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
대뜸 전투광 농쭉 보스로 착각 받았다.
아니 여기서는 놈쭉인가?
“나쁘지 않아….”
입단식 느낌으로 지갑을 상납받은 거야 당연히 좋았다. 하지만 지금의 감동은 단순히 묵직해진 지갑 때문이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어쩌다 보니 지금의 상황에 다다른 것이지만 찬찬히 생각해 볼수록 가슴 깊숙한 곳의 무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더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지갑을 슬쩍하는 정도면 모를까 정면으로 붙을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 상대 아닌가.
하지만 이젠 아니다. 동네 양아치들은 더 이상 내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체력 근력 리치 등등. 아직도 대부분의 스펙이 부족하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아무튼 싸우면 내가 이기는데.
그동안 몬스터만 상대했고 처음으로 맞붙은 약탈자는 기습으로 반쯤 조지고 시작했으며 언제나 주변에는 엘리나 리디아 같은 강자가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강해진 것이다! 과거의 벽 따위는 진작에 뛰어넘었을 만큼!
이를 자각하자 어쩐지 세상 모든 것이 하찮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가. 이게 강자의 시선인가….”
“아 요나가 또 이상한 소리함다.”
“쉿. 분명 다음은 어느 조직을 먹어치울까 고민 중인 게 분명함다.”
혼자 분위기 잡는 꼴을 못 보는 건지 한마디씩 거드는 레몬과 애플.
“…레몬 애플.”
“무슨 일임까?”
“불렀슴까?”
말은 잘 듣는지라 쪼르르 달려와 내 앞에 서는 쌍둥이. 그런 둘의 발을 마구 번갈아 밟기 시작했다.
꾹꾹.
“너희 때문에 흥이 깨졌으니까 책임져!”
“갑자기 그게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소림까….”
“좀 더 세게 밟아줬으면 하는 검다.”
자기가 한 말이 안 들렸을 거라 생각한 건지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몬. 애플은 그냥 즐기는 자 모드였다.
일부러 힘 빼고 밟은 거긴 하지만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조금 더 힘을 주어 몇 번 추가로 밟아준 뒤에야 쌍둥이 엘프를 풀어주었다.
“하아. 좋아. 이걸로 봐줄게.”
“뭔진 모르겠지만 감사함다.”
“포상은 언제나 환영임다.”
“헛소리는 거기까지 하고. 저기 가서 으르렁대는 애들이나 데려와 봐.”
“오! 드디어 다음 타겟을 사냥하러 가는 검까?”
“당장 다녀오겠슴다.”
희희낙락 웃으며 험악한 분위기의 양아치들을 향해 달려간 레몬과 애플.
둘이 말을 걸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풀어지며 사이좋게 내 쪽으로 다가온다.
시선이 마주치자 바로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깍두기 인사를 해오는 녀석들. 본래 자기 패거리를 이끌던 전 대가리 둘이 한층 깍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뭐든 말씀해 주십쇼.”
“어. 물어볼 게 있어서 부른 건데…그 전에 이거부터 해결하자. 너네 아까 왜 그렇게 서로 노려보던 거냐?”
“으음…그게 실은 저희가 예전부터 좀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이 좁은 구역에 서로 몰려있다 보니…예….”
머쓱하게 대답하는 둘. 참고로 가장 먼저 만났던 패거리의 대장은 아직도 기절한 상태라 적당한 골목에 눕혀두고 왔다.
추운 날에 입 돌아가지 말라고 낙엽으로 꼼꼼하게 머리끝까지 덮어주고 왔다. 내가 이렇게 따뜻한 남자다.
“그래? 과거의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이제부터는 사이좋게 지내. 적어도 내 앞에서 싸우는 티 내지 말라고. 무슨 뜻인지 알지?”
“예. 여차하면 한쪽을 없애서 싸울 일 없게 만드시겠다는 뜻 아닙니까.”
“시정하겠습니다.”
“….”
아니. 그냥 쓸데없이 투닥거리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대체 저년들 눈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길래 이런 말이 나오는 걸까.
뒷머리를 긁적이며 원래 하려던 말을 꺼냈다.
