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파티타임 (9) – 작전 회의 (2) Fin, 102호 – 공포의 저택 재 진입.
– 한가인
결국 주변 사람의 눈치가 보여서 할아버지에게 그어진 선은 다 지웠다.
그제야 분위기가 다시 진지해졌다. 다시 들어갈 102호에 관한 두 가지 고민.
힌트의 해석 탈출 방법 고찰.
내 견해부터 밝혔다.
“일단 102호의 힌트였던 ‘ㅁㅁ쪽으로 가야 한다는 편견을 버려라.’를 다시 한번 해석해봅시다. 이 힌트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합니다.
첫째 ‘편견을 버려라.’라는 표현의 의미는 우리가 특정 장소로 가야 한다는 편견이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 그 장소의 명칭은 두 글자입니다. 후보는 저택 서재 성당 호수 등이 나왔죠.”
아리가 갑자기 세 번째 안건을 제시했다.
“힌트나 탈출 방법을 논하기 전에 고려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어요.”
“또 다른 문제?”
“시나리오 자체가 바뀔 가능성. 다른 방과 102호는 달라요. 첫 시도 이후로 등장인물 자체가 바뀌었잖아요?
첫 시도 때 저와 할아버지는 저택의 구성원이었는데 이젠 파티원이죠. 이런 경우는 다른 방에선 없던 일이에요.”
시나리오 자체가 바뀐다. 생각해보지 못한 가능성이다.
단순히 새로운 NPC를 메이드 집사로 넣을 가능성 정도만 생각했는데.
혹시 아리가 이미 경험해 본 일인가?
“시나리오가 바뀌는 일을 이미 경험해 봤어?”
아리는 잠시 침묵했고 곧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호텔엔 ‘부활의 방’이 있죠. 호텔 1회차 때 당시의 파티는 진행 중이던 저주의 방에 속한 NPC를 부활의 방을 통해 살렸어요.
그때 호텔은 단순히 새로운 NPC를 채워 넣는 게 아니라 시나리오 자체를 바꾼 기억이 납니다.
아예 완전히 다른 시나리오는 아니고 큰 틀에선 비슷한 시나리오인데 다른 시간대로 변했어요.”
듣고 있던 은솔 누나가 질문했다.
“다른 시간대?”
“그 시나리오의 미래로 갔던 것 같아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부활의 방 이야기를 들어서 궁금한데 그 방을 통해 NPC를 살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처럼 참가자가 되나? NPC가 되기 전에 얻었던 유산이나 축복도 다시 회복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기억나지 않아요. 숨기는 게 아니라 정말 오래전이고 그때는 정말로 어렸어요.
1회차 때의 기억은 굉장히 흐릿하고 그나마도 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이해했다. 호텔 1회차 때의 아리는 지금의 수상쩍은 모습과 달리 진짜 완전 어린아이였겠지.
그보다 시나리오의 변화를 고민해보자.
특정 방을 진행하던 중 그 방의 NPC를 부활시키자 그 방의 시나리오가 바뀌었다는 말. 신기하긴 한데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그 사례와 지금 우리가 겪은 상황이 공통점이 있어? 우리는 부활의 방은 찾지도 못한 상태인데.”
아리가 대답했다.
“나도 처음엔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동안은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요 며칠간 고민해보니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했지.”
NPC가 부활했던 과거 아리가 겪은 상황. 요원 팀이 아군으로 합류한 지금 우리의 상황.
공통점이라면 두 경우 모두 NPC가 동료로 합류했다는 점이 있다.
“애초에 NPC가 부활했을 때 호텔은 왜 시나리오를 바꿨을까? ‘정보’ 때문이야.
본래는 참가자 파티가 알 수 없거나 알기 위해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정보인데 NPC가 동료로 합류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정보를 알게 되잖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102호의 첫 시도 때와 달리 아리와 묵성 할아버지는 ‘저택의 등장인물’에서 우리 쪽으로 합류한 상태.
당연히 본래라면 참가자들이 큰 희생을 치러서 알아냈어야 할 각종 정보를 대량으로 가지고 있다.
예컨대 102호의 탈출법인 ‘어르신이 6명의 제물을 바치지 못하게 만든다’부터가 아리가 카드 게임을 통해 내게 알려준 정보다. 이것 말고도 많겠지.
즉 호텔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NPC가 아군으로 합류한 덕에 본래라면 큰 희생을 통해 알아내야 했을 정보를 공짜로 얻어낸 상태다.
