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31)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135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2 204호 – 미션의 방 ‘호텔 시네마’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영화가 끝나며 스크린의 빛이 사라졌다. 잠시 후 스크린에서 다시 빛이 발생하며 다음 사람이 들어와야 함을 알렸다. 이제 기회가 남은 마지막 사람은 나다.
이 순간까지도 동료들 다수는 스크린에서 벌어진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뭐 뭐여? 왜 끝난 거냐? 승엽이가 탈출한 거 아니야?”
당황한 진철 형의 말에 의사 선생님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커피숍 장면이 나오는 게 아니라 영화가 끝났습니다. 한순간에 당했다는 의미일까요? 그렇다면 누가 승엽 군을 해친 거죠? 설마 돌리펀트?”
“상현 형님 코끼리 놈은 승엽이랑 제법 거리가 멀었습니다. 게다가 그놈 성향상 기습해서 죽이기보다 코로 승엽이를 들어서 지랄하다가 죽였을 것 같지 않습니까?”
엘레나와 송이도 대체 왜 승엽이가 저택을 탈출하자마자 영화가 끝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승엽이를 해친 존재를 봤다. 그 정체를 깨닫고야 말았다!
“다들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내 설명을 들은 동료들은 입을 딱 벌렸다. 의사 선생님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알아채셨습니까? 가인 군이 아니라 은솔 양이었다면 눈의 성능으로 알아챘나보다 했을 텐데 가인 군이 알아챘다는 사실이 신기하군요.”
“말씀대로 제 눈이 특별히 좋아서는 아닙니다. 그냥 비슷한 경험을 한번 했기 때문이죠.”
비슷한 경험. 그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끄덕끄덕했다.
이후 승엽이의 진행을 보며 떠올렸던 의문과 내가 생각해본 더 나은 진행에 대해 말했다. 한참 동안 계획을 더 철저히 가다듬었다.
송이가 무엇을 가져갈 셈인지 물었다.
“가인 오빠 마도서와 축복 중 뭘 가져가실 생각이에요? 당연히 마도서?”
지혜의 축복 단독으로는 조언 3회와 정신 보호 필터뿐이다. 나쁘진 않지만 능동적인 능력이 부족하니 보통은 마도서가 낫다. 정신 보호 필터 없이는 마도서의 사용에 제약이 생기긴 하나 그 제약이 생긴 마도서도 축복보다 유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복. 마도서는 지금 들어갈 영화에선 쓰면 안 될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잠시 고민하던 송이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네. 이야기 시작할 때 차은표가 본인 이야기는 그리 대단치 않다고 했었죠?”
“위기 알림이나 조언은 운이 좋았다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식으로 말을 만들 수 있지만 빙의는 무리지. 차은표가 갑자기 빙의했다는 전개 자체도 이상하고 그런 경험을 해놓고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건 더 이상해.”
의사 선생님은 다른 문제도 지적했다.
“가인 군은 다양한 이유로 심신이 모두 매우 강해졌습니다.”
“그렇겠죠. 최근엔 일종의 초감각이 생긴 느낌이고.”
“덕분에 가인 군은 상태창 없이도 마도서를 단기간은 쓸 수 있지만···. 본래 마도서는 평범한 인간은 펼쳐보는 순간 죽는다면서요?”
그렇다. 나도 이 점을 이용해 마도서를 정신 공격 무기처럼 쓰기도 했다.
“케빈으로 변한 채 어린애의 몸으로 마도서를 쓰는 건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쯤 이야기한 후 스크린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들어가기도 전에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나는 마지막 사람이다. 내 뒤에서 나를 구해줄 누군가는 더 이상 없다.
주변 동료들도 이를 느꼈는지 덜덜 떨며 불안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말없이 기도하기 시작한 엘레나와 그 옆에서 같이 손을 모은 의사 선생님 손톱을 물어뜯는 송이와 고개를 들지 못하는 형을 보자 나까지 답답해졌다.
…
그 와중에 당장 해바라기 씨를 내놓으라고 송이 머리를 쪼아대는 앵무새를 보자 헛웃음이 나오며 긴장이 풀렸다. 딱 이 정도 상태가 좋겠지.
아까 전 원래의 승엽이보다도 시원시원한 진행을 보여준 ‘태초의 인간’을 떠올렸다. 때로는 돌았다 싶을 정도의 막 나가는 태도가 필요한 장소가 호텔이야.
“들어갑니다. 축복 선택하겠습니다.”