“그래. 잘하자. …그나저나 너네 말고 다른 양아치들 알고 있는 애 있냐? 자잘한 것들 말고 털어볼 만한 년들로.”
“역시….”
“처음부터 이 거리를 집어삼킬 계획이셨군요.”
“???”
또 제멋대로 감탄하는 녀석들. 이젠 신경 쓰는 것도 귀찮다.
“그래서? 대답은?”
“다른 만만한 놈들 말씀이시라면…역시 남쪽의 클로에가 있겠군요.”
“저희와 같은 사천왕 중 하나지만 보스의 상대는 아닙니다. 저쪽으로 세 블록 정도 가시면 있을 검다.”
“….”
이 쪼끄만 동네에서 사천왕은 뭔.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내 옆에서 떨어지질 않는 레몬을 콕콕 찔렀다.
“레몬레몬아.”
“으읏…옆구리는 성감대임다…좀 더 부드럽게 만져주셨으면 함다.”
“헛소리 말고 잠깐 쪼그려 앉아 봐.”
“알겠슴다.”
좀 바보지만 시키는 일은 곧잘 하는 레몬답게 즉시 내 밑에 쪼그려 앉는다.
그런 레몬의 어깨에 올라탔다. 이른바 목마 자세.
“오 오오오…! 허벅지가 양옆에! 뒤통수에 물컹한 감각이…!”
“레몬이 부럽슴다. 저는 뭐 없는 검까?”
호들갑을 떠는 레몬과 불쌍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애플. 이에 대충 손을 휘저으며 답했다.
“레몬은 이제 일어나. 그리고 애플은…다음에 뭔가 해줄 테니까 일단 떨어져.”
“알겠슴다!”
“기대하고있슴다!”
뒤에서 전 두목 년들이 레몬과 애플을 부러워하는 시선이 보였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들었지 레몬아? 저쪽으로 가면 된다더라.”
“알겠슴다! 요나의 발이 되어 열심히 달려보겠슴다!”
“그럼 나는 손이 되겠슴다. …어라? 그럼 이제 딸치면 대딸이 되는 검까?”
헛소리하는 애플을 무시하며 레몬의 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가라 레몬! 전력 질주다!”
“레몬레몬!”
잔뜩 흥분한 레몬이 나를 업은 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늦게 우리를 쫓아오는 애플과 나머지들.
당연한 말이지만 속도는 나보다 느리다. 대신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데다가 훨씬 높은 곳의 공기를 마실 수 있으니 나름 괜찮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낄낄 웃는 것도 잠시. 어느새 도착한 세 블록 뒤의 코너를 돌자 마찬가지로 뭉쳐서 낄낄대는 양아치들이 있었다.
녀석들이 합체한 우리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사이. 그대로 몸을 일으켜 레몬의 어깨를 박차며 점프했다.
“토옷!”
그리고 공중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며 그 회전력을 담은 발차기를 가장 가까운 녀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퍼억!
“끄악!”
그렇게 한놈 다운 시키고는 나머지 녀석들을 검지로 척! 가리키며 외쳤다.
“얌전히 지갑을 내놓는다면 유혈 사태는 없을 거야!”
“…이 미친 꼬맹이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누가 보면 왕족이라도 줘 팬건 줄 알겠네. 격하게 반응하는 녀석들이 뒤늦게 달려온 애플과 떨거지들을 발견했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 하지만 놀랍게도 놈들은 항복하는 대신 끝까지 싸울 것을 선택했다.
“여자로 태어나서 어떻게 남자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너넨 자존심도 없는 거냐!”
“자존심은 멀고 주먹은 가깝슴다.”
“자존심은 돈이 안 되는 검다.”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레몬과 애플. 나머지 녀석들도 따로 말은 안했지만 비슷한 생각으로 보였다.
마지막 양아치 대장…아마 남쪽의 클로에니 뭐니 하는 자칭 사천왕 중 하나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자고로 남자란 여자 밑에 깔려서 앙앙대기만 하면 되는 법. 내 오늘 너를 남자로 만들어 주마!”
