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5
불길한 데자뷰에 몸을 떨며 요정과 은화를 빠져나온 이후.
내가 향한 곳은 엘리에게도 말했듯 베니의 공방이었다.
이브의 실종과 흑화 위험은 큰 사건이고 개인적으로 걱정되기도 하지만….
솔직히 걱정한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는 건 아니잖은가.
내겐 작정하고 숨은 이브를 찾을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그녀가 제 발로 나를 찾아오게 만들어야 하고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두었다.
이제 남은 건 내 할 일을 하며 이브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뿐.
“그런 이유로 찾아왔어요 베니!”
“…사람을 무슨 숙제처럼 말해놓고 내가 반겨주길 바란 거야?!”
“에이. 숙제라뇨.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베니를 만나러 올 예정이었다니까요?”
“글쎄. 내가 듣기로는 그 이브라는 사람이 사라져서 대신 나한테 일을 맡기려는 것 같은데.”
“이런. 베니처럼 눈치 빠른 꼬맹이는 질색인데 말이죠.”
“누가 꼬맹이라는 거야! 누가!”
빼애액 소리를 지르면서도 손님 대접은 확실하게 해줄 생각인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건네는 베니.
찻잔이 아닌 포션 병에 담겨있다는 점이 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냄새는 영락없는 허브티라 그냥 순순히 받아 마시기로 했다.
물론 베니가 허브티에 뭘 타서 폰 허브를 찍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잠깐 하긴 했는데….
무슨 약물을 썼건 먹는 것이라면 탐식의 위장 덕에 완벽히 소화해 낼 테니 별 의미는 없다는 결론에 다다라 금세 시큰둥해졌다.
“뭐 뭐야. 그렇게 맛없어? 왜 그런 표정으로 마시는 건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금 재미없는 생각이 났을 뿐이니까.”
베니를 안심시키려는 듯 빵긋 웃어 보이고는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베니. 일전에 이야기했던 샤도우와의 일은 어떻게 되셨나요?”
“몰라.”
“네?”
“일단 말해두는데 전처럼 무조건 적으로 샤도우를 떼어놓겠다는 뜻이 아냐. 생각해 보니 내가 모르는 게 많았다는 소리지.”
“뭐를요?”
“샤도우가 나랑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말이야.”
한숨을 푸욱 내쉬며 큼직한 유리관 안에서 꾸물거리는 샤도우를 바라보는 베니.
아무리 샤도우가 죽지 않는 몸이라지만 손상조차 입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일전의 전투에서 히폴리테에게 꽤 과격하게 제압당한 탓에 너덜너덜해진 터라 지금은 저렇게 얌전히 회복 중이라나.
내가 들어온 순간부터 촉수를 활발하게 꿈틀거리긴 했지만 샤도우 본인도 스스로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걸 아는지 유리관에서 나오려 들진 않았다.
조금 기특한 마음에 유리관 벽을 통통 두드리며 인사를 해주고는 물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구체적이고 자시고…나는 지금껏 샤도우를 하나의 현상으로 취급했어. 실제로 살아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행동 양상에서 규칙을 찾고 제물이 된 다른 친구들과의 접점을 비교하고 단단히 제어할 방법을 탐구하는 식으로 샤도우를 대했다고 하는 베니.
실제로 지금까지의 샤도우는 간단한 패턴대로 반응했고 이성이 존재한다기보다는 감정의 찌꺼기와 본능만이 남은 짐승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요나 네 말을 듣고 다시 마주하고 이것저것 알아보니까 많은 게 달라졌더라고.”
“달라졌다고요? 보이지 않았던 게 보이는 게 아니라요?”
“응. 달라졌어. 이 현상이 요나 너를 만난 이후인지 아니면 샤도우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후인지 그것도 아니면 일전에 모르가나의 결계로 격리된 탓에 한차례 연결이 희미해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샤도우는 예전과 달라졌어. 이건 확실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베니. 그녀가 작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고.”
발끝을 바닥에 빙글빙글 돌리며 이쪽을 힐끔거리는 베니.
나를 훔쳐보려고 한다기보다는 그냥 오랫동안 쳐다보기 힘들어하는 듯한 모습이다.
귀엽기도 해라.
양손으로 베니의 볼을 마구 주물러댔다.
“에잇.”
쪼물쪼물.
“머 머야. 하지먓!”
격렬하게 저항하는 베니. 다만 그 발버둥은 어디까지나 목 아래에서의 일이었다.
아주 싫지만은 않은지 얼굴은 얌전히 내어준 덕에 그 말랑쫀득보들보들무저항 볼살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내 손길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볼따구와 이를 따라 오리처럼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말기를 반복하는 베니.
그 모습에 낄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베니도 샤도우도 이전과 뭔가 달라졌지만 그게 뭔지는 잘 모른다는 거죠?”
“…응.”
“그럼 이제부터 찬찬히 알아가죠. 가능하면 저도 함께요.”
“응?”
의뭉스레 눈을 끔뻑이던 베니였으나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요나 너도 뭔가 사정이 많아 보이긴 해. …말해줄 생각은 없는 거지?”
“어…아직 그렇긴 한데 제 말뜻은 저를 알아달라는 게 아니라 저랑 같이 베니와 샤도우의 미래에 관해 알아가자는 소리였는데요?”
“….”
“….”
헛다리를 짚었다 생각한 걸까. 부끄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는 베니.
