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
“이 몸 등장!”
거칠게 요정과 은화의 문을 열자 집중되는 시선.
단골손님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고 낯선 이들은 어이없어하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오늘은 집사의 날인지 집사복을 입은 종업원 형님들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다.
뭐 말이 집사복이지 팔뚝과 허벅지가 다 보이는 반팔 반바지인 것은 물론. 상의 버튼을 격하게 오픈한 탓에 명치 직전까지 보이는 아슬아슬한 옷차림이지만 말이다.
음…오늘도 정상 영업 중이네!
저래 보여도 평소에 나한테 잘해주는 형들이다. 내가 고안한 의상 덕에 수입이 3배는 늘었다나 뭐라나.
아무튼 이쪽에서도 양손을 붕붕 흔들어 답해주었다. 그렇게 조금 더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익숙한 인영.
거칠게 자란 잿빛 머리카락. 쫑긋 솟은 늑대 귀와 우수에 찬(야한 생각 중임) 노란 눈. 한쪽밖에 없는 팔로 거의 다 태운 마력초 담배를 비벼끄는 여인.
엘리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내가 지을 수 있는 최고의 미소와 함께.
“엘리!”
“어엉? 아 요나냐. 미궁에는 잘 다녀왔….”
“엘리! 엘리! 엘리!”
달리던 기세 그대로 카운터를 건너뛰고는 엘리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그녀의 이름을 연호했다.
사교도의 의식 같은 기괴한 풍경에 기겁한 걸까. 엘리가 우다다다 달리던 내 뒷덜미를 덥석 잡아 그대로 들어 올렸다.
허공에 발을 허우적대고 있자니 살짝 찌푸린 얼굴을 들이미는 엘리. 하지만 입꼬리는 씰룩이는 것이 꽤 즐거워 보인다.
당연한 일이지. 일련의 모든 행동은 전직 상남자 김요나의 계산대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엘리라면 분명 좋아할 것 같았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내가 속으로 음흉하게 웃고 있자니 결국 못 참고 현실에서 음흉하게 웃으려던 엘리가 자신의 표정을 숨기듯 큰 소리를 냈다.
“진정해라 이 꼬맹이! 내가 영업 중에는 카운터에 들어오지 말랬지!”
“진정 못 해요! 이렇게 엘리가 눈앞에 있는데 제가 어떻게 진정하겠어요!”
“…미궁에서 무슨 일 있었니?”
“아뇨? 설령 있었더라도 그건 엘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저와 리디아 님만의 비밀이에요!”
“….”
분명 아까까지는 기분 좋아 보였던 엘리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뒤따라 들어오던 리디아를 노려본다. 이번 건 쑥스러워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울컥한 느낌.
졸지에 도둑고양이 취급을 받은 리디아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지만…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잠깐 엘리가 정신이 다른데 팔린 틈을 타 몸을 뒤틀었다. 유연함이 부족했다면 시도할 생각조차 못 했을 아크로바틱한 몸놀림.
이 또한 미궁에서 싸우며 익힌 것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는 몰랐거든.
대충 잡았다고는 하나 자력으로 탈출한 내게 놀란 엘리. 그런 그녀를 향해 꼬았던 몸을 활짝 펼쳤다. 마치 공중에서 날아드는 하늘다람쥐처럼.
“안아줘요!”
“어? 어어…?”
말 그대로 어어 하는 사이에 나를 받아들며 끌어안는 모양새가 된 엘리. 은근슬쩍 그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옷 위로도 알 수 있는 말랑한 촉감. 식은 몸을 데우는 체온. 그리고 코를 후벼파는 독한 마력초 냄새를 만끽한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나와 엘리의 얼굴 사이에는 기껏해야 한 뼘 정도의 공간이 비어있었다. 슬쩍 목을 움직이기만 해도 맞닿을 짧은 거리.
새빨갛게 물든 채 어버버거리는 엘리. 그녀를 향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한 표정을 연기하며 말했다.
“들어보세요 엘리. 오늘 제가 미궁에서 고블린을 11마리나 잡았는데….”
“으응…대 대단하네?”
무언가에 홀린 듯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영혼 없는 맞장구를 치는 엘리.
지금쯤 머릿속으로 아이 넷 정도 낳고 노후 계획까지 짜고 있는 게 뻔히 보였지만…그러라고 하는 거 맞으니까 놔뒀다.
엘리 덕에 리디아에게 모험가로서의 기초를 배울 수 있게 됐다. 그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를 생각하면 이 정도 서비스야 당연히 해줘야지.
그렇게 밀착한 채로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미주알고주알 떠들고서야 엘리에게서 떨어졌다.
“읏차.”
“아….”
아쉬운 듯이 이쪽을 바라보는 엘리. 그런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오늘도 엘리네 가게 2층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돈은 제대로 준비해 왔어요.”
“…그렇다면야 뭐.”
간신히 표정 수습에 성공한 엘리가 손을 내밀었다. 순순히 오늘 번 돈을 꺼낼까 했는데…아직도 속내가 안 들켰다 생각하는 것이 괘씸해 살짝 장난기가 올라왔다.
