언니가 학교를 불태우며 사람 여럿을 잡아먹은 시점에서 들키고 말고를 걱정할 타이밍은 한참 지났다. 내가 반쯤 설득당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인지 언니가 태연한 태도로 살덩이를 건넸다.
“하나 먹어. 이건 좀 질기네.”
“질기다면서 나보고 먹으라고? 참~ 좋은 언니다.”
뼛조각이 붙은 심장은 제법 질겼지만 나름의 맛이 있었다. 잘근잘근 씹을 때마다 톡 튀듯이 새어 나오는 향기로운 혈 향은 분명 매력적이다.
인간 세상에 섞여 살면서 자주 먹는 불로 익힌 고기 또한 맛있지만 이런 신선한 사람 고기에는 또 나름의 맛이 있는 법. 이런 감상을 나와 공유할 사람이 없어서 아쉽긴 해. 그래도 언니가 있어서 –
“아니! 이럴 때가 아니잖아?”
“뭐가 아닌데?”
언니는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눈살을 찌푸리며 부드러운 간을 먹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평소와 달리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기보다 억지로 삼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언니는 점점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는 걸까?
“언니! 학교를 대놓고 불태워가며 사람을 잡아먹어? 우리가 이걸 할 능력이 없어서 하지 않은 줄 알아? 이렇게 개지랄을 벌이면 대한민국 뉴스 전체에 도배되는 거 몰라? 교황청에서 퇴마 부대를 무조건 보낸다고!”
“내 얼굴 안보이니?”
검푸른 기운으로 얼굴을 가린 언니를 보자 한숨이 나왔다.
“그런 건 일반인에게나 통하지! 교황청에 통할 것 같아? 내게도 안 통하는데?”
“뭐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 작업을 해뒀단다. 그러니 퇴마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여유시간이 생각보다 길어. 그 전에 난 인간이 되겠지.”
“인간이 된다고 끝인 줄 알아? 이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범인이 없다? 이건 교황청에서도 적당히 덮고 넘어갈 수 없어!”
“범인이 잡히지 않는다면 그렇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악물고 찾아내려 들겠지.”
“뭐?”
“원래 계획은 뭐였어? 사람들을 몇 달 아니 몇 년에 걸쳐서 천천히 죽여서 숫자를 채울 셈이었지? 빨라 봐야 일주일에 한 명 웬만하면 그보다 더 느린 속도로 천천히 죽였을 거야.”
당연하다. 치안이 좋은 나라에서 갑자기 여러 사람을 죽이고 들키지 않을 수가 있을까? 가능하면 실종 후에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을 사람들 위주로 두 달에서 석 달에 한 명꼴로 죽였겠지.
“그런 속도로 28명 어느 세월에 다 채우니?”
“어 언니···. 갑자기 왜 이래? 고작해야 3~4년이면 끝났을 텐데! 그게 뭐 그리 길다고 -”
“길구나. 지금의 내겐 너무 길어. 새롬아 나는 이미 일을 벌였단다. 결정하렴. 날 도와서 빨리 끝내고 같이 도망가든지 아니면 혼자 도망가든지.”
숨이 턱 막혔다.
요사스럽게 빛나는 언니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미쳐있는 것 같았다. 지친 걸까? 수백 년을 인내했는데 인간까지 단 한 걸음을 앞둔 상태에서 갑자기 돌아버린 걸까?
모르겠어. 언니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 언니는 유리는 세상천지에 단 한 명뿐인 내 가족이야.
우리는 수천 번의 밤과 낮을 함께해왔다. 나보다 훨씬 일찍 마도(魔道)를 깨달은 언니는 지금보다 훨씬 나약했던 날 수도 없이 보호해줬어. 그러니까 나 혼자서 도망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혼자 도망이라니.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끝내기나 해!”
*
두 명의 구미호가 힘을 모으자 20분이 채 지나기 전에 일이 끝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난 아직 칠미호지만 언젠가 구미호가 될 테니깐!
