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3
드디어 5성을 뽑았나 싶었더니 룩딸 권능이 나왔다.
“…당장은 미묘해 보여도 정작 실전에서는 어딘가 써먹을 구석이 있을 거야.”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려가며 침대에 쌓인 나머지 결과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3성이 두 개 더 나왔었지. 그걸 확인해 볼 차례다.
“어디 보자….”
일단 가장 위쪽에서 굴러다니는 마력초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뒤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홀로 은은한 빛을 발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가?”
주변을 헤치고 빛의 근원을 꺼내 들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은 검지 크기의 수정 결정.
수정 자체는 흔한 것이지만 안에 깃든 빛 때문에 보석을 연상케 한다. 아마 이게 리스트에 있던 달빛을 머금은 수정이겠지.
“재료템인가.”
일전에 뽑았던 유니콘의 뿔과 같은 3성 재료. 이걸로 뭘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유니콘 단검의 위력을 생각하면 분명 상당한 물건을 만들 수 있겠지.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다시 이브한테 가야 한다고?”
그 짓을 했는데 다시 이브에게 가야 한다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나랑 야한 거 한번 해보겠다고 빚까지 져서 온 사람한테 제 발로 쫄래쫄래 들어가야 한다니.
이번에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못하리라.
뭐어. 야스 자체는 상관없는데 엘리와 리디아에게 약속해 둔 게 있잖은가.
그 둘이 내게 잘해주는 것은 단순히 좋은 사람이라서 나랑 친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렇고 그런 일을 바라서라는 이유도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리라.
나도 이를 알고 이용해 이것저것 받아먹었고.
하지만 이제와서 받을 건 다 받았으니 야스는 다른 사람이랑 하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이건 좀 양심에 찔리잖는가.
“좋아. 베니한테 가야지.”
이브만큼의 경험은 없겠지만 베니 또한 고위 마법사다. 이론이 아닌 실전에 빠삭한 타입이라도 다른 이들보다 이런 특수한 재료에 익숙할 터.
한 번에 뭘로 가공하면 좋을지 알려주고 최고의 장인과 연결해 주지는 못해도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 정도는 알려주겠지.
그러면 엘리나 리디아에게 가서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그만이다.
엘리는 은퇴한 지 좀 됐다지만 한때 판 그레이브에서 가장 유명한 모험가였고.
리디아는 중증의 장비병 환자 아닌가. 많이 사본만큼 자세히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전생의 내가 작가라면 좋은 키보드가 필요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나름 비싼 키보드를 월화수목금토일 매일매일 다른 걸 쓰고도 하나 남을 만큼 샀던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나는 대체 왜 키보드를 8개나 샀던 걸까….
한숨을 푸욱 내쉬며 일단 수정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직 3성은 하나 더 남았으니 그쪽부터 확인해야지.
“분명 이름이 신념의 조각이었던가.”
추상적인 이름이다. 얼핏 듣기에는 재료 내지는 장비 같은데….
아무리 뒤져보아도 3성스러운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 와중에 하나 더 뽑힌 손목 석궁을 중첩 강화시켰지만.
일전의 강화 때는 위력이 크게 상승하더니 이번에는 무려 연발 기능이 생겼다.
겨우 3발뿐이긴 하지만 한번 발사하고 다시 한 발을 장전해야 했던 이전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
물론 그만큼 석궁이 좀 더 크고 무거워졌지만….
크기가 움직임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고 무게는 이번에 미궁에서 모르가나를 쓰러뜨리며 성장한 것과 4성급의 막대한 오러를 감당하기 위해 튼튼해진 몸 덕분에 문제없이 쓸 수 있으리라.
은신 스킬을 얻은 이후로 석궁에 소홀해졌지만…이 정도라면 좀 본격적으로 써먹어 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나저나 대체 어디있는 거람….”
설마 나왔다고 했는데 안 나온 건 아니겠지? 그보다는 내가 예상치 못한 형태라 발견 못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리라.