그래서 ‘난이도 조정’ 차원에서 시나리오의 시대를 바꿀 수 있다는 것.
고민이 깊어진다. 시나리오 자체가 변화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시나리오의 시간대가 바뀐다면 과거 또는 미래로 간다는 걸까요?”
“가능성을 열어둬야겠네. 휴. 탈출 방법도 완전히 다시 짜야 하나?”
묵성 할아버지가 약간 희망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미래로 간다면 나도 알 수 없는 노릇 이네만 과거로 간다면 어쩌면 우리에게 조력자가 생길지도 모른다네.”
조력자?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들 성당과 신비한 종에 대해 기억하는가? 성당이야 물론 저택보다도 역사가 깊었던 것으로 기억하네. 그러나 종은 외부에서 가져온 신물이었지.”
“외부? 누가 그런 신비한 종을 가져왔던 겁니까?”
이번엔 아리가 대답했다.
“저택의 어르신이 타락하기 시작할 때쯤 외부에서 엑소시스트 비슷한 집단이 찾아왔어요. 종도 그들이 가져온 것으로 기억해요.”
엑소시스트?
“아니 그런 집단이 찾아왔는데 왜 어르신을 처단하지 못한 거야? 이미 너무 강대한 존재였나?”
다시 묵성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내 머릿속에 남은 정보에 따르면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하네.”
“증거?”
“엑소시스트들이 찾아왔을 때쯤 그 마을에선 실종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거든. 저택의 어르신이 범인으로 의심 받았지만 엑소시스트들은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네.”
마을? 그런 게 있었던가?
“저택 주변에 마을 같은 게 있었습니까?”
“내게 남은 ‘집사의 기억’에 따르면 본래 마을도 있었네. 그러니까 성당도 세워진 거지.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흉흉한 사건들이 끝없이 벌어지면서 많은 사람이 죽고 도망간 끝에 저택만 남았네. 그 흉흉한 사건들의 시작이 ‘실종 사건’이었지.”
우리가 경험한 공포의 저택. 그 과거 시점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아마도 어르신의 타락 초기 시점이었겠지?
저택과 마을 일대에서 본격적으로 흉흉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외부에선 엑소시스트가 파견되어 유력한 용의자인 어르신을 조사했으나 증거를 찾지 못해 떠났다.
그리고 어르신을 누구도 막지 못해 마을이 황폐해지고 많은 사람이 죽은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미래 시점이 우리가 102호에 첫 번째로 들어갔던 시점인 것.
“만약 우리가 공포의 저택의 ‘과거’로 들어가게 된다면 엑소시스트를 도와야 할까요?”
대화를 경청하던 은솔 누나가 대답했다.
“아마 ‘실제 역사’와 달리 엑소시스트들이 증거를 찾아서 어르신을 응징할 수 있게 도와야 하는 모양인데?”
말없이 듣고 있던 진철 형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대화는 이쯤 합시다. 사실 꼭 과거로 진행될지 어떨지도 확실치 않은 부분 아닙니까.”
그건 맞는 말이다.
시나리오가 변경될 가능성까지 고려하자 사실상 회의를 더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이 우리 앞에 놓인 상태.
은솔 누나가 다시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시나리오 시대 변화 이야기는 진철이 말대로 이쯤 하자. 더 말해봐야 상상의 나래에 불과해.
그보다 원래 말하려고 했던 ‘탈출’부터 말해보자.
우선 ‘자살’은 일단 넘어가자. 시나리오 변화에 따라 ‘자살’을 통한 탈출은 바뀌거나 막힐 가능성이 너무 커 보이니까.
‘저택을 벗어나기’는 어때?
저번처럼 시작하자마자 차 타고 저택에 가는 상황에서 깨어난다면 나머지는 진행하고 한 명은 차 돌려서 저택 밖으로 가서 탈출을 확보하는 거지.”
괜찮은 것 같다.
그간 우리가 저주의 방을 진행하며 깨달은 사실.
막막하기 짝이 없는 ‘해결’에 비해 탈출은 상대적으로 편하다. 어떻게든 ‘현재의 위기’만 벗어나면 인정해주는 느낌.
저택에서 도망만 가도 인정해주지 않을까?
이후로도 약간의 대화는 더 있었지만 큰 틀에서 회의의 결론은 유지되었다.