초반 진행은 아리와 승엽이가 보여준 것과 같았다. 커피숍에 도착한 후 지각해서 죄송하다 사과하자 곧 차은표가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건 제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
– 나 홀로 집에
“케빈!”
케빈 엄마의 잔소리를 한참 들은 후 손을 들었다.
“엄마 물어볼 게 있어요.”
“응?”
“혹시 집에 과자가 있나요?”
“물론이지! 으음···. 하지만 과자 너무 많이 먹으면 안될 텐데.”
“여보 요번엔 케빈 혼자 집에 남을 테니 과자라도 좀 줍시다.”
“그래요. 케빈 쿠키 상자 위치를 알려줄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는 것 알지? 먹고 나면 양치질 꼭 하고?”
“네.”
부모가 나간 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승엽이의 진행을 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승엽이가 확인한 저택의 장난감들에 대한 대응법은 다음과 같다.
등을 벽에 붙여서 움직이며 해피해피의 공격을 회피한다.
가구를 미리 밟고 뛰기 좋은 장소에 옮긴 후 가구 위를 달리며 토마스의 공격을 회피한다.
티타임 예절이 적힌 책자의 내용을 수정하며 돌리펀트를 조종한다.
…
이걸 12살 애가 어떻게 해?
저건 괴물들의 행동 패턴을 영화 바깥에서 관찰한 사람들이 단체로 머리를 맞대어 떠올린 대응법이야. 12살 꼬마가 실시간으로 전부 떠올렸다고? 무슨 아인슈타인이야?
어린 시절의 차은표 아니 케빈이 엄청난 천재여서 기적같이 다 떠올렸다고 치자. 본인이 커서 다시 생각해도 미쳤다 싶은 순발력 아닌가?
농담 섞어서 말하자면 ‘장례식에서 틀어줘도 될 영상’같은 느낌인데 차은표는 ‘제 이야기는 그리 대단치 않다.’라고 했다.
실제 케빈은 훨씬 쉽고 단순한 방식으로 살아나왔다는 이야기다. 딱 어린애가 할만한 행동과 사고방식에 진짜 해답이 숨겨져 있다.
“야옹!”
장난감들이 있는 케빈 방 거실로 움직이던 중 바닥에 누워있는 고양이가 늘어지라 하품하며 소리를 냈다. 곧 잠들 모양이다.
“… 그러고 보니 네 존재 자체도 힌트였구나.”
부모가 사라진 후 저택에는 케빈 말고도 수지라는 이름의 개와 캐시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있었다.
이 중 수지는 아리가 들어갔을 때 승엽이가 들어갔을 때 두 번 모두 해피해피를 잠시 막아내며 주인을 대신해 죽는 눈물겨운 충심을 보여줬다.
그 시간에 이 고양이 캐시는 대체 어디 있었길래 야옹 소리 한 번도 내지 않은 걸까? 그 자체가 또 하나의 힌트였다.
장난감 상자들 앞에 가서 상자에 붙은 설명을 읽었다.
“돌리펀트와 함께 쿠키를 만들어보세요 토마스와 친구들을 위해 레일을 깔아주세요 해피해피와 즐겁게 술래잡기 놀이를 해봐요.”
앞의 두 문장은 처음 들어간 아리가 바로 발견했다. 단지 이 문장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을 뿐이지. 애초에 장난감이라면 흔히 적힌 이런 문장에 대단한 의미가 있다 여기기도 어렵다.
최대한 12살 소년이 할법한 행동을 떠올렸다.
*
「케빈! 널 위한 신년맞이 파티를 시작할게!」
벌써 세 번째다.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저택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택의 진동이 멈출 때쯤 세 가지 장난감이 행동을 개시했다.
「해피해피! 케빈 이제부터 술래잡기야!」
「토마스가 출발합니다! 레일을 깔아야 하니 길을 비켜주세요!」
「돌리돌리! 티타임 시간이야! 착한 아이는 2층으로 오렴.」
—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첫 번째 장난감 해피해피가 나타났다.
12살 소년 케빈이 기대에 차서 선물상자를 열었더니 이런 흉측한 광대 인형이 나왔을 때 무슨 행동을 했을까? 화가 나서 망가트리지 않았을까?
“이이이제에에부우우터어어어어 수우우울래애애애 -”
“… 진짜 말 느려졌네.”
인형 상태에서 내가 망가트려서 목이 뒤로 돌아간 해피해피는 말이 더럽게 느렸다. 아까 승엽이가 만났던 망가진 해피해피의 상태와 유사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첫 시도 때 상자를 열고 해피해피를 보자마자 화를 내며 걷어찼던 아리의 판단은 정확했다. 다만 충분히 강하게 걷어차지 못했을 뿐이지.
