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2
“갈!! 감히 사술을 쓰다니! 신성한 탈의 도박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뭐 뭐야.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더니 급격하게 쭈그러드는 베니. 한창 마음이 약해진 상태이기 때문이리라.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여기서 니플 패치를 꺼내는 게 어딨어!!
“크아아악!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냐고요?! 당연하죠! 이제 베니가 그 쓸데없이 야한 드레스를 벗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여기서 니플 패치라니! 아니 애초에 왜 속옷 대신 그런 걸 붙이고 다니는 거예요!”
“이런 옷을 입으려면 속옷 선이 안 드러나는 걸 입어야 해서 어쩔 수 없었을 뿐이야…!”
“그거랑 드레스 대신 그런 스티커 쪼가리를 벗은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평범한 속옷이면 몰라도 스티커 3개 달랑 붙인 모습을 보이라고?! 그건 아무리 여자라도 수치스럽다구!”
“큿…!”
남역 세계의 기준으로도 여자의 스티커 차림은 아웃이란 말인가.
순간 하고 싶은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이성 앞에서 속옷 차림이 되는 건 백 보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치자.
사적인 공간에서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일은 흔하잖은가.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이나 친한 사람 앞에서 그러고 다니기도 하고.
하지만 스티커 3장 딱 붙여두고 활보한다? 자기 혼자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보여줄 수 없지. 가족이나 불알친구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지금. 베니는 가족도 오랜 친구도 아닌 좀 어리지만 어엿한 이성 앞에서 그런 숭한 차림이 될 것을 강요당하는 중이다.
차라리 니플 패치만 벗고 말겠다는 발상은 이해는 간다. 그렇다고 해서 배신감과 허망함에 속이 끓어오르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던 것도 잠시. 한쪽만 돌기의 모양이 도드라지는 베니의 가슴팍을 보자 빠르게 진정되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네….
그리고 그렇게 되찾은 내면의 평온 속에서 깨달았다. 깨닫고 말았다.
“베니. 방금 스티커 3장이라고 했나요?”
“이젠 2장이야….”
슬그머니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는 베니. 당장 손을 치우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니었다.
“2장이야 위쪽이겠지만…마지막 한 장을 그럼…?”
“…!”
순간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베니의 얼굴. 그녀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으. 그게 말이지? 아무리 선이 얇은 걸 찾아 입어도 워낙 옷이 몸에 딱 붙어서 자꾸 거슬리길래….”
“설마?!”
엉덩이 쪽에 속옷 선이 보이지 않길래 티팬티겠거니 지레짐작했건만. 그조차도 아니었을 줄이야.
경악한 나를 향해 눈을 꾹 감고 고백하는 베니.
“괘 괜찮아! 길쭉한 거라 뒤에까지 가리는 거니까!”
“뭐뭣!”
C 스트링이잖아?!
알파벳 C를 닮은 모양으로 입는다기보다는 주변 부위를 가리도록 다리 사이에 끼운다는 것에 가까운 느낌의 속옷.
상상 이상으로 파격적인 진실에 의욕이 샘솟았다.
“좋아요. 무조건 겉에서부터 벗어야 한다는 룰은 없었으니 여기서는 제가 양보해 드리죠.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요. 끝까지 가죠.”
“싫은데?! 대체 왜 그렇게 나를 벗겨 먹으려는 거야!”
“그거야 베니가 이 내기에 응한 이유랑 같지 않을까요?”
“으읏!”
무언가 찔리는 게 있는지 시선을 피하는 베니.
그렇다. 그녀 또한 나한테 맞춰주는 척하면서도 내 탈의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대는 베니.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고 베니도 그렇고 목적은 명확하잖아요? 서로의 몸에 흥미가 있지만 정작 깊은 관계가 되는 건 좀 부담스러운 거죠?”
“아 아냐. 나는….”
“이해해요. 엘리도 있고 리디아 님도 있으니 친구가 둘밖에 없는 베니로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거겠죠. 물론 저도 순서에 관해서는 나름 신경 쓰고 있답니다? 가능하면 처음은 엘리랑 할 생각이거든요.”
“….”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내 눈치를 살피는 베니. 이 와중에도 힐끗힐끗 쇄골을 훔쳐보고 있다.
가죽 갑옷을 벗었을 뿐 옷 자체는 제대로 갖춰 입었는데 왜 저러나 싶었는데…베니가 땀을 흘린 만큼 나도 꽤 젖어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베니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내 쇄골을 보고 있던 게 아니다. 목덜미를 따라 흐른 땀방울이 쇄골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던 거지.
은근슬쩍 베니의 손에 올라가 있던 니플 패치를 가져가고는 그 대신 동전을 올려두었다.
“딱 3판.”
“어?”
“누가 이기고 지건 딱 세 번만 더 던져보죠. 그거 아시나요? 남자는 속옷이 하나뿐이라는 거. 베니가 3번 연속으로 지면 알몸이 되겠지만…그건 저도 마찬가지라는 소리예요.”
“…!”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베니의 눈동자. 작은 체구에 걸맞게 가느다란 숨결이 조금 거칠어졌으며 눈동자에서는 하트 문양이 요사스런 빛깔로 반짝였다.
