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음. 엿됐군.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해하던 두목년과 시선이 마주쳤다. 동시에 잔혹하게 일그러지는 입가.
“너. 이 핑챙 놈아. 아까 뭐라고 했지? 살려달라고?”
“저런.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지 환청이 들리는 건가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저희 할머니도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자주 오락가락하셨거든요.”
“…하?”
일단 반사적으로 빈정대고 봤지만 낮게 깔린 목소리와 피부를 찌릿하게 자극하는 살기에 바로 눈을 깔았다.
“아…그게 그 뭐냐. 저는 아무 말도 안했다는 소리에요.”
조금만 더 버티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데 여기서 괜히 심기를 거슬렀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잖은가.
나 김요나. 죽을 땐 죽더라도 할 말은 하는 남자.
…하지만 잠깐 숙이는 걸로 살 수 있다면 얼마든 대가리 박을 준비가 되어있는 남자기도 하다.
내 물 흐르는듯한 태세 전환이 마음에 들었는지 두목이 그제야 살기를 풀며 입을 열었다.
“환청이건 뭐건 상관없어. 계속 살려달라고 해. 옆구리에 바람구멍 나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손가락 하나마다 끼워진 색색의 보석 반지. 그중 녹색 반지가 밝게 빛나더니 두목의 손끝에서 코등이 없는 투척용 단검 하나가 튀어나왔다.
“….”
저게 뭔지는 잘 알고 있다. 아무렴. 저것도 내가 설정한 아티팩트니 당연한 일이지.
마탑의 스테디 셀러인 무기 보관 아티팩트. 본래 예비용 무기 한 자루 정도 집어넣는 물건이지만….
투척용 무기를 보관했다 꺼내 던지는 식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었나 보네. 실제로 반지 몇개가 광택을 잃은 것을 보아 확실하다.
조금이나마 내 의도를 뛰어넘은 사용법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녀석이 갑자기 철창 안쪽으로 단검을 쑤셔 넣었다.
스윽.
차가운 감각이 볼을 스치고 지나가자 뒤늦게 올라오는 화끈함. 내 잘생긴 얼굴에 얇은 칼자국을 남긴 두목이 으르렁댔다.
“누가 입 다물라고 했지? 모가지가 베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계속 빌어!”
“사 살려주세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비명. 눈앞에서 미친년이 칼을 휘두르면 시키지 않아도 누구나 살려달라 외칠 것이다.
그제야 만족스레 한숨을 내쉬는 두목 년. 자기가 죽을 위기에 처하니 돌아버린 게 분명하다.
속으로는 잘근잘근 씹으며 겉으로는 시키는대로 열심히 살려달라 외치고 있자니 성큼성큼 철창을 열고 들어오는 녀석.
단단히 결박된 나를 뒤에서부터 번쩍 들어 방패 삼은 녀석이 내 목덜미에 단검을 겨누며 속삭였다. 이빨은 안 닦는 건지 조금 썩은내가 났다.
“옳지. 잘 하고 있어. 그렇게만 하면 나중에 살려줄게. 약속이야.”
아하. 인질로 쓰려던 건가. 근데 그게 효과가 있긴 하나? 거기에 살려준다는 말도 믿을 수 없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 하나 조지려던 년이 하는 말 아닌가.
하지만 일단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조금만 더 참으면 분명 기회는 올 테니.
대체 무슨 냄새를 숨기고 싶었던 건지 정량을 아득히 넘긴 향수 덕에 얼굴 연기는 그닥 어렵지 않았다. 향기도 과하면 악취인 법 아닌가.
“살…려주세요!”
눈치없이 진짜냐고 묻는 대신 더 절박하게 살려달라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다소 여유로워진 두목이 지하 감옥의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난폭하고 말고의 영역을 떠나 아예 문을 부숴버리며 등장한 낮선 여인.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호흡이 멎었다.
타오르는 불처럼 새빨간 머리카락과 눈동자. 굳게 닫힌 입가 때문인지 무표정해 보였으며 키는 조금 작았지만 전신에 걸친 중갑 덕에 티가 나진 않는다.
그야말로 기사라는 느낌.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지 실제로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고결한 리디아.
모험가 쪽과는 큰 연이 없는 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몰락한 기사 가문 출신이자 길드로부터 이명을 받은 고위 모험가. 그리고 말 그대로 고결한 성품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려나? 아무리 그래도 리디아는 볼꼴 못볼꼴 다 본 베테랑 모험가 아닌가.
나라면 그냥 무시하고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인질을 살릴 수 있으면 다행이고 아니라면 아쉬운 일일뿐.
자신에게 무언가 페널티가 가해지는 것도 없잖은가.
그냥 아까 욕이나 한 바가지 할 걸 그랬나 속으로 후회하는 사이. 예상대로 나를 들이민 두목은 리디아를 상대로 협상을 시작했다.
“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이 꼬맹이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다!”
“…인질?”
잔뜩 겁먹어 벌벌 떠는 내 모습과 얼굴의 상처를 보고 와락 인상을 찌푸린 리디아. 그녀가 겨누고 있던 검을 내렸다.