“에잇!”
— 탁!
뒤에서 나타난 망가진 인형을 손으로 밀었다. 목이 뒤로 돌아간 상태에서 내게 말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겠어?
등이 정면에 나와 있다는 소리지!
술래잡기의 규칙을 다 말하기도 전에 내게 등 터치를 당한 해피해피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내에에 드으응을 터어치이이해앴네. 케에비이인이 이겨었어!”
“조용히 좀 해라.”
해피해피를 3초 만에 무력화한 후 이번엔 경적을 향해 귀 기울이며 움직였다. 토마스는 어떤 상태일까?
“토마스 재밌어?”
“물론이지! 케빈 레일을 깔아줘서 고마워!”
케빈이 가장 좋아했을 만한 장난감은 역시 장난감 열차 토마스다. 그러니 발견하자마자 상자를 열고 가지고 놀며 레일을 까는 게 정상 아닐까?
미리 동그란 원 모양으로 깔아둔 레일을 무한히 달리는 토마스는 즐거워 보였다.
사실 열차의 본분은 레일 위를 달리는 일이지 레일을 까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토마스에게도 레일을 까는 일은 불쾌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시작하자마자 평화를 찾은 열차를 확인한 후 세 번째 장난감을 확인하기 위해 2층으로 움직였다.
「돌리돌리! 티타임 시간이야! 착한 아이는 2층으로 오렴.」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서 돌리펀트가 있는 2층의 응접실로 이동했다.
“돌리돌리!”
“돌리돌리!”
“케빈!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 케빈은 똑똑하구나?”
“그래?”
“좋아! 여기 와서 앉아!”
아까 전 돌리펀트를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며 고민에 빠졌다.
돌리펀트가 들어있던 상자엔 ‘영국 신사를 위한 티타임 예절’이라는 제목의 작은 소책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돌리펀트가 책의 내용을 철저히 따른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내용을 미리 수정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책의 내용을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그 책을 열고 깨알 같은 글씨를 적어넣는 건 12살 소년의 상식적인 행동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케빈 조금만 기다려. 케빈이 무척 일찍 와서 아직 준비가 덜 끝났어.”
“그래.”
돌리펀트는 정성스럽게 끓어오르는 찻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뭉툭한 발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아서 코로만 작업을 하다 보니 꽤 힘들어 보였다.
작업이 끝날 때쯤 행복한 표정의 돌리펀트가 내게 말했다.
“마셔! 분명 맛있을 거야!”
한 모금 들이킨 후 입을 열었다.
“조금 쓰네.”
“뭐어어? 케빈 지금 내 홍차 맛이 이상하다는 거야?”
“그럴 리가! 홍차는 원래 살짝 쓰지. 문제는 홍차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어.”
“문제가 다른 곳에 있다고?”
“티타임인데 과자가 없잖아. 원래 홍차는 쓰니까 달콤한 과자랑 같이 먹어야 해.”
실제 케빈은 이것보다는 더 건방지게 말하지 않았을까? 아닌가? 말하는 코끼리를 보고 겁에 질려서 더 주눅이 든 채 말했을지도?
태도야 아무래도 좋다. 어린아이들에게 차란 쓴맛이 나는 물 이상의 의미는 없지. 그런 걸 먹으면 당연히 과자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과 과자?”
“티타임이니까 과자가 있어야 하지 않아?”
돌리펀트는 당황하며 ‘영국 신사를 위한 티타임 예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곧 책에 있는 모든 삽화에 찻잔 옆에 과자나 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말이야! 역시 케빈은 똑똑하구나? 홍차는 달콤한 과자나 빵과 함께 먹어야 해!”
“과자는 없어?”
“… 과자는 없어. 어떻게 해?”
“저택을 뒤지면 어딘가 과자가 있을 거야. 같이 찾아보지 않을래?”
“좋아!”
곧 돌리펀트는 거대한 덩치를 일으켜 저택 여기저기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돌리펀트가 쿠키를 찾기란 쉽지 않겠지.
아까 나랑 수지가 다 먹었으니까!
애초에 과자의 위치를 알아낸 12세 소년이 참긴 뭘 참아? 당연히 그 자리에서 다 먹어야지!
“이제 장난감들은 대충 다 처리했고···.”
모든 이상 현상을 일으킨 진짜 범인 집 자체의 비밀을 파헤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