서큐버스 특유의 매혹의 마력은 없었으나 그 자체로 사람을 홀리기에 충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에 뒤지지 않도록 나 또한 최대한 분위기를 잡았다.
이미지 하는 것은 소악마. 아무리 작고 연약해도 어엿한 악마답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으로 사람을 시험에 빠뜨리는 느낌적인 느낌.
멍한 표정으로 침만 꼴깍꼴깍 삼키는 베니. 그런 그녀의 손을 간질이며 속삭였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엔 저랑 베니 둘뿐이잖아요?”
“하 하지만….”
“베니가 생각할 건 하나뿐이에요.”
거기까지 말하고는 슬쩍 상의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맨살이 보일랑 말랑하는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앞 뒤. 어느 쪽이 나올 것 같나요?”
“….”
샤도우와 떨어지며 유약해진 베니의 눈에 처음으로 의지의 빛이 깃들었다.
“…앞.”
“그럼 전 뒤네요.”
방긋 웃으며 베니의 손등을 가볍게 쳐올렸다.
그 충격에 빙글빙글 회전하며 튀어 오르는 동전. 이를 허공에서 낚아채고는 천천히 주먹을 펼쳤다.
결과는….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도 베니도 옷은 멀쩡히 입고 있다.
옷만 멀쩡히 입고 있다.
“베니. 냉정히 생각해 봤는데 저희가 방금까지 미쳐있었던 것 같아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베니는 2번 졌다. 즉 반대쪽 니플 패치와 이걸 과연 속옷이라고 봐야 하나 싶은 C 스트링 팬티까지 벗은 상황.
맨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만 입어서일까. 옷 위로 선명하게 도드라진 포인트와 반대로 조금만 움직이면 바로 말려들어가 노골적인 윤곽을 그리는 하반신.
하지만 어쨌든 옷은 제대로 입고 있다. 왜냐면 2번밖에 안 졌으니까…!
그리고 이를 달리 말하면 남은 한번은 내가 졌다는 뜻.
베니에게 똑같이 돌려주듯 상의와 하의는 가만 놔두고 속옷만 벗어 던졌으나….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감각에 돌연 제정신이 돌아왔다.
세상에.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마침 약속했던 마지막 세 번째 판이 끝난 터라 그래서 이제 뭐 함? 이라는 의문은 그대로 자괴감이 되어 돌아왔다.
지금의 베니는 무척이나 야했지만…결국 본방을 하지도 혼자 한 발 뺄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건 나에게도 베니에게도 고문이나 다름없는 짓 아닌가?
나는 왜 스스로를 번뇌에 몰아넣은 것이지? 앞으로 20시간 넘게 더 있어야 하는데?
한숨을 푸욱 내쉬며 그대로 벗어둔 옷가지를 베개 삼아 드러누우며 말했다.
“하아…갑자기 현자타임이라도 온 것 같네요.”
“뭐? 그걸 요나 네가 어떻게 알아…?”
“넹? 뭐가요? 현자타임이요?”
“그으. 그거잖아? 여자가 혼자 해결하고 나면 갑자기 허망하고 자괴감 들고 막 그러는 거. 남자는 현자 타임 없지 않아?”
“아….”
판 대륙의 남자는 성욕이 약하다.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상시 현자 타임이나 다름없는 수준.
그렇다 보니 따로 현자타임이라 분류할 만한 상태가 없는 것이리라.
반면 여자는 성욕이 강해졌으니 본래 느끼던 감정적 기복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기복 또한 크게 느껴지리라.
즉 현자 타임만 놓고 보면 지구의 남자의 비슷하거나 더 심하게 느낀다는 뜻.
생각해 본 적 없는 남역 세계의 상식에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남자들은 없을 수도 있는데 전 있어요.”
“어?”
“분홍 머리에 대한 소문이 전부 거짓말인 건 아니거든요.”
“헉…!
숨을 삼킨 베니가 조심스러운 하지만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분홍 머리 남자는 전신이 성감대라는 소문도 사실이야?”
“…그건 헛소문이네요. 그 정도면 일상생활도 불가능한 수준이잖아요.”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베니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부끄러운 모양이다.
“뭐어. 성욕이 강한 건 사실이니 그게 와전된 거 아닐까요? 다른 남자들보다 훨씬 쉽게 세울 수 있고 지속시간도 기니까요.”
“세워…지속시간….”
혼자 중얼거리는 베니의 몸이 한층 더 동글동글하게 말렸다. 이 정도면 거의 하프 공벌레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
한창 정신적으로 말랑말랑해진 베니에게 너무 자극이 강한 이야기였나 보다.
자꾸 야한 이야기만 하면 또 폭주할 것 같으니 슬쩍 주제를 바꿔보기로 했다.
“베니.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요.”
“으응? 뭔데?”
“베니는 샤도우가 없으면 약해진다는 걸 이번에 알았잖아요? 아직도 샤도우와의 연결을 끊어내고 싶으신 건가요?”
“….”
입을 꾹 다물고 고민하는 베니.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는 둥글게 말았던 몸을 다시 펴며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삶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해.”
절절한 진심이 담겨있는 목소리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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