“에잇!”
엘리의 손 위에 내 턱을 올렸다. 그리고는 아직 빠지지 않은 굳은살이 가득한 손에 볼따구를 마구 비벼댔다.
이제는 숫제 금단 증상 온 마약 중독자처럼 벌벌 떠는 엘리.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참고 있는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이걸로 대신 지불할 수 있을까요?”
“…되겠냐!”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엘리가 황급히 손을 빼 등 뒤로 숨긴다. 아쉬움으로 축 처진 입꼬리만큼은 숨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에이. 아쉽네요. 1박에 얼마죠?”
“30쿠퍼.”
“여기요.”
두툼해진 지갑에서 큼직한 동화 3개를 꺼내 건넸다.
이를 빤히 바라보던 엘리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방값을 받아 갔다.
“하아…그래. 제대로 받았으니까 어제 썼던 그 방 그대로 써도 돼.”
“혹시 다른 방을 빌려도 괜찮을까요?”
“응? 거기가 제일 좋은 방인데? 뭐 어차피 짐 옮기는 건 너니까 빈방 있으면 편할 대로 해.”
“네! 그럼 엘리의 방으로 짐부터 옮겨둘게요!”
“…멈춰! 거긴 비매품이거든?! 손님이면 손님답게 얌전히 객실이나 쓰라고.”
“안 돼요?”
“그걸 말이라고 하니.”
“힝.”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대고는 한걸음 물러섰다. 누가 봐도 나 삐졌어요 하는 분위기가 포인트.
그렇게 엘리가 어이없어하면서도 살짝 신경 쓰이게 만든 순간. 가볍게 상의를 들춰 배를 보여주었다. 밖에서 보면 카운터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로.
“요나 너…!”
순간 언성이 높아지는 엘리. 그런 그녀를 향해 아무 말도 말라는 듯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말했다.
“쉬잇.”
“….”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조용해진 엘리가 침을 꼴깍 삼킨다. 그 상태에서 오직 눈앞의 한 사람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오늘도 문은 안 잠가놓을게요.”
“…!”
엘리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굳는다.
그 모습에 히히 웃으며 그대로 뒤돌아 2층으로 올라갔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성큼성큼 들어간 방. 문을 닫는 순간 소리 없이 폴짝 뛰었다.
캬!
방금 전의 나. 존나 매력적이었어.
***
엘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껏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휙 사라져 버린 요나.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 바빴으니까.
‘역시 핑챙은 요망하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아직도 엘리의 왼손에는 10실버와 맞바꾼 배의 감촉이 망막에는 하얗고 매끈한 복부의 생김새가 잔상처럼 남아있었다.
거기에 숨이 닿을 정도로 지근거리에서 오늘 있었던 일을 쫑알대는 것은 또 무슨 짓인지….
하마터면 키스하는 건가 싶어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긴장해 버린 엘리였으나…아무리 요나라도 이렇게까지 들이댄 적은 이번이 처음.
그 위화감이 엘리의 이성에 제동을 걸었다.
‘나한테 알려줄 수 없는 비밀이라는 것과 관련 있는 건가? 그런 거라면 좀 서운한데….’
엘리의 머릿속으로 모솔아다스러운 음습한 망상이 시뮬레이션 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한층 적극적으로 변한 요나. 본인은 동정이라 주장했지만 오늘의 요망함은 절대 동정의 그것이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요나가 자신보다 먼저 어른의 계단을 오른 것이라면? 그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리디아라면?
-아핫! 그 나이 먹고 아직도 처녀라는 게 말이 되나요 엘리? 어쩔 수 없네요. 경험자인 제가 엘리의 처녀를 떼주는 수밖에.
-에? 겨우 이걸로 끝이에요? 리디아는 조금 더 잘했는데….
-으응. 아니에요. 앞으로 잘하면 되죠. 그런 의미에서 저랑 리디아가 하는 걸 견학해 보실래요?
그다음 장면을 상상하는 순간. 엘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끼야아아아아악!!”
“엘리 선배?”
“리디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미안. 역시 다른 가게에서 사 온 음식을 먹는 건 좀 그랬나.”
“그건 괜찮아! 오늘 수고했으니까 시원한 맥주 한잔 서비스로 줄게!”
“?”
종잡을 수 없는 엘리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디아였으나 엘리는 원래부터 이상한 사람이었던 터라 그러려니 넘겼다.
한참을 혼자 얼굴을 붉히다 괴성을 지르길 반복하는 엘리였으나 리디아가 맥주를 다 비울 쯤이 되자 그래도 어느 정도 제정신을 되찾았다.
그때를 노린 리디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엘리를 불렀다.
“엘리 선배.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무슨…아 안돼! 하지 마! 나한테서 요나를 뺏어가지 마!!”
“헛소리. 곤란.”
아직 부족했나.
한숨을 내쉰 리디아가 직접 카운터에 들어가 맥주를 리필해왔다. 그렇게 한 잔을 추가로 비우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진정했어?”