결국 수북이 쌓인 약초 더미를 옆으로 하나씩 치우며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뒤졌을까.
문득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은 목함을 발견했다.
“뭐지?”
사이즈를 보아하니 딱 반지 담아두기 좋게 생겼는데. 설마 장신구형 아티팩트인가?
일전에 모르가나에게서 파밍한 아티팩트는 실로 마법사다운 아티팩트…그러니까 마나를 꽤 많이 잡아먹고 발동하는 형식이었다.
성능 자체는 유용하지만 모르가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마나통을 가진 나로서는 몇 번 발동시키면 그대로 마나 탈진에 빠질 정도.
베니는 자신의 전투 스타일과 맞지 않는다며 그냥 팔아버리라 했었지.
결국 모르가나에게서 건진 마도구는 이 아공간 로브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긴 하지만.
“한쪽은 이미 아공간 반지를 끼고 있으니 반대쪽에 끼는 게 좋으려나.”
로브가 있으니 아공간 반지는 이제 중고로 팔아버릴까 고민하기도 했는데….
로브는 결국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야 하지 않는가.
아공간 반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빠르게 무기를 꺼내거나 교환하기 위해 만들어진 녀석이다.
용량은 작고 경량화 기능도 없어서 너무 무거운 무기는 못 넣지만…실전성 하나는 확실하다. 애초에 둘은 서로 용도가 다르단 말이지.
아무튼 그런 상황이다 보니 눈앞의 상자가 엄청나게 기대되기 시작했다.
치사하게 한 번 더 포장해서 보내주다니. 가챠 했더니 가챠 상자가 나온 꼴 아닌가.
침을 꼴깍 삼키며 단숨에 목함을 열었다.
“에잇!”
딸깍.
그 순간 확 풍겨 오는 청량한 향기. 상자 안은 마른 이끼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그 중앙에는 순백의 단약이 하나 놓여있었다.
“영약?”
예상치 못한 물건에 절로 갸웃거리게 되는 고개. 신념의 조각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한 영약이라….
“아!”
오러와 관련된 영약인가? 흔히들 마법을 지혜에 빗대고 오러를 신념에 빗대지 않던가.
베니라면 마법은 우둔함에서 오는 기적이라며 방방 뛰겠지마는…아무튼 세간의 인식은 그러하다.
“조금 곤란한데.”
무려 3성급 영약이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절대 평범한 수준은 아닐 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영약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녀석이 아닐까?
물론 영약의 효과가 좋으면 나도 좋긴 한데…문제는 방금 막 오러 스킬인 잠력폭발을 배우지 않았던가.
오러를 격발시켜 순간적으로 내재된 저력을 이끌어내는 종류의 각성기. 순수하게 오러만으로 사용하는 기술은 아니지만 그래도 4성이다.
한차례 발동하고 탈진할 때까지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오러가 생겼을 뿐인데도 벌써 아랫배가 상당히 묵직하다.
그런데 여기에 3성급 영약을 하나 더 먹어야 한다니….
“에이. 그래도 나한테 해가 될 일을 하지는 않겠지.”
사랑의 여신이 나를 자기 취향대로 개조하는 것 같은 느낌은 자주 받지만 한번 엿되어보라는 듯 구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과할 정도로 도와주려 했었지.
무엇보다 내게는 먹는 거라면 뭐든 완벽하게 소화시켜주는 탐식의 위장이라는 권능이 있지 않은가.
“좋아. 먹으라고 준 걸 테니 먹어야지.”
단숨에 목함에 들어있던 단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혀에 닿는 순간 부드럽게 녹아 스르륵 넘어간다.
…분명 하얀색이었지? 하얀 액체를 마셨다고 생각하니 본능적인 거부감이 올라왔지만 다행히도 영약에서는 밤꽃 향기도 매화 향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아까까지는 그렇게나 청량한 민트 향을 풍기더니…어째서인지 입에 넣는 순간 아무런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더라.