“와! 들었어? 나 저런 대사 실제로 하는 사람 처음 봐!”
“말하면서 쪽팔리지도 않은 검까?”
“남자는 깔아뭉개는 것보다 깔리는 게 더 좋은 걸 이해하지 못하는 꼴알못인 검다.”
“?”
“?”
서로가 서로를 광인 쳐다보듯 바라보는 레몬과 애플. 둘이 평소처럼 바보짓을 했을 뿐이지만 상대에게는 다르게 느껴진 걸까.
인상을 와락 찌푸린 클로에(30대 중반 근육 돼지)가 두꺼운 빠따를 휘두르며 외쳤다.
“뭐해! 가서 조져! 가장 먼저 붙잡는 년은 나 다음으로 따먹을 수 있게 해주마!”
실로 천박한 포상. 하지만 부하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엔 충분했나 보다. 내가 이렇게 개쩌는 미소년이다.
한꺼번에 달려드는 다섯 명의 양아치들. 슬쩍 손을 흔들어 도와줄 필요 없다는 사인을 보내고는 몸을 던졌다.
길 찾기 스킬의 보너스로 얻은 뛰어난 공간 지각 능력이 주변 모든 것을 인식하고 활로를 찾아낸다.
그리고 소매치기 스킬로 얻은 민첩성에 기대어 가야 할 길로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휙! 휘익!
“어…?”
“이게 무슨?”
아무리 둘러싸여도 몸 성히 포위에서 빠져나올 수 있더라. 길 찾기 스킬을 본격적으로 활용해 본 건 처음인데 꽤 쓸만하네.
…원래 목적인 길 찾기에는 한 번도 안 써봤지만!
지금의 감각을 잊지 않은 채 차근차근 가까운 녀석부터 쓰러뜨렸다. 다른 년들과 달리 죄질이 무거우니 맨손이 아닌 단검으로.
서걱-
깊게 베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먹으면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급소만 골라서 거죽을 베어냈다.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덜미나 가슴께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 주저앉거나 구석으로 물러나는 녀석들. 레모네이드를 지리는 녀석은 없었으나 전의는 확실하게 꺾였다.
마지막 남은 클로에가 빠따를 휘두르며 발악했지만….
“넌 뒤져라.”
종이 한 장 간격으로 피하며 소매치기로 빠따를 뺏었다. 그리고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빠악-!
그래도 나름 경험치가 쌓인 건지 이번에는 한 번에 기절한 녀석.
쿵!
바닥에 엎어져 움찔거리는 푸짐한 살덩이를 한쪽 발로 밟으며 승리를 선언했다.
“이겼다! 이제 이곳 제4 상업지구는 우리 요나 패밀리의 것이다!”
“““와아아!!!”””
좁은 골목이 떠내려가라 환호성을 지르는 것도 잠시. 이 정도면 됐다 싶어 다시 지갑이나 파밍하려던 순간이었다.
철컥.
선명한 금속음과 함께 빨간 머리의 비키니 아머 괴인이 뒷골목에 발을 들였다.
“신고를 받고 왔는데. 아는 사람이 있네.”
“…아.”
평소와 달리 실로 바람직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저 무표정한 얼굴을 어떻게 잊겠는가.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요나.”
괴인의 이름은 리디아였다.
“그게 말이죠 리디아 님…어쩌다 보니 제가 이 동네 양아치들을 싹다 통합했는데….”
“해산해.”
“방금 막 통일했는데 해산은 좀….”
소심하게 항의하자 꿀밤이 날아왔다.
꽁!
“해산해.”
“다들 꺼져! 요나 패밀리는 오늘부로 해산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양아치들. 아마 척 봐도 고위 모험가로 보이는 리디아에게 겁먹은 거겠지.
심지어 레몬과 애플도 그사이에 호다닥 도망치더라. 의리 없는 년들.
“천하통일…덧없는 꿈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리디아가 내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응. 잘했어. 이제 가자.”
“아야얏! 자 잠시만요!
“또 뭐야.”
“갈 땐 가더라도 지갑은 털어야죠!”
“….”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줬으면 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닌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배가 고파요…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