나 또한 괜히 뻘쭘해져 베니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러네.
내가 판 대륙에 빙의한 이후로 가장 깊은 이야기를 공유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베니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이야기가 아닌 내가 썼던 이야기들이지만….
내 가장 본질적인 면에 닿아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 만약. 언젠가 내가 다른 이에게 온전히 이해받는 날이 온다면. 혹은 모든 것을 털어놓는 날이 온다면.
그 상대는 높은 확률로 베니겠지.
우웅-
돌연 멋대로 로브 주머니 안에서 진동하는 풀돌 여신상.
그래그래. 사랑의 여신도 있었지.
이 경우에는 털어놓을 필요도 없이 이미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얼추 알고 있을 테니 조금 이야기가 다르지만 말이다.
한숨을 푸욱 내쉬며 한차례 성호를 긋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잠잠해지는 여신상.
이를 확인하고서야 아직도 눈을 감고 발만 동동 구르는 베니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히약! 머 머야!”
“아 이제 그만 본론으로 돌아갈까 해서요.”
“본론…맞다. 나한테 감정을 부탁할 게 있다고 찾아온 거였지?”
“맞아요. 달빛을 머금은 수정이라는 건데….”
로브 주머니에서 은은한 빛을 머금은 수정을 꺼내 베니에게 건넸다.
“달빛을 머금은 수정? 이름은 들어봤는데 뭐더라.”
내게 받은 수정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베니. 다만 육안으로는 짚이는 게 없는지 슬쩍 마력을 흘려본다.
“으음. 일단 안쪽에 모종의 기운이 담겨있는 건 확실해. 그것도 꽤 많은데 정순하기까지 하네. 이 정도면 그냥 가지고만 있어도 잔병치레는 안 하겠는걸?”
“오. 질병 면역 마도구라도 만들 수 있는 건가요?”
“으엣. 그런 엄청난 수준은 아냐. 무엇보다 그냥 기운이 맑고 깨끗해 몸에 좋을 뿐인지 살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구.”
“살균 능력이면 미약한 죽음의 기운을 계속 내보내는 거니 오히려 몸에 안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그런 발상은 좀 신선하네.”
피식 웃으며 내게 다시 수정을 돌려주고는 서고를 뒤적이는 베니.
특이하게도 쪼그려 앉아 가장 밑의 칸부터 찾더니 한 칸씩 올라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영 원하는 책이 나오질 않는지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는 베니.
어느 순간부터 까치발을 들더니 이제는 까치발을 해도 안 닿는지 폴짝폴짝 점프하며 책 제목을 훑어보고 있다.
“아니 집에 의자 같은 거 없어요 베니?”
“없는데? 평소에는 샤도우의 촉수를 의자처럼 변형시켜서 거기에 앉으니까.”
“….”
생각해 보니 내가 처음 공방에 왔을 때도 샤도우가 변형시킨 촉수 의자에 앉았었지.
그거 그냥 평소에도 자주 하던 짓이라 그런 거구나.
한숨을 푸욱 내쉬며 베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비켜봐요.”
“잉? 뭐야 갑자기. 일단 말해두는데 요나 너나 나나 키는 비슷하다?”
“그게 아니라 제가 엎드릴 테니 그 위에 올라가 찾아보라는 소리예요.”
“…에.”
순간 딱딱하게 굳어버린 베니. 하지만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휘휘 저으며 거절했다.
“어 어떻게 남자애를 밟고 올라가!”
“아 그럼 목마 타실래요? 아까 말한 것처럼 키가 비슷해서 무게중심 맞추기가 좀 힘들겠지만요.”
“내가 태우는 쪽이 아니라 타는 쪽인 게 문제라니까?! 차라리 내가 발판 할 테니까 요나 네가 올라가! 책 이름은 알려줄 테니까!”
“네? …아.”
그제야 베니가 왜 저렇게 당황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구 기준으로 보면 어린 여자애가 자기를 밟고 올라가라며 제안한 꼴 아닌가.
세상에. 아무리 내 키가 작고 몸이 가벼워도 그건 거절할 수밖에 없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럼 베니가 엎드려 주세요.”
“그래. 이게 맞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인 베니가 내 앞에 네발로 엎드렸다.
몸에 착 달라붙는 드레스 때문일까. 고스란히 드러나는 등과 엉덩이의 라인.
그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이 경우에는 내가 작은 여자애를 밟고 올라타야 하는 거잖아?
하지만 나는 밟아달라고 하는 부탁은 거절하지 않는 주의다. 오늘부터 그러기로 했다.
배덕감으로 콩닥거리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베니의 허리에 한쪽 발을 올렸다.
“…자 잠깐.”
그제야 누굴 발판으로 쓴다는 결론 자체가 이상했다는 걸 깨달은 베니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얍!”
그대로 체중을 실고 베니의 위에 올라탔으니까.
베니의 작은 몸이 내 몸무게에 짓눌려 삐걱이고 휘청이다가 금세 중심을 되찾는다.
하긴. 마법사라고는 하나 고위 모험가니 근력은 상당하겠지.
방금은 베니 자체가 워낙 가벼워 내 몸무게가 더해지는 것으로 무게중심이 흔들린 탓이리라.
그렇게 베니를 짓밟고 올라탄 감상은.
“오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또 해달라고 하면 해주려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의 의자는…베니 너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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