뭔가 싶어 눈을 끔뻑이는 것도 잠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영약이 도중부터 위가 아닌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마 탐식의 위장이 가진 고유 공간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리라.
그렇게 기다리기를 몇 초. 일단 저장해 두고 내 여력이 될 때마다 소화해서 주려나 보다 싶은 순간이었다.
뱃속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오는 기운. 내가 마셨던 액체는 사라지고 오직 순수한 기운만이 내 몸에 들어차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오러를 아주 기초적인 활용밖에 못 하는 상황. 이 막대한 기운을 어찌해야 하나 난감했는데.
“엇.”
영약의 기운이 멋대로 움직이더니 그대로 내 아랫배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가 제대로 마나 호흡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마나 하트를 형성하지 못하고 심장 부근에 마나를 뭉쳐놓고 사는 것처럼.
오러 또한 연성법을 익히지 못해 그저 아랫배에 뭉쳐두었을 뿐이다. 그러다 필요하면 전신으로 끌어다 쓰고.
헌데 영약의 기운이 일종의 구심점이 되더니 오러를 끌어당겨 깔끔하게 제련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은 먹기 전에 보았던 것처럼 일말의 티끌도 묻어있지 않은 순백의 구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게 제대로 된 단전이라는 것을.
“…그런 건가.”
너무나 깨끗해 쉽게 물들 것 같은 단전의 상태에 깨달았다.
신념의 조각은 오러의 양을 늘리는 게 아니라 단전 형성을 돕는 영약이라는 것을.
오러 또한 본래 기사의 신으로부터 비롯된 권능이었던 것.
처음에는 지금처럼 나름의 체계를 갖고 수련하던 것이 아니었으리라.
갑자기 힘이 주어지는 것은 좋으나 이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나름의 노력이 필요하니까.
신념의 조각은 이를 위해 만들어진 영약이었으리라.
오러를 뭉쳐 단전을 만들긴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기틀 마련에 불과하다.
오러의 힘은 신념의 힘. 무엇으로든 물들 수 있는 이 새하얀 도화지를 어떤 그림으로 채울지…단순한 조각을 어떠한 신념으로 완성시킬지는 내 몫이다.
“…이거 어찌 보면 근본 수련법 아닌가?”
마법은 본래 기적이었다. 그렇기에 신에게 하사받은 힘으로 그저 바라고 또 바라여 불가능에 손을 뻗는 것.
내가 요즘 베니에게 배우는 내용 아닌가. 실제로 마나나 마법은 가챠를 통해 사랑의 여신에게 받은 것이고.
오러 또한 마찬가지다. 일단 오러를 받고 단전처럼 뭉쳐둔 뒤 그 위에 나의 신념을 덧그린다.
처음부터 오러 연성법에 담긴 진의를 탐구하고 이에 맞춰 쌓은 오러를 정해진 방법으로 뭉쳐 단전으로 변화시키는 지금의 방식과는 정반대.
어느 쪽이 좋은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애초에 둘은 장단점이 명확하지 않은가. 마법의 신과 기사의 신은 진작에 죽어 소멸했기도 하고.
다만 이거 하나는 알겠다.
“완전히 날로 먹을 시기는 슬슬 끝나가는 건가.”
개쩌는 0티어 캐릭을 뽑았더라도 스킬에 대한 이해 없이 대충 쓴다면 엔드 컨텐츠는 노릴 수 없다.
그러한 이치겠지.
***
다음 날 아침. 레몬과 애플이 식겁한 표정으로 요정과 은화를 박차고 들어왔다.
“크 큰일 났슴다 요나넴!”
“보스가 가출한 검다!”
“엣.”
이브의 흑화 에피소드는 어느 날 갑자기 이브가 사라지는 것에서 시작할 예정이었는데.
…업보라는 말이 있다.
분명 지금 같은 상황에 쓰는 말이리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네가 죽였…아니 흑화시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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