“…응. 중요한 이야기라고? 뭔데?”
“요나에 관한 일.”
“캐릉! …아 아니. 계속해 줘.”
수상할 정도로 뜨거운 호흡을 내뱉는 엘리. 이에 고개를 갸웃거린 리디아였으나 본인이 계속하라니 계속하기로 했다.
“요나는 원래 뭐하던 애야?”
“엉? 뭐…어렸을 때는 구걸로 먹고살다가 좀 자란 뒤에는 이런저런 잡일을. 그리고 요즘에는 나쁜 버릇이 들렸는지 양아치들 상대로 소매치기하고 다닌다는데? 들킬 뻔한 건 저번이 처음인 것 같고.”
운 좋게 아무 일 없이 금방 풀려났다고는 하나 범죄 클랜의 손에 험한 꼴을 볼 뻔한 요나다.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화가 나는지 자기도 모르게 그르렁대는 엘리.
아까부터 오락가락하는 엘리였지만 리디아에겐 낯설지 않은 풍경이이다. 살벌한 투기를 대충 흘려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기껏해야 잡범. 그런 것 치고 너무 능숙해.”
“뭐가?”
“무언가 죽이는 일에.”
거기까지 말한 리디아가 맥주잔의 마지막 한 모금을 털어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죽일 때 망설이지 않아. 연민하지 않아. 동요하지 않아. 심지어 알려준 적 없는 고블린의 약점을 훤히 꿰고 있어. 단순히 주워들었다기엔 역사와 신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고. 적어도 일반적인 고아는 절대 아니야.”
“우연 아냐? 그런 종류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드물지만 찾으려면 찾을 수 있는 수준이잖아.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했을 수도 있지.”
“이외에도 상식이 일반인들과는 괴리된 느낌을 여러번 받았어. 순간적인 속도는 2층 모험가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그 정도라고?”
“응. 엘리 선배 말대로 하나하나는 우연일 수 있지. 하지만 전부 모아놓고 봐도 정말 그럴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알잖아. 선배는 나보다 깊이 엮였으니까.”
“….”
말없이 자신의 텅 빈 오른 소매를 움켜쥐는 엘리.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황혼을 삼키는 자.”
미궁에 잠든 신의 유해와 권능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이단자. 그리고 엘리의 팔을 앗아간 것이나 다름없는 원흉.
엘리의 중얼거림에 리디아가 무표정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응. 요나는 거기서 탈출한 아이일지도 몰라.”
“…그런가.”
빈 소매를 움켜쥐던 엘리의 손이 느슨하게 풀어진다. 그녀는 아직도 3년전 미궁에서 보았던 참상을 기억하고 있다.
철저하게 해체되어 온갖 비인간적인 실험에 소모되는 모험가들의 시체.
죽은 신의 권능을 휘두르며 몬스터를 제 뜻대로 부리는 광인.
이단자 사이에서 세뇌 당하며 자란 탓에 사고방식이 뒤틀린 아이들.
그리고 폭주한 계층 수호자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려다 그 아이중 하나에게 등을 찔린 일까지.
그 탓에 빈틈을 보인 엘리는 계층 수호자에게 한쪽 팔을 내어주고 말았다. 아이들은 여파에 휘말려 어딘가로 사라졌고.
오른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환통. 이 지긋지긋한 과거의 잔영이 남아있는 이상 엘리는 그날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요나가 말이지….”
환통이 거세짐에 따라 품에서 마력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엘리.
곰곰이 생각해보면 리디아에게 들은 요나는 세뇌당한 아이들과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깊은 한숨과 함께 뿜어진 연기가 엘리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잠시나마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그녀를 숨겨주듯이.
물론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리디아의 억측일 뿐. 확실한 것은 무엇하나 없다.
하지만. 황혼을 삼키는 자는 분홍머리에 특히 집착했기에 모아둔 아이 중에도 분홍머리가 제법 있었다.
만에 하나. 정말로 요나가 그 아이들 중 하나였다면….
요나를 즉시 사랑의 여신의 신전에 넘겨 ‘교화’ 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요나의 애정표현은 3년 전의 그 날처럼 엘리의 등을 찌르기 위해 가장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난 어떻게 해야….”
엘리의 음울한 목소리가 잿가루와 함께 바닥에 내려앉는다.
무엇 하나 위층의 소년에게 닿는 일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엘리는 고개를 푹 떨궜다. 삶에 지친 사람처럼.
리디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말없이 선배의 잔에 술을 채워넣어주는 것 뿐이었다.
***
아래층에서 두 어른이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는 시각.
요나는 텅 빈 방의 중앙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넓게 벌린 팔은 미역처럼 꿈틀거렸으며 엉덩이는 좌우로 리드미컬하게 흔들리는 기묘한 움직임.
“가챠 운을 높여주는 춤…!”
모 성배전쟁이 만들어 낸 유서 깊은 가챠 기원 댄스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냥 가챠가 좋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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