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7
이번에는 좀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보기로 했다.
중간에 약탈자 파티를 만나서 그렇지 혼 래빗까지는 수월하게 쓰러뜨릴 수 있었으니까.
다른 모험가들이야 혼 래빗을 상대로 파티 플레이나 행동을 읽고 먼저 움직이는 기술을 배운다지만….
나는 혼 래빗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터라 근력이라도 강한 고블린보다 혼 래빗 쪽이 상대하기 쉬웠다.
무언가 배울 게 없는데 굳이 시간 죽치고 있을 이유는 없지.
“맞다. 리디아 님. 오늘은 제가 한번 앞장서 볼게요.”
“…아직 일러. 지금은 직접 방향을 찾아 움직이는 것보다 기습이나 함정을 간파하는 눈썰미를 기를 때.”
어째 오늘따라 한숨이 많은 리디아였지만 할 말은 제대로 하겠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이해는 한다. 아직 미궁에 몇 번 들어가 보지도 않은 녀석이 몬스터 좀 잡아봤다고 길 찾기까지 맡겨달라 나서면 제지하는 게 정상이지.
근데 나는 정말로 자신 있다. 이번에 길 찾기 스킬을 뽑았으니 1층에서 헤맬 것 같진 않거든.
그런 이유로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지금껏 제가 혼 래빗 때를 제외하고 실수한 적 있었나요?”
“없었지. 하지만 미궁은 단순히 강하다고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요나는 아직 미궁의 진짜 무서움을 몰라.”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요.”
리디아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혼 래빗 때처럼 무슨 일이 생겨도 리디아 님이 도와주실 거라는 거요.”
“그거야 뭐.”
“딱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그땐 바로 말려주셔도 괜찮아요. 다음부터는 얌전히 리디아 님의 말에 따를 테니까요.”
“….”
“믿고 있어요. 저의 기사님.”
“…읏.”
얼굴을 붉힌 리디아가 숨을 들이 삼켰다. 그리고는 한참을 이리저리 시선을 방황하더니 결국 한숨을 내뱉는다.
“하아…요나. 그거 반칙.”
“에.”
“…그러니까 오늘까지만 봐줄게. 다음부터는 금지.”
“와아! 고마워요 리디아 님!”
활짝 웃으며 리디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대로 끌어안으며 가슴팍에 머리를 묻을 생각이었지만.
“어딜.”
그대로 리디아의 손에 이마를 붙잡히며 저지되었다.
“어차피 여자 가슴인데 그거 가지고 쩨쩨하게 굴기에요?!”
“그러는 요나야말로 왜 이렇게 집요해. 말 그대로 겨우 여자 가슴인데.”
“그건…그건…!”
거꾸로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정확히는 할 말은 많지만 무엇하나 내뱉기 꺼려지는 말이다.
우물쭈물대는 나를 향해 리디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그렇게 성급해하지 마. 꼭 육체관계가 얽혀있는 게 아니더라도 나도 엘리 선배도 요나를 버리지 않을 테니까.”
“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자 한층 더 자애로운 표정이 된 리디아.
심지어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모종의 결의마저 느껴졌다.
“괜찮아. 너무 서둘러서 어른이 될 필요는 없어. 그건 나와 엘리 선배의 몫. 요나는 천천히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나아가면 돼.”
“???”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리디아는 진심으로 보였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 정도로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용?’ 같은 말을 했다가는 서로 뻘쭘하지 않겠는가.
“네. 명심할게요.”
“응. 착한 아이.”
뿌듯한 미소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 리디아. 잘 모르겠지만 정답이었나 보다. 히히 웃으며 양손을 뻗었다. 리디아가 가슴을 가렸다.
“…아니 그거 말고 지도랑 나침반을 주세요.”
“…응 하지만 아까 요나가 말한 대로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바로 원상 복귀야.”
“넹.”
뻘쭘하게 끄덕인 리디아에게서 지도를 받아 든 뒤. 현 위치와 세계수 사이의 정중앙쯤 되는 곳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 마음먹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뾰족한 막대기 같은것이 머릿속에 푹! 틀어박히는 감각이 들었다.
뾰족하다고는 했지만 아픈 것은 아니다. 그런 형태의 이물감이 들었을 뿐이지.
내게만 느껴지는 막대는 빙글빙글 회전하더니 이내 어느 한쪽으로 이끌리기 시작했다.
과연. 머릿속에 언제나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또 다른 나침반이 생긴 건가.
본래는 신의 유해에 이끌리는 특수 나침반 하나에 의존해 길을 찾아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뒤지게 어렵고 섬세한 작업이다.
현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유해의 위치를 파악하고 이 둘을 기준으로 원하는 안전지대로 향하는 각도를 계산해야 하니까.
심지어 이동 중에 조금이라도 방향이 틀어지면 딴 길로 샐 수 있으니 수시로 나침반을 확인하며 길을 조정해야 한다.
익숙해지면 할 수야 있겠지만 익숙해지기까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방법.
하지만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다들 울며 겨자 먹기로 지금 같은 불편한 방식을 고수한 것인데….
나는 길 찾기 스킬 덕분에 내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할 필요가 없어졌다.
사실상 가장 어려운 과정을 스킵한 셈.
물론 길 찾기 스킬이 만능인 것은 아니었다.