“목적. 뭐야.”
“당연히 내 안전이지. 이 도시를 빠져나갈 때까지 나를 추적하지 마라. 그리하면 성벽 근처에 꼬마를 두고가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늘어뜨린 검을 강하게 바로 쥐는 리디아. 그래. 그렇겠지. 이게 올바른 선택이다.
상대가 강하게 나오자 두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럼 그냥 이 자리에서 인질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
“….”
더는 수가 없다고 생각되자 아예 배 째라는 식으로 구는 두목. 이에 마지막 발악을 위해 전신을 바짝 긴장시키던 순간이었다.
“…좋아. 대신 인질의 안전을 보장해. 어긴다면 세상 끝까지 쫒아가서라도 벨 테니까.”
“뭐…?”
정말로 응할 줄은 몰랐는지 멍한 목소리를 내는 두목. 나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실적을 포기하고 후환을 남겨서라도 생판 처음 보는 타인을 살리겠다고?
내게는 불가능한 결정을 내린 리디아에게서 갑자기 후광이 비쳐보이는듯 했다.
“잘 생각했다! 역시 고결한 리디아! 이쪽 또한 약속은 지키지!”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다시 혈색이 돌기 시작한 두목이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들뜬 어조. 동시에 내 옆구리에 집중되는 음험한 살기. 과연. 그런 건가.
리디아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어도 두목 쪽은 아닌가 보네.
내 옆구리에 칼빵이라도 놓고 도망치려는 거겠지. 리디아의 성정이라면 부상입은 나를 치료하느라 추적이 느려질 테니까.
뭐 이럴 줄 알았다.
이곳보다 훨씬 안전한 현대 지구인의 눈으로 봐도 리디아의 방식은 너무 무르다.
그렇기에 다들 고결하다며 칭송하는 한편 뒤에서는 이용해먹으려 드는 거겠지. 지금의 두목처럼.
하여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한 손 거들기로 했다. 일단 내 생명의 은인이잖은가.
“후우…후우….”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며 천천히 지하감옥을 빠져나가는 두목. 그녀가 리디아의 옆에 다다르자 긴장감 또한 최고조에 다다른다.
통수부터 치는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녀석답게 리디아에게 통수 맞을까 걱정하는 거겠지. 쓸데없는 걱정인 것 같지만.
나는 나대로 앞으로 찾아올 고통에 대비해 이를 악물었다.
3성 마법 스킬이 마력을 검술은 강인한 신체를 신성술은 신성력을 제공한단면 소매치기같은 잡기에는 어떤 부가 효과가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민첩성과 유연함이다.
뚜둑.
순간 한쪽 손목 관절을 뽑아 구속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멀쩡한 쪽의 손으로 펼치는 소매치기.
목표는 당연히 내 목에 겨누고 있는 두목의 단검이다.
“…어?”
리디아에게 집중하고 있던 탓에 제대로 대응조차 못하고 무기를 빼앗긴 녀석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철장을 탈출하지 못해 가만히 있었을뿐 밧줄로 된 구속 정도는 얼마든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몰랐던 모양이지?
역전된 상황이 기꺼워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까꿍 이 씨발련아.”
순식간에 두목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꽂히는 단검.
푸쉬이익-!
상당한 피가 튀었지만 한손이라 힘이 부족해 결정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니 한번으로 멈추지 않고 연거푸 내리 찍었다.
“죽어! 죽어! 죽어!”
푹! 푹! 푹!
애초에 쥐고 휘두르기 위한 것이 아닌 투척용 단검이라 그런걸까. 몇번 휘두르자 충격에 손이 밀려 칼날에 손바닥이 베이기 시작한다.
코등이가 이렇게 중요하단 말이지. 내심 투덜거리며 계속해서 단검을 박아넣었다.
멀쩡했던 손바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그리고 두목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털썩.
목이 반쯤 뜯겨나간 두목이 공허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다. 하지만 출혈은 여전히 이어져 분수처럼 뿜어진 피가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허억…허억….”
뒤늦게 몰려오는 고통. 전력질주라도 한 것처럼 헐떡이는 호흡.
가장 먼저 피를 뒤집어 쓴 탓에 전신이 시뻘겋게 젖어있었다. 음. 옷을 뺏겨서 다행이네. 만약 새 옷이 이꼴 났다면 정말 슬펐을 테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무슨….”
뒤에서 들려오는 황망한 목소리에 쭈뼛쭈뼛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굳어있는 리디아가 있었다.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가 처참하게 죽은 도적 두목과 피투성이가 된 나. 그리고 손에 쥐고있는 단검을 왕복한다.
오케이. 상황 파악 완료.
즉시 단검을 내동댕이 쳐 범행도구를 숨기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애처로운 목소리를 꾸며냈다.
“정의로운 모험가님…! 저를 구하러 와주셨군요!”
“….”
어째서인지 리디아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위험한 것을 보았다는 듯이.
너무하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히에엑! 이 살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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