주변의 시체 수를 보아하니 오늘 팔미호 정도는 될 것 같다. 이 짓을 벌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어야 의미 있는 이야기지만.
20명이 넘는 학생들과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 몇 명의 교사들까지 죽이고 간을 잔뜩 모았다. 평소엔 한 점 한 점 귀하게 아껴먹던 사람 고기였는데 오늘은 너무 많아서 격을 올리는 데 꼭 필요한 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불에 타게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언니의 손에 마지막 간이 들렸다.
“… 이게 마지막이구나. 이걸 먹으면 나는 사람이 되는 건가?”
900명의 인간을 잡아먹고 9개의 꼬리를 얻은 요괴 여우가 또다시 99명을 잡아먹은 끝에 존재의 목적 완전한 인간화를 이루기까지 단 하나의 간만 남긴 그 순간.
내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밖에서 달려오고 있을 교황청 퇴마 부대의 위험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헤아릴 수 없는 밤과 낮을 고통받아온 내 가족이 내 언니가 하나뿐인 내 사랑이···.
마침내 위대한 업의 완성에 도착했다는 감격만 느꼈을 뿐이다.
“언니···. 축하드려요.”
“…”
“정말···. 이런 순간이 오긴 오는구나. 정말로···.”
“…”
“그래도 빨리 드셔요. 이제 곧 퇴마 부대가 들이닥칠 것 같아요. 아니면 마지막 간은 나중에 드실래요? 사람으로 변하면 힘의 태반을 잃는다고 들었어요. 일단 구미호의 힘을 유지한 채로 탈출한 후에 마지막 간을 먹는 게 좋지 않을 -”
“새롬아.”
“언니?”
“내 탈출 계획은 너야.”
세상에서 가장 강한 구미호의 손이 허공에 춤추는 순간 유리의 몸에서 뻗은 칠흑 같은 사슬이 내 몸을 속박했다.
“날 위해서 내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주렴.”
유리에게서 불가해한 마력을 느낀다. 고작해야 일곱 꼬리를 가진 나약한 요괴 여우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힘이 내 몸과 정신을 뒤틀고 비틀었다.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어쩌면 이해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
– 한유리(?)
문득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 머릿속에 아주 많은 정보가 있던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떠올리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로 잊었다. 흡사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모든 것을 지워버린 것처럼.
“캬아아앗!”
퍼뜩 정신을 차린 채 정면을 보자 넋 놓고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눈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괴물이 있었으니까!
“꺅! 이 이게 대체 뭐야!”
개? 아니 늑대? 아주 큰 여우? 꼬리가 엄청 많은데? 일곱 개? 사슬에 묶여있어?
괴물이 포효하며 온몸을 비틀자 시커먼 쇠사슬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나는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으악! 대체 무슨 일이래? 학교에 무슨 일이 생긴 건데!
도망갈 수 있을까?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을 피해서? 딱 봐도 나보다 훨씬 크잖아!
“‘존재감 없는 소녀’ 발동!”
뭐야? 방금 내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온 것 같은데? 착각인가?
이리저리 따지고 잴 시간이 없었다.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공간 사이를 뛰고 또 뛰었다.
사방에 가득한 시체들이 발에 걸려서 여러 차례 넘어지며 몸이 피로 적셔졌다. 화끈한 열기가 머리카락과 교복을 여기저기 태웠고 나는 완전히 거지꼴이 된 채로 구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캬아아아앗!”
이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달렸기 때문일까? 포효하며 날뛰는 괴물이 건물을 초토화하는 와중이었는데도 신기하게 날 찾지 못했다.
지쳐서 쓰러질 때쯤 학교의 외벽이 터져나가며 시꺼먼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을 보는 순간 이제 살았다 싶은 생각에 긴장이 풀리며 의식을 잃었다.
…
“생존자를 구출했다! 생존자는···. 인간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