분명 중간 중간에 쉴 수 있는 안전지대 몇 곳을 경유지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그 부분은 반영되지 않고 최종 목표로 이어지는 가장 빠른 길만 스킬에 잡혔다.
아무래도 2성짜리라 능력의 매커니즘이 단순한 게 분명하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직접 거쳐 갈 안전지대를 지정하고 가장 가까운 곳을 목표 삼아 움직이기를 반복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애초에 대부분의 모험가가 지도 보고 움직일 때는 이런 식이기도 하고.
다만 이런 방식으로 발동하는 거라면 그 한계가 명확하다.
내가 가야 할 곳을 명확히 의식해야 하고 중간에 이어지는 길은 따로 설정할 수 없고 오직 최단 루트만 보여준다.
그렇다면 지도가 없는 중층부에서는 효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겠지.
길 개척하기가 아닌 길 찾기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성짜리 스킬로 중층부 이상을 날로 먹겠다는 생각이 양심 없는 짓이기도 하고.
“좋아요. 일단 이쪽으로 가죠 리디아 님.”
“좀더 신중…아니 아무것도 아냐.”
“훈수 정도는 둬도 괜찮아요.”
“…요나는 나랑만 파티해서 모르겠구나. 다른 모험자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들이 몇 있어. 그중 하나가 어지간하면 길잡이의 결정을 의심하지 않을 것.”
“그런 것도 있어요?”
“응. 그래야 파티가 원활히 돌아가거든. 지금이야 이렇게 지도도 있고 여러 요령도 알려져 그럭저럭 돌아다닐 만하지만…왜 미궁이 미궁이라 불리는지 잘 생각해 봐.”
“아.”
이건 내가 정말 신경 써서 설정한 내용이라 잘 알고 있다.
툭 까놓고 말해 던전이 더 친숙한 명칭 아닌가. 거기에 지하로 이어진 땅굴보다는 하늘 위로 솟은 탑이 더 멋있고.
하지만 판 그레이브는 던전도 탑도 아닌 미궁으로 불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판 그레이브는 보물이 숨겨진 곳도 시련을 극복하여 나아가는 곳도 아니니까.
그저 신들의 사체와 그들이 남긴 기적이라는 이름의 재앙이 잠든 곳.
온갖 힘이 얽히고설켜 개념을 왜곡시키는 곳. 드높은 벽 대신 뒤틀린 시공간이 모험가를 가두는 곳.
그리하여 신의 옆자리에 필멸자를 순장시키는 곳이 바로 판 그레이브다.
판 대륙 사람들이 이러한 설정을 전부 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본능적으로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궁이 미궁인 이유라니. 본질을 꿰뚫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많은 사람이 내가 고심한 흔적을 알아봐 준다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네.
절로 흘러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미궁에서는 몬스터가 나오지 않더라도 항상 조심할게요.”
“바람직한 자세. …그런데 요나는 왜 자꾸 실실 웃어?”
“갑자기 좋은 일이 생각났거든요.”
“으음?”
영 미심쩍다는 표정이지만 뭐라 할 만한 일도 아니니 반보 물러나 본인이 말한 대로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하는 리디아.
처음에는 어디 얼마나 할 수 있나 지켜보겠다는 듯 팔짱을 낀 리디아였으나 내가 한 번도 헷갈리는 일 없이 길을 찾자 입을 헤- 벌리기 시작한다.
여러모로 칠칠치 못한 모습이었으나…어차피 본 사람이라고는 나랑 여기까지 오면서 마주친 몬스터(였던것) 뿐이니 괜찮겠지.
그렇게 특수 나침반과 길 찾기 스킬을 이용하고 마주치는 모든 몬스터를 도륙 내며 도착한 혼 래빗 서식지 끄트머리 안전지대.
일전에 자신이 길잡이 역할을 했을 때보다 훨씬 빠르고 안전하게 미궁을 탐사하자 괜히 억울한 소리를 내는 리디아.
“이건 사기야.”
“제 재능이 좀 사기적이긴 하죠. 부러우신가요?”
“….”
입을 꾹 다문 리디아. 하지만 그 불퉁한 모습 자체가 하나의 대답이었다.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음 안전지대를 향해 발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확 바뀌는 숲의 분위기.
실제로 무언가 바뀐 것은 아니다. 여기나 초입이나 나무의 식생은 그대로였으니까.
다만 공기의 질이 무거워졌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평소보다 조심스레 나무 사이를 헤쳐 나가기를 반복하던 도중이었다.
어느 순간 길 찾기 스킬이 찌릿하게 울기 시작했다. 마치 이 앞에 무언가 위험한 것이 있다고 경고하듯이.
본래는 꺼려지는 정도가 끝인데 이런 강렬한 거부감이라니. 뭔가 있긴 있나 보다.
적당한 돌멩이를 주워 스킬이 속삭이는 곳을 향해 던졌다.
쐐애액…퍽!
“크릉!”
나무 뒤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으르렁 소리. 이미 들켰다 생각한 걸까. 굵직한 나무 뒤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녀석.
황소만 한 덩치와 강철처럼 빳빳한 털가죽. 거기에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닌 맹수.
아이언 울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앗! 야생의 엘리가 나타났다!”
“…장난치지 말고 집중해 요나.”
어쩔 수 없다. 이젠 늑대 수인이 아니라 늑대를 봐도 반가운걸.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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