1. 저택 측 NPC가 아군으로 합류했기 때문에 시나리오의 시대가 변경될 가능성이 있다.
2. 시작하면 한 명은 차를 몰고 저택 바깥으로 나가서 탈출을 확보하자.
이렇게 파티 타임 4일 차가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파티 타임의 마지막 날은 모두가 약속한 대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마지막으로 계획을 점검한 후 우리는 다음 방을 준비했다.
*
[사용자 : 한가인(지혜)
날짜 : 28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1 102호(저주의 방 – 공포의 저택)
현자의 조언 : 3]
“그래서 은솔 자매님. 오빠 되는 ‘이세현’ 씨의 ‘타락’에 대해선 어느 정도 확신이 있으십니까?”
“사제님. 오라버니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답니다. 그때만 해도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호기심이라 여겨 다들 귀엽게 여겼지만···. 전 그때부터 종종 광기를 느끼곤 했지요.”
“아시다시피 그런 경험만으론 우리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오라버니는 언젠가부터 아프리카나 유럽에서 온 이상한 외국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어요.
저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빛의 세계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라버니는 그들에게 점차 물들더니 이상한 물건과 이상한 책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책! 오라버니는 어디선가 이해할 수 없는 책을 가져왔죠.
그 책은 정말 불가해한 물건입니다. 멀찍이서 보자마자 느꼈어요. 그 책은 현세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입니다.”
“흠. 그래서 본단에선 그 책이 ‘화신의 서’라고 본 것인가?”
“묵성 추기경님. 그렇습니다. 본단에선 지난 400년간 세상에 어둠을 뿌렸던 ‘화신의 서’가 이 나라 한반도 어딘가에 있다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이 지역 역시 후보 중 하나죠.”
삐이이이이익———-!
…
두 번째로 듣는 고장 난 라디오 소리와 함께 ‘정신이 들었다’.
모두가 넋이 나가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엑소시스트를···. 우리가 돕는 게 아니었군요.”
“우리가 엑소시스트다! 이 호텔은 진짜 미친 거냐? 난 성경도 한 줄도 모른다! 세상에 성경도 모르는 사제가 있어?”
“아하하하~! 그래서 우리 중 유일한 ‘추기경’이신 묵성 할아버지 생각은 어떠세요?”
“난 도망갈란다. 내가 차 몰고 빠르게 탈출 할 테니 너희가 잘 해결해봐라.”
삽시간에 모두가 멘탈이 무너지고 말았다.
… 시나리오의 시점이 과거로 간 것으로도 모자라서 조력자일 것으로 기대했던 엑소시스트가 사실 우리였다니!
우릴 돕는 집단 따위는 없다! 우리가 엑소시스트로서 저택의 주인 ‘이세현’의 거짓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진철 형이 무식한 말을 꺼냈다.
“어찌 됐든 그 이세현이란 놈이 범인인 거지? 그냥 가서 쳐 죽이자. 그러면 해결 아니냐?”
은솔 누나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제발. 진철아. 제발. 그렇게 무식하게 해결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니?”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승엽이와 아리는 어디 있는 거죠?”
그제야 차를 돌아봤다. 승엽이가 또 없다. 아리도 없다. 은솔 누나를 쳐다봤다.
은솔 누나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이번엔 딱히 저택에 있다는 정보도 없는데?”
송이가 드물게 적극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들 진정하세요. 일단 각자 머릿속에 ‘배역’의 정보가 들어왔죠? 나눠봐요. 승엽이와 아리는 저택이든 마을이든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나도 떠오르는 걸 바로 말했다.
“종! 종 있습니까? 지금 머리를 뒤지는 중인데 종 이름이 무려 ‘성 게오르기우스의 종’이라는 엄청난 이름이네요. 마도적인 힘을 무너트리는 힘을 가진 성물이라는데 지금 누가 가지고 있죠?”
“내가 들고 있다. 명색이 추기경인데 그런 귀한 건 내가 가지고 있어야지.”
“명색이 추기경이라면서 도망갈 생각부터 합니까?”
혼란으로 가득 찬 차.
나는 그 안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 망했다! 이 파티!
성경 한 줄도 모르는 사제 성당 다닌 적도 없는 추기경. 지랄 났다!
102호도 보나 마나 장난이 아니겠구나.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 와중에 떠올려보니 내 역할은 또 ‘부제’네.
어차피 성경 몰라도 사제직 줄 거면 나도 추기경이나 시켜주지. 부제는 또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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